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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최규학·시집만들기397

붙어있는 낙엽 / 최규학 붙어있는 낙엽 최규학 겨울까지 붙어 있는 낙엽은 추하다 나무가 놓아주지 않던 낙엽이 놓지 않던 그 모습은 자연스럽지 않다 다 떨쳐 버리고 맨몸으로 찬바람을 견디는 나무는 얼마나 당당한가 저 견딤으로 이별의 아픔을 잊고 푸르고 싱싱한 새잎을 맞게 되나니 그 얼마나 숭고한 놓음인가 미련 없이 떨어져서 나무 아래에서 안식을 즐기는 낙엽은 또 얼마나 편안한가 스스로의 따뜻함이 나무를 따뜻하게 하고 썩어서 나무의 거름이 되고 새잎이 되어 다시 나무를 만나게 되나니 그 얼마나 거룩한 비움인가 작은 욕심 때문에 우주의 섭리를 따르지 않고 붙어 있는 낙엽은 그 얼마나 초라한가 2021. 1. 8.
해와 달 /최규학 해와 달 최규학 하늘은 청자 쟁반 낮에는 홍시 하나 담겨 있다 푸릇푸릇 씨가 보인다 하늘은 청자 쟁반 밤에는 송편 하나 놓여 있다 거뭇거뭇 속이 보인다 하늘의 주인은 하느님일까? 저걸 드시지 않고 그냥 두다니 정말 착하시다 누가 주인이었으면 벌써 꿀꺽했을 텐데 2021. 1. 1.
작은 돈의 행복 작은 돈의 행복 최규학 그 초등학교의 한팔쯤 되는 곳에 잉어빵 굽는 곳이 있습니다 빵틀 상자에는 맛있는 광고가 붙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오천만의 대표 주전부리" "부드러우면서 맛있는 슈크림 잉어빵"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요" 하교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튀밥처럼 터져나와 코스모스처럼 줄을 섭니다 갈대 할아버지와 억새 할머니도 끼어 있습니다 카드는 받지 않습니다 신사임당도 사절입니다 슈크림 잉어빵은 천원에 두마리 팥 잉어빵은 천원에 네마리입니다 아이들은 천원 한 장을 태극기처럼 들고 있거나 오백원짜리 또는 백원짜리 동전 몇 개를 보석처럼 쥐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모습이 운동회 때 출발선에 선 선수 같습니다 아주머니도 심판 선생님처럼 손놀림이 민첩합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보다 아주머니를 더 좋아하는 듯 보입니다.. 2020. 12. 18.
작은 풀 작은 풀 최규학 겨울이 머무는 산비탈에 작은 풀이 살고 있습니다 위세를 떨치던 키 큰 풀은 죽어서 영혼 없이 서 있는데 장군처럼 우뚝한 나무도 갑옷을 벗고 덜덜 떨고 있는데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이름도 없는 민초는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주변이 누런 하니 푸른빛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분 향기 뿜어내며 요염함을 뽐내던 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먼 길을 날아와 목청을 돋우던 철새들도 종적이 묘연한데 보잘것 없는 작은 풀은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땅이 꽝꽝 얼어도 한길이 넘게 눈이 쌓여도 작은 풀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북극에서 날아온 바람의 칼날도 작은 풀은 베지 못합니다 눈사태에 구르는 돌맹이도 작은 풀은 누르지 못합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2020.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