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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현실감과 행정 능력 뛰어난 명재상 상진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0. 2. 10.

[이한우의 朝鮮이야기(9)]

현실감과 행정 능력 뛰어난 명재상 상진
명종 때 영의정 지내… 백성을 위한 정치 펼치려고 최고실세인 문정왕후와 타협해
청렴하고 자유분방… “성균관에서 관 쓰지 않고 공부하며 유학자를 조롱”

 


고려를 세운 왕건과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의 첫손 꼽히는 명장(名將)이다. 둘 다 무인이었다는 것 말고도 왕건과 이성계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독실한 불교신앙을 갖고 있었다. 왕건에게는 도선이라는 큰스님이 있었고 이성계에게는 무학이 있었다. 도선과 무학 모두 풍수에 밝았다.

무인과 불교, 풍수는 어쩌면 그 성격상 서로 어울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난세의 무인은 그 직업상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生死)를 넘나들어야 한다. 사생관(死生觀)을 세우는 데 유교나 유학보다는 불교가 훨씬 피부에 와닿았을 것이다. 또 당시 전쟁에서는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심이 3대 핵심요건이었다. 그 중에서 지리를 아는 데는 풍수만한 것이 없었다. 당시 왕건이나 이성계에게 풍수는 다름 아닌 군사지리학이었던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이 갖고 있었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적이라도 감싸안는 포용력이었다. 아들 이방원에 의해 처참한 말로를 맞긴 했지만 이성계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를 끌어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 이성계도 조선을 세운 후에 끝까지 자신을 따르려 하지 않았던 개경의 올곧은 선비들을 미워하여 “100년 동안 개경의 선비는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에 따르면 그 바람에 개경 사람은 선비로서 학업을 닦지 않고 장사로써 생업을 삼아 조선시대 개경에는 사대부라는 이름까지 없어졌다고 말한다.

포용력만 놓고 보자면 왕건이 이성계보다는 훨씬 윗길이었다.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고서도 후백제나 신라가 투항해 올 때까지 무던히도 기다렸던 그다. 결국 후백제는 내분으로 붕괴되었고 신라는 경순왕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그래야 후백제나 신라의 백성이 새 나라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으로 본 미래통찰이었다.

그런 왕건도 도저히 용서 못할 사람들이 있었다. 후백제의 충청도 목천 사람이었다. 조선 성종 때 양성지, 노사신, 강희맹, 서거정 등이 편찬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목천 사람들이 끝까지 투항을 하지 않고 버티자 돈(豚), 상(象), 우(牛), 장(獐) 등과 같은 희귀성을 부여했다. 말 그대로 돼지, 코끼리, 소, 사슴의 동물이름을 내린 것이다. 그만큼 왕건의 노여움이 컸다는 뜻이다. 물론 그 후에 豚은 頓(돈)으로, 象은 尙(상)으로, 牛는 于(우)로, 獐은 張(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들 네 성은 모두 목천을 본관으로 한다. 그밖에 목천을 본관으로 하는 마(馬)씨가 있다. 아동문학가로 유명한 마해송이 바로 이 목천 마씨다. 그러나 마씨는 그 전부터 있던 성이었다.

목천을 본관으로 하는 이 네 성은 멸문지화(滅門之禍)에 가까운 고초를 겪은 탓인지 고려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에도 이렇다 할 인물을 찾기가 힘들다. 그 유일한 예외가 명종 때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는 상진(尙震·성종 24년~명종 19년, 1493~1564년)이다.

상진은 현대적 맥락에서 재조명을 필요로 하는 인물이다. 어떤 하나의 틀에 담아낼 수 없는 그의 자유분방함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대립하는 의견을 능수능란하게 조화시켜가는 보기드문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의리(義理) 일변도의 성리학적 잣대로 보자면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인물일 수도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상진의 인품과 도량’이라는 별도의 항목을 설정해 이렇게 말한다. “정승 상진은 인품과 도량이 넓고 커서 일찍이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당시 육조판서를 두루 지낸 오상(吳祥ㆍ중종 7년~선조 6년, 1512~1573년)이 이런 시를 지었다.

 

 

 

‘羲皇樂俗今如掃/只在春風杯酒間’ 그 뜻은 대략 ‘복희씨 시대의 음악과 풍속은 지금 쓸어낸 듯 없어져 버렸고/ 다만 봄바람 부는 술자리에만 남아 있구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본 상진은 “어찌 말을 그렇게 야박하게 하는가”라며 첫 구의 마지막 두 자와 둘째 구의 앞부분 두 자를 고쳐 이렇게 읊었다.

‘羲皇樂俗今猶在/看取春風杯酒間’ ‘복희씨 시대의 음악과 풍속이 지금도 남아 있어/ 봄바람 부는 술자리에서 찾아볼 수 있네!’ 세상을 보는 시각은 말할 것도 없고 스케일이 달랐던 것이다. 이수광이 상진의 ‘도량’을 보여주기 위해 이 일화를 고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상진은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상진은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밝힌 대로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상보(尙甫)는 역참을 돌보던 종6품 찰방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 자기 집안의 한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상진은 글읽기는 내팽개치고 말 타고 활 쏘는 데만 열중했다. 무인이 되려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무 살이 다 되어서야 주변 친구들이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을 알고 공부를 시작해 다섯 달 만에 글뜻에 익숙해지고 열 달 만에 문리(文理)가 통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 무렵 문과에 급제해 관리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후 상진은 중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특진을 했다. 그 바람에 견제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상진은 이재(吏才)가 뛰어났다. 오늘날로 말하면 행정 능력이 특출했다는 말이다. 더불어 시국을 한걸음 물러서서 보는 여유를 갖고 있었다. 훈구보다는 사림과 가까우면서도 기묘사화나 을사사화를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기묘사화가 터지기 전 그가 사마시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선비들이 유난히 티를 내며 몸가짐을 삼가는 척을 하자 상진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자유인 상진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실록은 “상진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일부러 관(冠)을 쓰지 않고 다리도 뻗고 앉아서 동료들을 조롱하고 업신여기었다”고 적고 있다. 얼마 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명상 정광필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정광필은 주변 사람에게 “게으른 정승이 나왔다”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중종 때 공조, 형조, 병조 등의 판서를 두루 거친 상진에게도 명종 즉위와 함께 시작된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시대는 만만치 않았다. 상진은 그러나 현실권력과 타협했다. 덕분에 명종 즉위와 함께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됐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명종 6년 좌의정에 오른다. 그 때문에 상진이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아부했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려는 원려심모(遠慮深謀)임을 당대의 식자들은 다 알고 있었기에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 때의 황희와 허조를 잇는 명상(名相)”이라는 찬사가 많았다.

현실권력과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권간(權奸)’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청렴(淸廉)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수없이 많다. 그 중 하나. 하루는 창고가 허물어지려하자 종들이 수리를 하고자 했다. 상진은 그만두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고쳐 세운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려 하는고?” 창고는 무너져버렸다.

그랬기 때문인지 상진은 세상의 굴곡(屈曲)을 수용하는 자신의 처신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중종 때 잘나갔던 사림 계열의 송순이 윤원형 세력과 충돌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자네는 어찌 이리 침체되고 불우한가?” 이에 송순은 “내가 자네처럼 목을 움츠리고 바른말을 하지 않았으면 벌써 정승의 지위를 얻었을 것이네”라고 반박했다. 이에 상진은 “자네가 바른말 하지 않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불평스러운 말을 많이 하여 이리저리 귀양 다니는 것이 무슨 맛이 있는가”라며 웃었다.

상진은 죽음을 맞아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묘비는 세우지 말고 짤막한 갈(碣)을 세워 ‘공은 늦게 거문고를 배워 일찍이 감군은(感君恩) 한 곡조를 연주하였다’고만 쓰면 족하다.” 그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며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오던 위선과 가식의 식자들을 조롱하며 살다가 간 인물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