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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최규학·시집만들기

작은 풀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0. 12. 11.

작은 풀

최규학

겨울이 머무는 산비탈에 작은 풀이 살고 있습니다
위세를 떨치던 키 큰 풀은 죽어서 영혼 없이 서 있는데
장군처럼 우뚝한 나무도 갑옷을 벗고 덜덜 떨고 있는데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이름도 없는 민초는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주변이 누런 하니 푸른빛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분 향기 뿜어내며 요염함을 뽐내던
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먼 길을 날아와 목청을 돋우던 철새들도 종적이 묘연한데
보잘것 없는 작은 풀은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땅이 꽝꽝 얼어도 한길이 넘게 눈이 쌓여도
작은 풀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북극에서 날아온 바람의 칼날도 작은 풀은 베지 못합니다
눈사태에 구르는 돌맹이도 작은 풀은 누르지 못합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머무는 나라에서는 작은 풀이 영웅입니다
작은 풀이 최후의 승자입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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