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공 상진 묘역 (成安公 尙震 墓域)
지 정 번 호 :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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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연월일 : | 1984년 11월 3일 |
시 대 : | 조선 명종 21년(1566) |
규 모/양 식 : | 1기(基), 전체 높이 362㎝, 비신 높이 220㎝, 너비 106㎝, 두께 36㎝ |
재 료 : | 비신 대리석, 대좌·개석 화강암 |
소 유 자 : | 학교법인 상문고등학교 |
소 재 지 :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산152-5 |
조선 16세기 전반의 명재상 성안공 상진(尙震, 1493∼1564)의 묘역과 신도비이다. 신도비에는 중종·명종 연간에 활약한 그의 행적이 잘 적혀있다. 상진의 자는 기부(起夫), 본관은 목천(木川)으로 성종 24년(1493) 6월 5일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찰방 상보(尙甫)이며, 어머니는 연안인(延安人) 박사 김휘(金徽)의 딸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매부 하산군(夏山君)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성장했다. 15세부터 학문에 힘쓰기 시작하여 성수침(成守琛, 1493∼1564) 형제와 교유하였다. 중종 11년(15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9년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예문관 검열(檢閱)을 지냈다. 그 뒤 예조좌랑으로 북도평사(北道評事)가 되었고, 중종 20년(1525) 예조정랑으로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세자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등을 지냈고, 중종 28년(1533)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어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겨졌다가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1535년 동부승지ㆍ좌부승지, 1537년 대사간ㆍ형조판서ㆍ대사헌ㆍ평안도관찰사, 중종 37년(1542) 한성부 판윤으로 도총관을 겸직했다. 이어 공조판서·병조판서·지돈녕부사 겸 지의금부사·형조판서 등을 지냈고, 인종 1년(1545) 경기도관찰사, 이듬해 명종 1년(1546) 우참찬으로 전임되었으며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녹훈되어 정헌대부 정2품(정헌대부)에 오르고 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찬수에 참가했다.
명종 3년(1548) 우참찬, 이듬해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국정을 주관했는데 문정대비(文貞大妃)가 주장한 불교 양종(兩宗)의 설립에 관해 온건론을 펴 유생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고,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하여 민원을 살피기도 했다. 1551년 좌의정이 되었고 명종 12년(1558) 영의정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하면서 이후 5년간 국정을 총괄했다. 1562년 70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 杖)을 하사받았고, 이듬해 정월 사직을 간청하여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 그 뒤 얼마 안되어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사망하자 연일 음식을 폐하고 곡을 하다가 끝내 심장병에 걸려 1564년 윤2월 23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청렴하고 중후하며 점잖은 품격으로 조야(朝野)의 신망이 두터웠고 영의정 재임 중 황해도 평산 일대에서 발생한 임꺽정의 난을 평정하기도 했다. 만년에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 소윤(小尹) 일파와 어울려 사림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신도비는 명종 21년(1566) 2월에 세워졌다. 장대석 기단과 네모대좌(臺座) 위에 비신을 얹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화강암제 개석을 얹었다. 대좌 사면에는 네모난 구획 속에 꽃무늬를 새겼다. 비문은 성안공의 손자 상시손(尙蓍孫)의 부탁으로 좌찬성 홍섬(洪暹, 1504∼1585)이 지었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던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1516∼1584)이 썼으며, "成安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는 둘째 사위 예문관 검열 이제신(李濟臣, 1536∼1584)이 썼다.
명종 3년(1548) 우참찬, 이듬해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올라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부터 국정을 주관했는데 문정대비(文貞大妃)가 주장한 불교 양종(兩宗)의 설립에 관해 온건론을 펴 유생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고,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을 실시하여 민원을 살피기도 했다. 1551년 좌의정이 되었고 명종 12년(1558) 영의정에 올라 세자사(世子師)를 겸하면서 이후 5년간 국정을 총괄했다. 1562년 70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 杖)을 하사받았고, 이듬해 정월 사직을 간청하여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 그 뒤 얼마 안되어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사망하자 연일 음식을 폐하고 곡을 하다가 끝내 심장병에 걸려 1564년 윤2월 23일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청렴하고 중후하며 점잖은 품격으로 조야(朝野)의 신망이 두터웠고 영의정 재임 중 황해도 평산 일대에서 발생한 임꺽정의 난을 평정하기도 했다. 만년에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 등 소윤(小尹) 일파와 어울려 사림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신도비는 명종 21년(1566) 2월에 세워졌다. 장대석 기단과 네모대좌(臺座) 위에 비신을 얹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화강암제 개석을 얹었다. 대좌 사면에는 네모난 구획 속에 꽃무늬를 새겼다. 비문은 성안공의 손자 상시손(尙蓍孫)의 부탁으로 좌찬성 홍섬(洪暹, 1504∼1585)이 지었고,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났던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1516∼1584)이 썼으며, "成安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는 둘째 사위 예문관 검열 이제신(李濟臣, 1536∼1584)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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