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최규학·시집만들기397

잔챙이 / 최규학 잔챙이 최규학 큰 나무만 있는 산은 적막하다 잔챙이가 우거져야 산짐승이 살 수 있다 큰 물고기만 있는 강은 살벌하다 잔챙이가 있어야 강이 넉넉하다 큰 가지만 있는 나무는 우울하다 잔챙이가 있어야 나무가 즐겁고 힘이 난다 세상에 큰 인물만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무슨 웃을 거리가 있겠는가 뭇별이 있어야 북극성이 빛나듯이 잔챙이가 많아야 세상은 살맛난다 2020. 10. 23.
플라타너스 낙엽 / 최규학 플라타너스 낙엽 최규학 플라타너스 낙엽을 바라보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오래 입은 헌 옷처럼 누리끼리한 피부 주머니에서 갓 꺼낸 낡은 손수건처럼 구겨진 모습 바스락 소리도 내지 못하고 푸서억~ 허탈한 한마디 그러나 벌레에 뜯기고 비바람에 찢긴 저 명예로운 훈장 어느 인생이 이보다 더 숭고할 수 있으랴 가슴속에 묻어둔 꽃 한 송이는 아직 꺼내지도 못했지마는 미련 없이 떨어지는 저 초연한 자세 영락없는 우리 아버지다 2020. 9. 27.
하이에나 / 최규학 하이에나 최규학 나는 한 마리 하이에나가 되고 싶다 산을 뽑고 세상을 덮을 만한 영웅은 아닐지라도 한 번 물으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는 지독한 하이에나가 되고 싶다 사냥하지도 않고 처먹는 노력하지도 않고 즐기는 저 건방진 수사자를 물어뜯고 싶다 설거지나 하는 주제에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일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살이 뒤룩뒤룩 찐 저 고귀한 수사자의 목덜미를 콱 물고 죽을 때까지 놓지 않고 싶다 뭇 짐승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저 수사자의 진홍색 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 사자가 흘린 찌꺼기를 주워 먹는 비리비리한 찌질이 말고 목숨 바쳐 초원의 정의를 실현하는 진정한 하이에나가 되고 싶다 2020. 9. 18.
당산의 목소리 / 최규학 당신의 목소리 최규학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에 꽃이 핍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꽃잎 스친 바람입니다 내 마음의 자욱한 먼지를 말끔하게 몰아냅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별빛 담긴 정화수입니다 내 핏줄의 찌꺼기를 깨끗하게 씻어 줍니다 얼키고 설킨 세상의 거미줄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나비가 될지라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다시 날개를 저어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보다 힘을 주는 음악은 없습니다 오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새벽 별을 셉니다 2020. 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