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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虛潭(허담)조성열·글모음

ㅡ<포정해우>는 <포정이 소를 잡다>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3. 7. 14.

다음은 수천년 이상 이어온 중국의 문자생활 중10대 명문 중의 하나인 <포정해우>입니다.

<포정해우>는
<포정이 소를 잡다>

內篇 養 生 主 (2) 庖丁解牛(포정해우)

庖丁爲文惠君解牛.
(포정위문혜군해우)

소잡는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다.

手之所觸(수지소촉)
그때 손을 대고,

肩之所倚(견지소의)
어깨를 기울이고,

足之所履(족지소리)
발로 밟고,

膝之所踦(슬지소기)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砉然嚮然(획연향연)
휙휙 울리는 뼈 발라내는 소리,

奏刀騞然(주도획연)
칼로 가르는 소리가

莫不中音(막불중음)
절도에 모두 맞았다.

合於桑林之舞(합어상림지무)

포정의 몸놀림은 상림의 무악에도 조화되며,

乃中經首之會(내중경수지회)

칼을 움직이는 소리는 경수의 음절에도 맞았다.

文惠君曰(문혜군왈)
이를 본 문혜군이 말했다.

譆善哉(희선재)
참으로 훌륭하구나.

技蓋至此乎(기개지차호)
소잡는 기술이 어떻게 해서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庖丁釋刀對曰(포정석도대왈)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臣之所好者道也(신지소호자도야)
제가 즐기는 바는 <도>입니다.

進乎技矣(진호기의)
<도>는 기술보다 우월합니다.

始臣之解牛之時,
(시신지해우지시)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에는,

所見無非全牛者.
(소견무비전우자)

보이는 소밖에 없었습니다.

三年之後(삼년지후)
3년이 지나자,

未嘗見全牛也(미상견전우야)

소가 온전한 모습 그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方今之時(방금지시)
요즘에 이르러서는,

臣以神遇而不以目視
(신이신우이불이목시)

저는 마음으로 만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官知之而神欲行,
(관지지이신욕행)

눈의 감각 기능을 멈추고 마음의 눈에 따라 손을 놀립니다.

依乎天理(의호천리)
천리에 따라,

批大卻(비대각)
큰 틈새를 열어제치고,

導大窾因其固然.
(도대관인기고연)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 몸의 생긴 그대로를 따라갑니다.

枝經肯綮之未嘗.
(지경긍계지미상)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번도 뼈와 살이 연결된 곳을 지나지 않았습니다.

而況大軱乎(이황대고호)
하물며 큰 뼈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良庖歲更刀(량포세갱도)
재주있는 소잡이가 해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割也(할야)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族庖月更刀(족포월갱도)
많은 소잡이가 다달이 칼을 교체하는 것은

折也(절야)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今臣之刀十九年矣.
(금신지도십구년의)

저의 칼은 지난 19년 줄곧 사용했어도,

所解數千牛矣(소해수천우의)
소 수천마리를 잡았어도,

而刀刃若新發於硎.
(이도인약신발어형)

칼날이 지금 막 새로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彼節者有閒(피절자유한)
소의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而刀刃者無厚(이도인자무후)
칼날은 두께가 없을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以無厚入有閒(이무후입유한)
두께 없는 칼로 벌어져 있는 뼈마디 사이에 삽입하므로,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회회호기어유인필유여지의)

공간이 널찍해서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시이십구년이도인약신발어형)

그래서 19년이 되어도 칼날을 방금 숫돌에 간 듯합니다.

雖然(수연)
하지만,

每至於族(매지어족)
칼날이 근육과 골반이 연결된 곳에 이를 때마다,

吾見其難爲(오견기난위)
어려움을 절감합니다.

怵然爲戒(출연위계)
저는 근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서,

視爲止(시위지)
눈길을 고정시키고,

行爲遲(행위지)
손놀림을 천천히 하면서,

動刀甚微(동도심미)
칼날을 매우 세심하게 움직입니다.

謋然已解(획연이해)
어느 결에 뼈와 살이 확연하게 갈라져,

牛不知其死也(우부지기사야)
소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如士委地(여사위지)
(살이 뼈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提刀而立(제도이립)
칼을 든 채 일어나서,

爲之四顧(위지사고)
사방 둘레를 살펴보며,

爲之躊躇滿志(위지주저만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만족한 기분으로,

善刀而藏之(선도이장지)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文惠君曰(문혜군왈)
문혜군은 말했다.

善哉(선재)
훌륭하구나.

吾聞庖丁之言(오문포정지언)
내가 포정의 말을 듣고,

得養生焉(득양생언)
양생의 이치를 얻었도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서 소를 잡을 때 뼈와 살이 다치지 않도록 긍경을 잘 찾아 살을 잘 발라냈다는 데서 연유해,

사물의 급소를 잘 찌르고 요점을 잘 찾아내는 것을 '긍경에 닿다'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해부학적 지식이 있다면 동물을 해체, 정육할 때 상당한 이점이 있다.

초심자는 관절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힘들어 힘으로 뼈를 잘라내지만,

관절의 형태를 정확히 알면 어디에 칼집을 넣어야 인대가 끊어지는지 알 수 있고,

근육의 이는 곳과 닿는 곳을 알면 고기에서 뼈를 발라내기 수월해진다.

춘추시대에 체계적인 동물 해부학이 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에,

경력자의 경험치라는 것은 그야말로 알파이자 오메가였을 것이다.

해당 이야기에 나오는 문혜군은 기원전 3세기 경 인물로,

이 당시 중국은 초기적인 고온환원법을 이용해 주철을 만드는 방법을 막 익혔을 때이다.

* 제철소에서 나온 강판으로 만든 현대 식칼과 달리,

제대로 열처리가 되지 않은 고대 도축칼은 잘못 다루면 날 이빨이 나가는 수준이 아니라

도신 자체가 부러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장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최고의 백정은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본다'.

즉, '망'을 통하여 자신의 관점과 사물의 관점을 하나로 융합한다.

이를 통해 인위와 조작이 섞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최상의 도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