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朝鮮이야기(9)] 현실감과 행정 능력 뛰어난 명재상 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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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세운 왕건과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의 첫손 꼽히는 명장(名將)이다. 둘 다 무인이었다는 것 말고도 왕건과 이성계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독실한 불교신앙을 갖고 있었다. 왕건에게는 도선이라는 큰스님이 있었고 이성계에게는 무학이 있었다. 도선과 무학 모두 풍수에 밝았다. |
‘羲皇樂俗今如掃/只在春風杯酒間’ 그 뜻은 대략 ‘복희씨 시대의 음악과 풍속은 지금 쓸어낸 듯 없어져 버렸고/ 다만 봄바람 부는 술자리에만 남아 있구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를 본 상진은 “어찌 말을 그렇게 야박하게 하는가”라며 첫 구의 마지막 두 자와 둘째 구의 앞부분 두 자를 고쳐 이렇게 읊었다.
‘羲皇樂俗今猶在/看取春風杯酒間’ ‘복희씨 시대의 음악과 풍속이 지금도 남아 있어/ 봄바람 부는 술자리에서 찾아볼 수 있네!’ 세상을 보는 시각은 말할 것도 없고 스케일이 달랐던 것이다. 이수광이 상진의 ‘도량’을 보여주기 위해 이 일화를 고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상진은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이후 상진은 중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특진을 했다. 그 바람에 견제도 많이 받았다. 무엇보다 상진은 이재(吏才)가 뛰어났다. 오늘날로 말하면 행정 능력이 특출했다는 말이다. 더불어 시국을 한걸음 물러서서 보는 여유를 갖고 있었다. 훈구보다는 사림과 가까우면서도 기묘사화나 을사사화를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기묘사화가 터지기 전 그가 사마시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선비들이 유난히 티를 내며 몸가짐을 삼가는 척을 하자 상진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자유인 상진의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실록은 “상진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일부러 관(冠)을 쓰지 않고 다리도 뻗고 앉아서 동료들을 조롱하고 업신여기었다”고 적고 있다. 얼마 후 문과에 급제하여 당대의 명상 정광필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정광필은 주변 사람에게 “게으른 정승이 나왔다”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중종 때 공조, 형조, 병조 등의 판서를 두루 거친 상진에게도 명종 즉위와 함께 시작된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시대는 만만치 않았다. 상진은 그러나 현실권력과 타협했다. 덕분에 명종 즉위와 함께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됐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명종 6년 좌의정에 오른다. 그 때문에 상진이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아부했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려는 원려심모(遠慮深謀)임을 당대의 식자들은 다 알고 있었기에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종 때의 황희와 허조를 잇는 명상(名相)”이라는 찬사가 많았다.
현실권력과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권간(權奸)’이라는 비난이 쏟아지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청렴(淸廉)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수없이 많다. 그 중 하나. 하루는 창고가 허물어지려하자 종들이 수리를 하고자 했다. 상진은 그만두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고쳐 세운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려 하는고?” 창고는 무너져버렸다.
그랬기 때문인지 상진은 세상의 굴곡(屈曲)을 수용하는 자신의 처신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갑내기 친구이자 중종 때 잘나갔던 사림 계열의 송순이 윤원형 세력과 충돌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자네는 어찌 이리 침체되고 불우한가?” 이에 송순은 “내가 자네처럼 목을 움츠리고 바른말을 하지 않았으면 벌써 정승의 지위를 얻었을 것이네”라고 반박했다. 이에 상진은 “자네가 바른말 하지 않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불평스러운 말을 많이 하여 이리저리 귀양 다니는 것이 무슨 맛이 있는가”라며 웃었다.
상진은 죽음을 맞아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묘비는 세우지 말고 짤막한 갈(碣)을 세워 ‘공은 늦게 거문고를 배워 일찍이 감군은(感君恩) 한 곡조를 연주하였다’고만 쓰면 족하다.” 그는 세상을 바로잡겠다며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오던 위선과 가식의 식자들을 조롱하며 살다가 간 인물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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