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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최규학·시집만들기397

광대노린제 / 최규학 광대노린재 최규학 곤충계의 패션 모델 광대노린재는 슬프다 외투가 아름다워서 슬프다 사람의 눈에 들어서 슬프다 호랑이 가죽을 벗기고 코끼리 이빨을 뽑는 사람의 맘에 들어서 슬프다 호랑이 가죽도 벗기는데 너를 그냥 두겠느냐 사람에게 잡혀 가거든 아양 떨며 얻어먹지 말고 굶어 죽어라 조상님들이 신맛을 풍기며 순교한 덕에 새의 사냥을 피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 잡혀 가거든 너도 순교자가 되어라 그래야 후손을 살릴 수 있다 개가 되지 말고 늑대가 되어라 닭이 되지 말고 기러기가 되어라 살려거든 절대 길들여지지 마라 2020. 6. 12.
너의 나무 되어 너의 나무 되어 최규학 나는 너의 나무 되어 산비탈을 지키는 나무 되어 상처를 감싸고 무너짐을 막을 것이다 바람을 막고 비를 막고 너에게 쏟아지는 온갖 것들을 막을 것이다 살아서는 너의 피부 되고 죽어서는 너의 뼈가 될 것이다 너를 위해 선 몸 죽을 때까지 눕지 않고 너를 위해 뻗은 팔 죽을 때까지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낮에는 꽃을 들고 밤에는 별을 들고 네 곁을 한 걸음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꼿꼿하게 너를 지킬 것이다 2020. 5. 31.
반성문 / 최규학 반성문 최규학 어릴 때는 반성문을 쓰기 싫었는데 이제는 자청해서 반성문을 쓴다 어릴 때는 매 대신 반성문을 썼는데 이제는 약 대신 반성문을 쓴다 반성문을 쓰고 나면 마음이 후련하다 어릴 때 토끼몰이했던 것을 반성한다 선생님은 장군 우리들은 졸병이었다 학교 뒷산을 포위하고 함성을 질렀다 토벌대처럼 포위망을 좁히면 어린 토끼들은 도망가다 눈 속에 얼굴을 파묻고 어른 토끼들도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잡혔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은 수호지의 송강처럼 토끼들을 때려죽였다 선생님들은 토끼탕 고기 안주로 축배를 들고 우리들은 국물에 밥을 먹으며 승리감에 도취했다 새끼 토끼들이 얼마나 놀랐으랴 부모 토끼들이 얼마나 슬펐으랴 토끼 가족에게 용서를 빈다 세상에 나와보니 나도 토끼다 토끼의 빨간 눈이 슬프다 사람의 빨간 .. 2020. 5. 25.
청실 홍실 / 최규학 청실홍실 최규학 외삼촌께서 한 조각구름 되어 어머니가 계시는 백운향(白雲鄕)에 가셨다 겨우 인생 팔십인데 붙잡는 인연보다 기다리는 인연이 더 좋았나 보다 세상살이 험난하여 봄가을은 짧고 여름과 겨울은 길었다 술 없이 어찌 그 혹독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으랴 술로는 이태백이요 행실은 공자님이었으니 풍양 조 씨 가문에 그만한 인물도 흔하지 않으리라 외삼촌 결혼식 때 청실홍실 묶는 것을 보았는데 외삼촌 장례식 때 청실홍실 푸는 것을 보는구나! 결혼식 때 본 청실홍실은 아침노을 같았는데 장례식 때 보는 청실홍실은 저녁노을 같구나 이승의 저녁노을이 저승에서는 아침노을이겠지 오십여 성상을 청실홍실 엮어서 아들 손자며느리 다 짜 놓았으니 무슨 한 남았으랴 다만 고향 뒷산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 들리거든 홀로 남은 홍실.. 2020.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