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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13] 부여군 마을 유래 // 장암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13. 장암면 마을유래


석동리(石東里)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금천이 금강에 유입하는 그 남쪽에 위치한 낮은 야산지대와 들에 석동리는 자리한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임천면과 경계를 나누는 추성산을 중심으로 테뫼식으로 쌓은 이목티산성(梨木峙山城)이 있어 백제 때는 사비성을 지키는 중요한 지역이였음이 입증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하는 북단이었다. 백제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백제 멸망후 마을은 쇠퇴하여 갔으며 작은 한촌으로 남았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북박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경주손씨가 정착하였으나 집성촌은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후 한산이씨, 경주이씨, 온양방씨 등이 정착하였고, 이어 전주이씨, 문화유씨, 풍천임씨 등이 정착하였다. 현재에 이르는 집성촌은 한산이씨, 풍천임씨, 문화유씨 등이고 그리고 희성으로서 청주근씨도 자리해 있는 지역이다. 고종 32년(1895)에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우리, 산동리의 각 일부와 남내면의 장암리 일부와 부여군 천을면 내리의 일세촌을 병합하여 석우와 산동의 이름을 따서 석동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장암면의 행정적 중심지가 되는 리며, 리의 면적은 3.86㎢이며 가구수는 302호에 인구는 884명이다.
자연마을로는 햇빛의 밝은 곳에 있으므로 양촌, 양지말,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골말, 마을에 돌모랭이가 있으므로 돌머리, 석우라 부르고, 강막을산 앞에 있는 마을인 산동리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백제 때의 토성인 이목티산성(梨木峙山城)이 있고 한재가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강막을산 산제당이 있다.

원문리(元門里)

북쪽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 들 아래 동북쪽으로 흘러가는 금천, 냇물 남쪽으로 마치 조용한 바다의 파도를 연상하는 야산지대의 들에 원문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한때 백제인들의 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끊임없이 사비성에 주둔한 나당군의 핍박에 그래도 이곳을 지키며 다시 내일의 백제를 세우자고 때로는 군사를 모으기도 하였다는 순박한 백제 백성들의 큰 마을이 있었다고 구전에 전해온다. 지금은 이 지역에서 그 뿌리를 찾기 힘든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새로운 개간을 위해서 여러 씨족이 정착하였으나 현재까지 뿌리를 내린 씨족은 극히 드물며 수원백씨만이 집성촌을 이루며 원문리의 뿌리로 승화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으로서 원문이라고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산동리, 석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원문리라 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90㎢이며 가구수는 134호에 인구는 375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 마을을 들어서는 산양쪽을 깎아서 사람을 드나들게 하는 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원문이, 소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솔모루, 산새들이 많았으며 부엉이가 사는 집도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말이라 불리는 수원백씨의 집성마을을 이루는 마을이다.

합곡리(閤谷里)

남쪽으로 낮은 산악지대가 줄을 긋고 서쪽으로 튀어나온 산줄기를 바탕으로 움푹 들어간 바다로 치면 선착장을 양쪽에 두고 바닷물이 들어선 것 같은 형국에 들이 깔리고 앞으로는 넓은 바다같은 들이 깔린 지역에 합곡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는 정착해 있었으며 백제가 공주에 왕도를 정하였을 때 이미 우두성(牛頭城)이란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마을의 형성도 그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 가림성(加林城)에서 백가의 반란이 있을 때 무령왕이 토벌에 나서 이곳에 진을 쳤으며 백가를 무찌른 유서 깊은 곳이 합곡리의 우두성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풍양조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안동권씨, 남양홍씨, 나주정씨등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삼대정승으로 추앙받은 상진(尙震) 영의정의 출생지도 이곳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합하리(閤下里) 상곡리, 역리 일부와 홍산군 남면 마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합하와 상곡의 이름을 따서 합곡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1997년 장암 농공단지가 조성되었으며, 리의 면적은 4.79㎢이며 가구수는 239호에 인구는 667명이다.
뜸별로는 개구리 소리를 오붓하게 들을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합(內閤)이라고 하나, 상진 정승이 태어난 곳이라 합자가 쓰인 듯하다. 골짜기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상곡, 조선시대 이인도찰방에(利仁道察訪) 딸린 영유역(靈楡驛)이 있었으므로 역말, 역리, 유촌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고, 백제 때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증명하는 합곡리 고분군(閤谷里 古墳群)도 있다.

점상리(店上里)

장암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산악지대를 이루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냇물 따라 펼쳐진 들에 점상리는 자리한다. 옛날에는 지금의 남면 및 구룡평야를 바라보는 산마루여서 선비 및 시인 묵객이 한번쯤 찾아서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로 소문났으며, 장안에서 대감들이 말하기를 구룡의 탁류와 청류를 보았는가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지금의 점상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쪽을 가리킬 만큼 소문난 명소였었다고 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 유민들이 일시 정착하였으나 후대에 이을 집성촌은 형성하지 않았으며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박곡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말기부터 처음 명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지역으로 풍양조씨에 이어 경주이씨, 청송심씨, 밀양박씨의 정착이 조선시대 중기까지 이루어지면서 들이 개간되고 산간벽지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그 씨족의 집성촌 형성으로 지역이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박곡면 지역으로서 점말 위쪽이 되므로 윗점말 또는 상점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에 북박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지경리, 구리곡리의 각 일부와 홍산군 남면의 마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점상리라 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7.17㎢이고 가구수는 133호이며 인구는 400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덕림(德林) 마을에는 고려말 이방원(李芳遠, 조선 태종)의 스승이었던 풍양조씨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 조신(趙愼)의 묘(墓)와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마을별로는 지형이 마치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국이라 하여 묘티(描峙), 고이티라 부르고 박씨들이 처음 정착한 마을이라 하여 박골, 고개의 지형이 중의 바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발티, 그 아래 마을도 발티, 옛날에 왜가리가 많이 날아왔던 마을이라 하여 왁새말 또는 학촌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지토리(紙土里)

장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사동천과 상하천 및 지토천 유역에 넓은 들이 조성되고 서남쪽으로는 성흥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산악지대가 남쪽을 싸고 있는 지역에 지토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지역으로 부여와 임천을 잇는 길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오갔던 길목 주변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신리면의 지역이었다. 옛 마을이 산재되어 있었으나 작은 마을이었던 이 지역에 조선시대 초기에 경주최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차츰 개간해 나갔다. 이어 풍양조씨가 새로운 땅을 찾아 정착하기 시작하여 정착촌을 이루어 나갔고, 함열남궁씨가 성흥산 북쪽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넓은 들을 개간하는 등 부유한 지역으로 조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신리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성북면에 편입되어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지장리와 토산리를 병합하여 지토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8.39㎢에 가구수는 219호이고 인구수는 547명이다. 지토리 산 80번지에 위치한 천광산은 금광으로 1930~1950년대까지 월 10~20㎏의 금을 채굴하여 호황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폐광된 상태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마치 등성이에 불을 켠 것처럼 자리해 있다 해서 등애(燈涯), 조선시대 양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해서 사창, 용들이 꼭 이마을 부근을 빙빙 돌고 승천하였다 하여 용왕골, 용왕곡, 산 모양이 삼태성처럼 생긴 삼태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태동, 옛날에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해서 지장골, 지장, 지장리라고 부르고, 학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잣나무가 많으며 재에 마을이 있다 해서 잣티, 백티(栢峙)라 불리는 자연 마을들이 있다.

하황리(下黃里)

장암면의 동남쪽에 위치해서 마치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어 붙이는 산에서 떨어진 흙더미가 금강변의 모래와 함께 돌을 조성하듯 산과 들이 조화를 이루는 지역에 하황천가에 펼쳐진 들까지 겹쳐서 누런 들을 이루는 지역에 하황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금강과 함께 살아온 백제 유민들이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산악지대 들로 이동하여 고려 초기부터는 넓은 모래 사장과 들만 남아 있었다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는 다시 마을이 형성하기 시작한 이 지역에 1450년경 풍양조씨 회양부사 조신의 3대손 익상(益祥)이 덕림에서 이주하여 정착하고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면모로 변해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으로서 누른다리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 황다리 또는 하황교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하황리와 하곡리(蝦谷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하황리라 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뜸별로는 마을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바위가 있다 해서 금배, 산과 들의 흙빛이 모두 누루다 하여 누른드리, 누른다리, 황교, 황교리라 부르고 부근에서 가장 빛을 발휘하는 마을이 될 것이라 해서 도창리라 부르다 변하여 대챙이, 도창(道窓)이라 부르는 마을, 동쪽 강가에 있으므로 동내기, 마을 지형이 삼태미 형국이라 하여 홀탱이, 홀신(忽新)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현재 비닐하우스 시설 재배를 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3.67㎢이고 가구수는 81호에 인구는 250명이다.

상황리(上黃里)

장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낮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산악지대에서 동쪽으로 흘러가서는 금강에 유입하는 하황천가에 펼쳐진 들과 남산골천, 법주천, 사왕천, 애개울천 등 작은 냇물의 유역에 펼쳐진 들에 자리한 지역이 상황리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인류는 이미 정착해 있었으며 마을의 형성도 따랐던 지역으로서 낮은 야산지대와 강변이 당시 사람들이 생활을 누리는데 좋은 입지적 조건이었다. 또한 그래서 이곳에 백제 왕릉이 있다는 설도 부인 못할 사실로 남아있기도 하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에 풍양조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 중기부터는 넓은 하천을 긴 들이 대규모로 개간되어 조씨들의 집성촌을 곳곳에 조성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으로서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 자리가 많은 곳으로 소문나 있으며 임천조씨의 시조묘가 이곳에 있으며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설도 흥미 있는 일로 남아있는 지역이다. 본래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으로서 누른다리 또는 상황교, 상황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하황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황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남산골 서쪽 오암산 아래 백제 왕릉(百濟王陵)으로 전해지는 묘 3기가 있으며, 옛날부터 왕릉이 있다는 마을로 왕림(王林)이라 불려지고 있다. 또한 위누른다리, 남산의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3.68㎢이고 가구수는 63호에 인구는 202명이다.

장하리(長蝦里)

북동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서남쪽에서 밀어 올리는 것 같은 산세가 금강변까지 잇닿은 야산지대 동남쪽으로 금강과 골암천을 비롯한 여러 작은 냇물을 끼고 조성된 들을 낀 지역에 장하리는 자리한다.
인류의 정착은 상당히 빨라서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이미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의 형성도 따랐던 지역으로 이 곳에 자리한 사랑산성(沙浪山城)도 백제가 공주에 왕도를 정하였을 때 쌓은 산성이라고 구전에 전해오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금강 건너에 있는 석성 파진산에서 나당군과 싸운 백제군의 부상병들이 금강을 건너 사랑산성에 은거하였다가 둔병이 되어 백제 부흥을 외치며 살던 지역으로, 장정(長亭)지역이란 구전의 말을 인용하더라도 백제의 부흥 운동과 연관이 되는 지역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 진주강씨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풍양조씨의 정착으로 넓은 들의 개간과 함께 풍요로운 고장이 형성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남내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장정리, 후포리, 탑리, 하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장정과 하곡의 이름을 따서 장하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백제 때 금강 내안에 있으면서 외성 역할을 한 사랑산성이 있고, 조선 영조 때 창건된 남산서원(南山書院)에는 조태징(趙泰徵), 조명규(趙明圭), 조주진(趙疇鎭) 3인이 배향되어 있고, 조선 선조 때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 낸 흥학당(興學堂)이 있으며 보물 제184호로 지정된 장하리 3층석탑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나무가 길게 장사진을 이루어 운치좋은 마을이라 하는 장정마을, 한산사지가 있으며 3층석탑이 있다고 하여 탑리, 옛날에 화약창고가 있으므로 화약골이라 불리우는 마을들이 있다.
리의 면적은 3.31㎢에 가구수는 117호이고 인구는 361명이다.

북고리(北皐里)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남쪽에는 우뚝 솟은 학산에서 차츰 야산지대로 북쪽에 흐르는 산과 금강으로 유입하는 북구천 유역과 금강변에 펼쳐진 들에 북고리는 자리하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북고리 강가는 일명 뒷구래라고 불린다. 즉 지금의 강령(江嶺), 도강(道江), 월촌(越村)을 뒷구래라고 부르는데 그 지역은 백제 때 구드래 나루에 드나들던 외국상선 및 선박이 드나들 때 입항했던 포구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이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시대로 추정을 하나 구전에 따르면 신라 말기 최씨가 처음 마을을 형성해 나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의 이 고장 정착민의 뿌리를 내리는 씨족의 정착은 고려 말기 남평문씨의 정착에 따른 집성촌 형성과 이어 정착하는 진주강씨, 풍양조씨에 이은 집성촌 형성으로 북고리는 차츰 농촌화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서 북구천가가 되므로 부꾸내 또는 북구천, 북구천리라 하였는데 고종32년(1895)에는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북고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동쪽에는 금강이 있고 뒤에는 고개가 있는 그 아래 마을이 있다고 하여 강령(江嶺), 뜸말, 뜨말이라고 부르며 백제 때는 뒷구래에 속하는 포구였다 한다. 사당이 있었으므로 요당(堯堂), 노씨가 살았기에 노동(魯洞)이라 부르고 길모퉁이를 돌아 마을이 있으므로 도라(道羅)마을, 건너말, 부끄내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4.16㎢이고 가구수는 89호이며 인구는 264명이다.

정암리(亭岩里)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오는 금강의 물줄기가 장암면 북쪽에서 금천과 합류하고는 동쪽으로 물줄기를 바꾸는 그 아래쪽에 위치해서 마당바위와 산과 들로 아름다운 운치를 자랑하는 지역에 정암리는 자리한다. 장암면의 호칭이 정암리에 떠 있는 마당바위[맞바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바위는 면명으로 지적이 될 만큼 또한 유서 깊은 바위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부여에서 백제로 환도하기 전부터이며 백제 말기에는 부여에서 바라다 보이는 하얀 목련밭으로 또한 알려진 지역이다. 하얀 목련밭의 정암리에 마을의 형성도 환도전의 백제 때부터로 지적을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말기 경주최씨가 정착하였으나 집성마을을 형성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서서히 이동하였으며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성씨는 풍양조씨의 분산에서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이어 청송심씨, 해주오씨, 의령남씨, 전주이씨, 청도김씨의 정착에 따른 집성촌 형성으로 정암리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정자리, 수작리(樹作里), 장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정자와 장암의 이름을 따서 정암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시루매 산성의 군사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100여개의 고분군이 매봉산 경사진 곳에 있으며 연산군을 간하다 아버지와 5형제가 함께 죽임을 당한 전주인(全州人) 이총(李摠)의 무풍군묘(茂豊君廟)가 있다. 마을 앞 금강가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맞바위라 하여 마을명도 맞바위, 매년 농사가 마을사람 식량에 충분하다 해서 수작(壽作)골, 안골 등의 마을이 있고 비닐하우스 시설 재배를 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4.82㎢이고 가구수는 91호이고 인구는 27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