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14] 부여군 마을 유래 // 세도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14. 세도면 마을유래


청송리(靑松里)
세도면의 서쪽에 위치한 대흥산 주변에서 산맥의 줄기가 끊기고 낙맥으로 판점을 이루는 그 중심지에 자리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주교천과 부왕골천, 방아골천, 생골천 등 비교적 수원이 많은 냇물을 둘러싸고 평탄한 들과 들보다 조금 높은 야산의 줄기에 그림 폭처럼 전원지대를 이룬 지역에 청송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환도하기 전에 이미 인류가 정착한 지역으로 추정되며 농경사회로 접어드는 그 처음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하는 일설도 있다.
고려 때는 임천군(林川郡)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풍양조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농경지대를 개간해 갔으며 그 당시 원거인들과의 공동작업으로 주교천 주변의 간척지 공사 등 많은 난점을 극복해가며 오늘의 전원지대를 이룩한데 대해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고 전한다. 그만큼 들 개간에 어려움이 많았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송리, 하송리, 청룡리, 하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룡과 하대의 이름을 따서 청송리라고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큰바위가 마을에 있으며 옛날에 김씨와 박씨가 많이 살았다 해서 금박골, 노씨가 살았다 해서 노개골(노가가 변해서), 물이 한번 차면 잘 빠지지 않는다 해서 무데미 또는 양지뜸, 마을 주변에 호랑이가 살아서 호동, 범골, 범굴, 옛날에 원당이 있었으므로 원당이라 부르다가 원뎅이, 마을 주변에 솔이 많이 있으므로 솔메, 또한 윗새말, 청룡골, 기왓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면적은 3.97㎢이고 가구수는 265이며 인구수는 765명이 거주하고 있다.

반조원리(頒詔院里)

동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화수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화수천이 동북쪽의 들을 적시면서 금강으로 유입하고 남쪽은 야산지대와 들이 깔려있으나 북쪽은 금강변의 넓은 들과 그 안쪽에 펼쳐진 들로 풍요로운 농경지대를 이룩한 지역에 반조원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이미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어 임천과 석성을 잇는 큰 나루가 또한 이곳에 있었다.
백제 사비성에 쳐들어가는 당나라 수군이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진을 치고 당나라 왕의 조서(詔書)를 소정방이 이곳에서 반포하였다 하여 지명을 이에 연유하여 지었다고도 하는 지역으로, 옛날부터 큰 길과 나루가 있어서 번창했던 지역만은 틀림없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성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진주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어서 고지 또는 고다지(古多只)라고 하였었다. 고려 때는 이곳에 고다지소가 있었으므로 고다지소라 불렀으며 또한 나루터가 있으므로 고다진(古多津)이라고 하였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다진원(古多津院) 또는 변하여 반조원(頒詔院)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석성군 현내면의 포사리 일부를 병합하여 반조원리라 해서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고다진원은 나루를 중심으로 있었고 반조원이라고도 부르며 검문, 검색 또는 길 안내를 한 관집이고, 액운이 끼었을 때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기원하던 반조원 성황당(頒詔院城徨堂)이 있었고, 옛날에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가음말 또는 가음촌(歌吟村), 나루터가 있어서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으므로 곶지, 고다지, 뒤에 고다지소, 고다진, 고다지원이 변하여 반조원, 고다지소의 옥(獄)이 있었을 때 옥 바깥쪽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옥삼박골, 옥삼외곡(玉三外谷)이라고 불리는 자연마을이 있고, 면적은 3.19㎢이고 가구수는 99이며 인구는 302명이 거주하고 있다.

사산리(沙山里)

세도면의 최북단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낮은 야산지대가 금강 쪽으로 깔려있는 지역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절골천 유역에 광범위한 들을 조성하는 곳에 사산리는 자리한다. 또한 동쪽에는 남산골천이 흐르면서 들을 적시고 있어 운치를 돋구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나당군이 사비성을 공격할 때에 금강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다 가림성 군사의 복병의 공격을 받아 대파되었다는 사랭[沙浪]이 마을이 있는 곳으로 당군이 사비성을 점령하고서도 오랫동안 주둔하였던 지역이라 전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백암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능성구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해 갔으며 모래사장 위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미루나무 숲을 만들어 금강의 범람을 막아서 전원지대를 이룩한 유서 깊은 곳이 또한 사산리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백암면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성백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사랑리, 산사리와 석성군 현내면의 포사리(浦沙里) 일부를 병합하여 사랑과 산사의 이름을 따서 사산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 목골은 옛날에 큰못이 있어서 목골, 목곡(牧谷), 목동(牧洞), 모래 위에 잔잔한 물결도 절경이지만 사람들이 욕심없이 평화롭게 세월을 보내는 마을이라 해서 사랑, 사랑리라 부르다가 사랭이로 변했고, 옛날 성림사(聖林寺)라는 절이 있던 마을이라 성림촌(聖林村), 호수 같은 금강가에서 가죽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저호(樗湖)라 부르며 사산리 산사마을에 절터가 있는데 이 절터를 사산리사지(沙山里寺址) 또는 백석사지(白石寺址)라고도 부르는 사지가 있고 사산리 1구 성림사지에 우적탑(牛積塔)이라고 부르는 탑이 묻혀있다 한다.
리의 면적은 5.21㎢이고 81가구에 인구는 192명이 거주한다.

화수리(花樹里)

세도면의 북쪽에 위치해서 동남쪽으로는 토성산이 그리고 중앙에 군환산이 서서 비교적 낮은 산악지대를 이루며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화수천 유역과 남쪽에 펼쳐지는 들이 넓은 지역에 화수리는 자리한다. 야산지대에 자연스럽게 피는 꽃이 아름다워 인심도 후하다는 화수리는 봄과 가을을 통해서 시인 묵객이 많이 찾아드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부터이며 가림성(加林城) 지역의 외곽성인 토성산성이 이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성백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임천조씨와 문화유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성백면의 지역으로서 화중개, 화징개 또는 화중(花中), 화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화수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마을에 부처가 있었다 해서 불무골, 봉무동, 불뭇골, 마을이 서쪽에 있으므로 서편이, 쇠판이, 서편리, 마을 뒷산의 형국이 꿩이 숨은 형국이라 윤치, 은치(隱稚), 장승이 있던 마을이라 장성배기, 마을 지형이 항상 꽃이 만개한 것 같다 하여 화징개, 화중개(花中開), 화중, 화수라고도 부르는 마을들이 있으며, 백제 때의 토성으로 화수산성(花樹山城)이 있고 고려시대의 폐사지(廢寺址)가 있으며 소형 동종(銅鐘)이 출토되기도 했다.
리의 면적은 2.93㎢이고 66가구에 인구는 185명이 거주한다.

수고리(水古里)

세도면의 북쪽에 위치해서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사동천과 해촌천, 은골천, 기층골천, 오야골천, 수량골천 등 많은 냇물이 야산지대와 들을 적시는 지역에 위치해서 옛부터 기름진 땅이 많은 지역에 수고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이미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을의 형성도 그때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하천 지역에 마을이 잔재해 있던 지역이다. 백제 멸망 후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고려시대 전까지는 임천군 고을에서 부자촌으로 손꼽히던 지역이였다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풍양조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이룩하며 부유한 농촌을 조성하였으며 또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고추리(古楸里), 기층리(幾層里), 수다해리(水多海里)를 병합하여 수다해와 고추의 이름을 따서 수고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옛날 장자가 살던 집터에 개오동나무가 서있는 마을이라 고추골 또는 고추동, 부자집이 많아서 집을 지을 때 몇 층의 층대를 쌓고 잘지은 집이 많았다 해서 기층골, 기층동, 마을과 마을 근처 논에 수렁이 많다 하여 수렁골, 수랑골, 수랑동, 전에 기와를 굽던 마을이라 하여 오약골, 오양골, 선비들의 마음과 몸을 쉬게 하는 마을이라 하여 은골, 어은동, 은동, 약초가 많고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밤이면 정자에서 잠을 자며 쑥으로 불을 놓아 정자에 쑥 냄새가 배어 약 냄새나는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약정재, 약정현(藥亭峴)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6.31㎢이고 159가구에 인구는 428명이 거주한다.

동사리(東寺里)

세도면의 서남쪽에 위치해서 큰 냇물인 사동천이 흐르고 작은 냇물로는 바위배기천, 홍역천, 박술골천, 소매천 등이 모두 서쪽의 낮은 야산지대에서 발원하여 사동천으로 들어가는 구육역과 사동천의 유역에 넓게 펼쳐진 들과 서쪽의 낮은 야산지대가 잔잔한 물살을 잇듯 깔려있는 지역에 동사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 때 마을이 형성된 지역으로 추정되는 동사리는 고려 때부터 대흥산을 주축으로 하는 그 아래 야산지대를 중심으로 들이 개간되며 큰 마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풍양조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집성마을을 형성하면서 큰 마을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신리, 사동리, 소니산리(所尼山里), 우산리(牛山里)와 읍내면의 북동리, 사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동신과 사동의 이름을 따서 동사리라고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고려 때의 회양부사(淮陽府使) 조신을 배향한 동곡서원(東谷書院)이 있고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이전한 오층석탑이 있던 동사리 폐사지(東寺里 廢寺址)가 있으며, 옛날에 강물이 들어와서 배가 드나들었으며 배를 매던 선착장 구실을 했던 배매마을, 성림사(聖林寺)가 있었다 해서 사동, 사동리, 절골, 마을산의 모형이 소가 누운 것 같은 형국이라 하여 소매, 우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3.62㎢이고 112가구에 인구는 302명이 거주한다.

간대리(艮大里)

세도면의 젖줄인 사동천이 북쪽에서 흘러와서는 남쪽으로 흐르는 그 서쪽의 넓은 들과 동쪽으로 흐르는 주교천 주변에 조성되는 들과 그 사이 낮은 야산지대에 간대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이미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이 지역에는 농경지 조성도 상당히 빨랐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진주강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평택임씨들이 정착 집성촌을 이루면서 들을 개간하며 농경지를 조성하면서 다른 성씨들도 정착 농촌의 완충지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간리, 상대리, 하대리 일부와 읍내면의 사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간리와 상대리의 이름을 따서 간대리라 하여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금강가 마을로 물가에 바위가 많이 있으므로 다근이라 부르다가 다그니로 불렀고, 마을과 근처에 모래가 많다 하여 모사골, 모싯골, 강경, 임천, 반조원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어 세거리, 세거름, 삼거리라 불렀고 뒷산에 여우형의 명당이 있다 해서 여매 등의 마을이 있고, 다그니 나루는 익산시 용안면으로 건너가는 나루로 옛날에는 전라도와 충청도가 교류하는 뜻 있는 나루로 다근도선장, 다근진이라고도 불렀다.
리의 면적은 3.19㎢이고 212가구에 인구는 607명이 거주한다.

청포리(菁浦里)

금강의 강변에 위치해서 범람의 역사를 많이 겪었던 지역이며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주교천과 청포천이 또한 동쪽부터 땅속에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를 흘러내듯 흐르는 공중에 떠 있는 즉, 물 가운데 떠 있는 형태를 유지해오는 지역이 청포리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금강의 범람으로 지형의 변화도 많이 따랐던 지역이나 옛날에는 작은 포구 구실을 하는 갯가가 많았으며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추정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마을의 형성은 백제 때로 추정을 하나 그 동안 금강물의 범람에 따라 정착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강변시설을 점차적으로 실행하면서 정착촌이 오래 명맥을 지속하게 됨에 따라 수원백씨, 추계추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면서 새로운 지역으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 포구가 되므로 무개 또는 변하여 무새 청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계양리(桂陽里)와 귀덕리(歸德里), 홍가동(洪佳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청포리라고 해서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이토정(土亭) 선생이 하룻밤을 묵었다 해서 지암골, 아산 현감인 토정이 천지조화가 있어도 이 마을만은 물에 잠기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비 오는 날 하룻밤 묶고 갔다 해서 그의 호에 따라 토정이라 부른다. 포구가 됨으로 무개, 무새, 청포라 하고 대와 모래가 많아 모곡(茅谷), 모사동(茅沙洞), 모새울, 마을이 들안쪽에 자리해 있으므로 들안뜸, 변하여 돌암뜸 등의 자연마을들이 있다. 마을 전체가 특용작물(방울토마토)을 재배하고 있어 생활에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5.18㎢이고 가구는 311에 인구는 965명이 거주하고 있다.

귀덕리(歸德里)

세도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들 위에 판점을 찍듯이 야산지대가 접경을 이루고 북쪽 망굴 저수지에서 남쪽으로 흘러서 금강으로 들어가는 군문리천 주변에 넓게 펼쳐진 들과 금강변 위쪽에 펼쳐진 들에 귀덕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의 정착이 따랐으며 가림성(加林城) 군사들의 군마 소리가 우렁찼던 지역이라 한다. 구전에 따르면 전라도 지방에 잔존했던 마한의 마을 사회국가 군졸과 가림성의 군사들이 일전을 벌였던 전쟁터라고도 전해진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인세면(仁世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평택임씨가 정착하면서 그 씨족이 집성촌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농경지를 개간하였다. 조선말기는 임천군 인세면 지역으로서 지형이 구덕 즉 대바구니처럼 생겼으므로 구덕 또는 구데비, 변하여 귀덕(歸德)이 되었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귀덕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장군이 군졸과 지나다가 진을 쳤던 자리라 하여 군문리(軍門里)라 부르고, 유씨들이 많이 살았던 마을이라 유가골 또는 유가동, 마을에 풀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초장골, 마을에 정문이 있어 정문거리 등의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2.60㎢이고 가구수는 142에 인구는 429명이다.

장산리(長山里)

북쪽에서 낮은 산맥의 줄기를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들과 야산의 완충지대를 이루며 동쪽의 금강변에 이르러서는 모래사장으로 변모하는 세도면의 동남부 위쪽에 장산리는 자리한다. 냇물로는 장산리 한복판으로 신앙천이 흐르면서 들을 적시고 북쪽을 점유한 함박산의 운치가 한 폭의 그림 같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하였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지역으로 농경지 조성이 상당히 빨랐던 지역이다. 장산리는 금강의 강변에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엔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평택임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들을 개간하였으며 이어 분파되어 풍양조씨가 사방으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금릉김씨가 정착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들을 개간하며 정착한 지역이 또한 장산리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장토리(長土里)와 중산리(中山里)를 병합하여 장산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에 마을이 있다 해서 산바래기 또는 산망(山望)이라 부르고, 마을에 신암이란 귀한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를 위했다 하는데 그 바위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신암, 신암골, 신앙골, 대나무가 많이 있었다 해서 죽말, 중말, 죽촌 등이 있으며, 마을의 면적은 2.64㎢이고 가구수는 126이며 인구는 337명이다.

가회리(佳檜里)

북쪽에서 흘러오는 금강의 물줄기가 서쪽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세도면의 동남단에 위치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모래가 쌓여서 들을 조성한 지역에 가회리는 자리한다. 서북쪽으로는 턱을 고인 듯한 야산의 줄기가 일선으로 보이나 파도를 막는 방파제처럼 보일 뿐 온통 들로 조성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대안(對岸)에 강경이 있어서 일찍부터 인류가 정착하고 마을이 형성된 듯하나 마을의 형성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늦게 형성된 듯하며 조선시대 말기부터 현대를 장식했던 이 지역 유일한 세도나루도 강경의 장터가 번성하면서 뒤따라 나루가 생긴 100여년의 역사밖에 없는 나루라 한다. 금강 물이 범람할 때마다 꼭 수해를 입던 지역에 1950년대에 제방이 쌓아지면서 생활을 누리는 농촌으로 변모해 최근에 조성된 농경단지로 보는 견해가 바른 견해가 아닌가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회화정리(檜花亭里), 언고개리(言古介里), 홍가동(洪佳洞) 일부를 병합하여 홍가동과 회화정의 이름을 따서 가회리라 하여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세도나루의 위치는 강경에 속한다. 세도에서 강경으로 사람과 차량까지도 운반하여 연결하는 나루로 세도지역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으나 1988년 황산대교가 가설됨에 따라 나루터는 사라졌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시장이 서서 장터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장터말, 변하여 장짓말, 마을에 회화나무 정자가 있어서 회정(檜亭)이라 부르다가 해쟁이, 회정리(檜亭里), 홍씨들의 집성촌이라 홍가골, 홍가동(洪佳洞)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리의 면적은 3.14㎢이며 가구수는 277에 인구는 88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