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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12] 부여군 마을 유래 // 임천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12. 임천면 마을유래

군사리(郡司里)
서쪽으로는 금성산(錦城山)을 동쪽으로는 성흥산(聖興山)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흐르는 임천천과 서쪽에서 유입하는 서주골천과 논실천가에 조성되는 들녘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은 들을 조성하는 중앙 위쪽으로 군사리가 자리한다.
백제 때의 아성인 성흥산성이 있으며 백제 이전부터 이 고을을 다스리는 관아가 있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웅진에 천도할 때는 이미 토호(土豪)가 백성을 다스리는 고을이었는데 그 기점이 성흥산성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읍내면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나주임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조성한 지역이 읍내리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청이 있었으므로 임천읍내, 이어읍내 또는 군사(郡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임천시장이 매우 번창하였다. 시장터에는 건어물, 의류점 등이 즐비하게 있었고 내 건너에는 가축시장(특히 우시장)이 아주 번창하였으며, 도축장도 있어 임천, 양화, 세도 상인들이 도축해 갔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시골시장이 쇠퇴되어 장터의 흔적이 사라져 가는 실정이다.
리의 면적은 3.70㎢에 가구수는 320호이고 인구는 898명이며, 누룩구석, 내건너, 돌팍모랭이, 밤동산, 시죽골, 염통고개, 장인말, 절골, 호리동, 읍내, 좌동 등의 마을이 있다. 또한 임천향교(林川鄕校)가 있고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사당(庾黔弼祠堂), 부소산의 송월대지에 이전하여 사비루라 헌액한 강산루지(江山樓址)가 있다. 그리고 임천객사터[林川客舍址], 동헌터[東軒址] 자리가 있으며 그 앞에 묵묵히 서있는 노송(老松)은 400년동안 임천의 풍상을 지켜보고 서 있다.

구교리(舊校里)
북쪽에 위치한 성흥산 주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의 줄기가 동쪽에 대흥산 같은 명산을 남기고 남쪽에 다시 산악지대를 조성하는 그 서쪽으로 들을 조성한 지역에 구교리는 자리한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문화유씨, 평산신씨 등이 정착하여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집성촌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이어 금녕김씨, 경주최씨, 단양우씨가 정착하여 임천 고을의 외곽지대에 큰 마을을 조성하였다.
구교리의 마을형성은 고을보다 한가한 지역을 찾아서 은둔하는 선비들의 낙향지로 선택한 데에도 큰 원인이 있다. 임천 향교가 있었으며, 오류정이란 정자로, 성리학의 고장으로 그리고 선비들의 풍류로 알려진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향교골 또는 구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가림리(嘉林里), 세동리(細洞里), 학봉리(鶴洞里)를 병합하여 구교리라 해서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향교골에는 임천향교가 옛날에 있었으며 성흥산 남쪽자락에 유서 깊은 대조사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로는 가뭄을 대비해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조그만 소류지가 있다. 삼가레 마을에는 임천중학교와 임천장로교회가 있으며,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임주초등학교가 있었다. 황새울[관동]에는 조은 영농 조합법인이 있는데, 주로 팽이버섯을 생산하고 있다.
리의 면적은 3.85㎢이고 가구수는 215호이고 인구는 529명이며 가는골, 가사리, 향교골, 삼가레, 오류정, 황새울 등의 마을이 있다.

두곡리(豆谷里)

두곡리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사동권을 사이에 두고 세도면과 경계를 나누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하나 부여 환도 후부터는 가림성(加林城) 남쪽 전초기지로서 많은 군사가 주둔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유민들이 정착한 곳이며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토속신앙의 증거로 선돌을 지적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두모곡면(豆毛谷面)의 지역이었고 고려 말기부터 풍양조씨가 정착하였으며 이어 안동권씨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인맥이 조성되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두모곡면의 지역으로 두 냇물이 합친다 하여 두모곡 또는 두모골, 두므곡, 두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읍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나산리(羅山里), 사동리(寺洞里), 북동리, 남성리(南星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두곡리라 하여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두곡리의 면적은 4.53㎢이고 가구수는 125이며 인구는 331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두 냇물이 합치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두곡, 두모곡, 두모골, 전에 못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못재 또는 지산(池山), 옛날 효자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시모골, 변하여 시엉골, 옛날에 절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절골, 사동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칠산리(七山里)

칠산리는 금강의 남단에 자리해서 칠산제방이 쌓아지기 전까지는 들이 모두 금강 물이 들어오고 침수해버리는 펄땅이었다. 그래서 심한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침수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농경지로서 피해가 많이 있었던 지역이다. 그 지역에 길이 1,300m의 칠산제방이 놓여지면서부터 곡창지대로 변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초기는 임천군 동변면(東邊面)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처음 제주고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인동장씨, 풍양조씨가 북쪽에 자리잡기 시작하여 집성마을을 조성하였으며, 그 후에 금강변에 작은 둔적을 이루는 지역에 풍양조씨가 개간하여 정착함으로써 칠산리 일원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들 가운데 낮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있으므로 칠산이라 하였으며, 고종 32년(1895)에는 읍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입석리, 와종리(瓦宗里), 남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칠산리라 해서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5.80㎢이고 가구수는 246호이며 인구는 678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별로는 선돌, 입석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선돌마을, 남쪽을 향하고 복을 누리는 마을이라 하여 남성굴, 남성리, 마을이 평평한 땅위에 편안하게 놓여있다 해서 민머루, 옛날에 기와를 구웠던 마을이라 하여 왜마루, 와종, 와종리, 들 가운데 낮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있다 하여 칠산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조선 숙종(1687)때 창건하여 사액이 내려진 칠산서원(七山書院)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의 척화신 시남(市南) 유계(兪棨)를 모시고 춘추제향을 드리고 있다.

비정리(飛亭里)

남쪽에 흐르는 금강변에 위치해서 임천면 남쪽에 자리한 비정리는 서북쪽의 일부지역을 제하고는 모두가 들에 둘러싸인 들녘이다. 옛날에는 임천천과 금강이 범람해서 때때로 수해도 많이 겪었으나 근대에 이르러 수리시설 및 제방시설로 완충지대를 이루어 놓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고,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지곡면 지역으로 현재 거주하는 성씨들의 정착 과정으로 보아 조선시대 중기에 온양방씨와 밀양손씨, 그리고 한산이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조성되어 나갔으며 이어 전주이씨의 정착으로 들이 개간되고 마을이 융성해 갔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지곡면의 지역인데, 고종 32년(1895)에는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비동리, 초동리, 내동리, 송정리를 병합하여 비동과 송정의 이름을 따서 비정리라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강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개뜸, 마을에 부엉이가 살았다 하여 부웡매, 봉황, 샛골, 초동이라 부르고, 마을의 큰들에 물이 귀해서 곡식이 잘 안된다고 하여 비랭이들이라 하고, 들새가 많이 날아드는 마을이라 하여 비동, 비랭이, 옛날부터 마을에 소나무 정자가 있으므로 송정(松亭), 품질 좋은 삼[麻]밭이 많은 지역이라 옥삼밭골, 팔방에서 바람이 들어오는 풍류의 마을이라 팔풍쟁이, 팔풍리(八豊里)라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2.66㎢이고 가구수는 154이고 인구는 426명이다.

탑산리(塔山里)

입포천과 남당천, 달산천과 새태천으로 조성된 넓은 들에 탑산리는 위치한다. 그러나 암쪽 금강변은 북쪽의 냇물과 교차하여 홍수 때마다 침수되었으나 하천개수 및 제방축조 공사를 하여 비옥한 옥토로 만들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해서 서천과 한산으로 통하는 큰길이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지곡면 지역으로 전주이씨와 장수황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그들의 집성촌을 조성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임천군 지곡면 지역으로 고종 때에는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남당리, 달산리(達山里), 초일리(樵日里), 탑리와 대적면의 왕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탑리와 달산의 이름을 따서 탑산리라 하여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용인산에 임천 기우단(林川祈雨壇)이 있고,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임천상무사(林川商務社)가 있다. 옛날에 큰 연못이 있고 남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남당, 마을이 벼랑에 있다고 하여 독벼루, 매사냥을 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았다고 하여 매봉재라 하고, 그 아래 마을이라 하여 매산골이라 부르고,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탑리, 초막이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초일이라 불리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면적은3.64㎢이고 140가구에 인구는 381명이다.

가신리(加神里)

가신리는 고려 원종 때 원명국사(圓明國師)가 보광사(普光寺)를 중수(重修)하고 머물렀다는 보광사지(普光寺址)와 사적을 기록한 보광사 중창비, 부도(浮圖)가 확인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서변면 지역이었다.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씨족의 정착은 고려 말기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던 담양전씨와 동래정씨로 추측되며, 뒤 이어 전주최씨도 뿌리를 내려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서변면 지역으로,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혁 때 가라리, 검신리(檢神里), 가장리를 병합하여 가라와 검신의 이름을 따서 가신리라 하여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가라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 때부터 그의 이름을 따라 가라라고 불리운 마을과 들가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가장골, 가장, 가장동, 검신, 보광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백제 때의 고분으로 석실고분 10여기가 있다.
리의 면적은 4.46㎢이며 가구수는 109에 인구는 2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옥곡리(玉谷里)

옥곡천을 중심으로 넓은 들이 조성되고 옥이 나왔으므로 옥실, 옥곡이라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지곡면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부터 설촌이 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고 충화면 천당리로 드나드는 길목이어서 많은 사람이 지나다닌 길이 백제 때부터 있었다 한다. 조선중기 경주최씨, 금녕김씨, 양천허씨가 정착하면서 집성마을을 이룩하였으며, 조선 숙종때 이이명이 사화에 화를 입게 되자 그의 친족들이 낙향하여 거주하면서 전주이씨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 임천군 지곡면 옥실 또는 옥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때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옥곡리라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부근에서 옥이 나왔다 하여 옥실, 옥곡, 시장이 섰었던 마을이라 하여 장뜸, 고개 아래 마을이라 하여 재뜸이라 불리는 자연마을이 있다.
리의 면적은 1.43㎢, 가구수는 53가구에 인구는 141명이 거주하고 있다.

발산리(鉢山里)

복금리 저수지에서 발원하여 임천천으로 들어가는 발산천(鉢山川)과 만우천 등 여러 천이 발산들을 기름지고 수원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서변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창녕성씨와 영월신씨의 정착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집성촌이 되어 두 가문이 미친 영향이 컸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는 임천군 서변면 지역으로, 지형이 중의 바라와 같다 하여 발전(鉢田), 발산이라 하였는데 고종 때에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발산리라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중의 바라처럼 생겼다 해서 발산, 발전, 바랏이라 부르는 마을과 옛날부터 괴티 정자가 있어서 괴티, 괴정, 발산 남쪽에서 가신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영고개라 하고 그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을 영고개라고 부르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2.18㎢이고 59가구에 인구는 155 명이다.

만사리(萬社里)

토지[社] 신과 곡식[稷]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임천 사직단(林川社稷壇)이 있고 조선 인조 때의 예빈시정·풍기군수를 지낸 조박(趙璞), 경종 때의 집의(執義)였던 조성복(趙聖復), 현종 때의 금구현령 조현소(趙見素)를 모신 퇴수서원(退修書院)이 만사리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林川郡)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서변면 지역이었다. 백제시대 것으로 보는 한다리, 큰 다리가 마을 입구에 근래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때부터 임천조씨가 정착하였고 조선초기에는 전주이씨에 이어 강릉유씨, 성주현씨가 정착하여 마을단위로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말기 임천군 서변면 지역으로 고종 때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원우리, 만우리, 사산리를 병합하여 만우와 사산의 이름을 따서 만사리라 하여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금강물이 들어와 갯가였던 마을이라 하여 개묵실, 마을 지형이 말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말머루, 만우, 만우리, 많은 새가 모여 들었다고 하여 비야쟁이, 사산이란 산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사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텃말, 원머루 등으로 불리우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4.59㎢이고 가구수는 163에 인구수는 449명이다.

점리(店里)

점리는 백제시대 축조된 성터나 군량미를 감추어 두었다는 둔적골의 명칭으로 보아 이때에 설촌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박곡면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덕수장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였으며, 이어 수원백씨, 풍양조씨가 정착하면서 점차로 발전하여 간 곳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박곡면 지역으로서 옹기점이 있었으므로 점골 또는 점촌(店村)이라 하였는데, 고종 때 성백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점리라 해서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검지 냇가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검지내, 현계(玄溪), 산아래 가파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되니, 고개지형이 말안장처럼 생겼다 해서 안장고개, 그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명으 따라 안장고개, 옹기점이 있었다 해서 점골, 점굴, 점동, 옛날에 군사가 주둔하였던 마을이라 하여 둔적골, 든적골이라 불리우는 마을들이 있으며, 면적은 6.31㎢이고 가구수는 148에 인구수는 431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