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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합하(閤下)골" 지명의 유래가된 상진 선생이야기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0. 2. 10.

 

중용의 길을 가신 성안공

성안상공 상진 (尙震) 선생

상진선생의 자는 기부(起夫)요, 호는 범허정(泛虛亭).향일당(嚮日堂).송현(松峴) 등이며,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선생의 본관은 목천(木天)이며 성종 24년(1493)에 나시어 명종 19년(1564)에 72세를 일기로 타계하신 분이다.

목천(木川) 상(尙)씨의 족보에 나타나기를 상(尙)씨는 원래 삼국시대 백제국의 유민이었고, 백제가 망한 후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 초기까지 이르는 계통은 분명치 못하다는 것이며, 후백제의 부흥 운동에 상애(尙哀).상달(尙達) 등 장군이 참여하였으니 목천(木川), 현재 천안시(天安市) 지역을 중심으로 신흥 고려국에 끝까지 항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고려조가 완전히 성립한 후에 목천(木川)지역에 응거하는 제족들에게 축성(畜姓)을 내리는 등 탄압을 가하였던 것이며 [尙]씨를 [象]씨로 바꾸어 주었던 바이니 고려 문종 8년(1054) 이후에야 본래의 성을 찾아 {尙] 씨로 사용하게 되었다.

상진(尙震)공은 5세에 어머니를 잃고 8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고아의 신세가 되었으며 그 후로 매부 성몽정(成夢井) 의 집에서 자라났다.

소년기에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며, 호탕하고 늠름한 체모의 공은 뒤늦게야 학문에 눈을 떴으며, 비상한 두뇌와 노력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6개월 만에 문의(文義)를 통달하고, 10개월 만에는 글의 이치를 깨달아 막힘이 없었다.

열 일곱살 되던 해에 종실 개산부수(介山副守)의 따님과 결혼하였고, 24세에 사마시 (司馬試~生員)에 합격한 후로 공의 문장과 명망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27세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습길에 오른 후 72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46년간 나라의 중요한 직책을 두루 담당하여 지혜와 덕망을 펼쳤던 것이다.

공이 우의정에 오른 것은 57세였고 2년 후에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7년간 지내시다가 다시 영의정(嶺議政)으로 올라 7년을 보내셨으니 상신(相臣)으로서의 기간이 모두 16년이었다.

공은 높은 지위를 항상 사양하였으며 영상의 자리에서도 임금님께 간간이 사퇴하기를 자원하였으니 이는 늙은 몸과 마음으로 요직을 담당할 것이 아니라 젊고 유능한 후진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기회를 넘겨 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의 훌륭한 지도력과 고매한 덕망을 따를 자가 없었으니 71세에야 노쇠함을 핑계로 겨우 영의정 자리를 떠날 수 있는 왕(명종 18년)의 윤허를 받았고,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온 백성과 관리와 임금님까지도 애통해 하였으며 조정의 모든 정사도 3일간 철폐한 채 공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공은 천성이 충후관유(忠厚寬裕) 하고 도량이 넓으며 항상 대경(大經).대법(大法)으로써 상감께 충정을 다하였으므로 이를 정중히 여긴 중종대왕(中宗大王)께서는 어좌의 우측 병풍에 상진공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하여 놓았다는 것이다.

공은 당대의 대 정치가로 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여가에는 거문고(七鉉琴)를 즐겨 타시었다고 전한다.


선생이 지으신 [감군은(感君恩)] 곡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바다의 깊이는 닻줄로 잴 수 있거니와
우리 성군의 덕망과 은혜의 깊이는 어느 줄로 잴 수 있겠는가?
무궁한 복을 누리시어 만수로 무강하십시오
무궁한 복을 누리시어 만수로 무강하십시오
하나의 낚싯대 위에 빛나는 밝은 달(밝은 달빛 아래 낚싯대를 드리운)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역시 임금님의 은혜입니다.
태산이 높다 하지만 하늘까지는 미치지 못하거니와
우리 높으신 성군의 은혜와 덕택은 하늘같이 높으십니다(후렴 생략)

 

상진공의 출생 및 성장지는 현 부여군 장암면 합곡리 합하골(閤下谷)이다.
이 마을에서 정승이 낳았다 하여 "합하(閤下)골" 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으며 상진공은 여가마다 이 곳 고향을 찾으셨고 합하골 동편으로 2Km쯤 떨어진 정암리(부여군 장암면 정암리)의 백마강 바위 언덕에 요월대(邀月臺) 와 월파정(月波亭)을 지어놓고 이 곳에서 독서를 즐기며 후학을 지도하셨고, 거문고를 타며 낚시질을 즐기시었다는 것이다.

이 곳 맞바위의 지명이 정암 부락으로 정해진 연유는 상진 선생의 정자가 강변의 바위 위에 세워졌던 이 후로 불리어진 것이다.

그 후 1980년 6월 부여군에서는 선생의 출생지인 합곡리에 비석을 세워 그 유허지를 후인들이 잊지 않도록 해 놓았다.

 

성안공 상진선생 일화

부계문기(:조선 중기의 문신 김시양(金時讓)이 보고 들은 것을 앞 시기의 인물과 정치상황을 중심
으로 수록한 책.《부계기문》이라고도 한다. )이라는 책에

성안공 상진(1493 - 1564)의 다음 이야기가 있다.
성안공 상진은 벼슬이 파면되어 돌아가는 길에 금천 땅의 어떤 언덕 위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있었는데 한 노옹(老翁)이 소 두 마리에게 꼴을 뜯기고 있었다.

공이 묻기를 "두 소 중 어느 소가 더 좋습니까?" 하니
노옹(老翁)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세번 물어도 대답이 없으므로 공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이어서 말에 올라탔을 때 노옹이 수십보 뒤따라와서 비밀히 공에게 말하기를 "아까 묻는 말에 즉시 대답해 드리지 못 한것은 두 소가 다같이 노역(勞役)에 부려진 것이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마 하나를 지척하여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에서 내려 감사하면서 말하기를 "노옹께서는 은군자(隱君子) 이십이다.
나에게 처세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하고 드디어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그 뒤 그는 벼슬이 다시 올라서 영상에 까지 올라 갔는데 일찌기 남에게 거슬린 일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