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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15] 부여군 마을 유래 // 석성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15. 석성면 마을유래


석성리(石城里)
북쪽의 태조봉(太祖峯)에서 서쪽의 국사봉(國師峯)을 거쳐 금강변으로 산악지대가 동남쪽으로 낮은 야산지대를 이으면서 석성리는 조성되었다. 백제 때는 진악산현(珍惡山縣)의 고을이었으며 신라 때는 석산현(石山縣)에 속했었다.
백제가 웅진(熊津)에 환도한 그 전후가 선인들이 정착하지 않았나 한다. 고려 때는 석성현(石城縣)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산현(尼山縣)에 속했다가 뒤에 석성현에 속했다. 고려 때부터 새롭게 정착하는 제주고씨와 진주강씨, 밀양박씨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마을을 조성함으로써 오늘의 대를 이어왔다.
조선시대 말기는 석성군 석성읍내 또는 석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향교리, 남산리 일부, 비당면(碑堂面) 일부와 우곤면(牛昆面)의 일부를 병합하여 석성리라 하고 부여군 석성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에는 지형이 구수처럼 생겼다 해서 구수메, 백제 때부터 이 지역을 다스리던 관아가 있었던 마을로 돌로 쌓은 성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석성, 마을 뒷산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이라 해서 연화, 석성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향교골, 교동 등으로 불리는 뜸이 있다. 지금은 두꺼비바위, 파리바위, 안장바위 등으로 불리우는 지석묘의 고인돌이 있고 동헌지(東軒址), 객사지(客舍址), 사직단지(社稷壇址), 옥터, 사창터가 있으며 면적은 3.39㎢이고 가구수는 220호이며 인구는 631명이 살고 있다.

봉정리(鳳亭里)

석성면의 최남단에 위치해서 서쪽에는 금강을 경계로 장암면, 세도면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부여읍, 남쪽으로는 논산시 성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낮은 산악지대와 동남쪽으로 넓은 들을 점유한 지역에 봉정리는 자리한다.
봉정리는 백제 때는 진악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는 남쪽들과 연관된 야산지대에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백제 말기에는 백제군의 주둔지였었다. 백제의 멸망 후 많은 사람들이 전원지대에 자리를 잡음에 따라 큰 길목으로 등장한 봉정리 남부지방에는 큰 나루터가 생기며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기점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석성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한때 이산현(尼山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남양전씨, 진주강씨, 고령신씨, 밀양손씨, 수원백씨 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석성현에 속하였고 1895년 석성군 현내면으로 개편된 후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석성면 봉정리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으로 두냇물이 몰려있는 모래사장 근처의 포구라 해서 사포, 사포리, 개사리라 불리고, 백제 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마을이라 봉두정(鳳頭亭), 조선시대 사창이 있었던 마을이라 창리(倉里)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고, 리의 면적은 4.89㎢이고 가구수는 206이며 인구는 583명이 거주하고 있다.

비당리(碑堂里)

봉황산과 등골산이 야산줄기를 중심으로 마을이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때는 진악산현, 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 이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이 실패한 후 잠시 둔병하였다가 그대로 정착하여 개발이 된 지역이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석성현, 조선초기에 이산현에 속하기도 하였다. 그후 석성현에 속하였으며 함열남궁씨가 정착하고 이어 김해김씨, 진주강씨의 집성촌 형성에 따른 마을로 조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 석성군 비당면 이었으므로 비당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중리, 상리, 옥산리 일부와 증산면(甑山面) 연화리 일부를 병합하고 비당리라 하여 부여군 석성면에 편입되었다.
중리 소룡골의 정각사(正覺寺)의 말사였던 소룡사터에 위치하고 있는 선돌은 성기형태로서 마을 주민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있으며, 비당은 사람들이 정성들이는 서낭당이 있고 비가 있는 마을이라 비당이라 부른다고 하며, 마을에 금반형(金盤形) 명당이 있고 작은 마을이라 소반촌, 소반챙이라 불리며, 선사시대의 선사토광묘(先史土壙墓)가 있으며 마제석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마을의 면적은 4.69㎢이고 가구수는 196이며 인구는 5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증산리(甑山里)

태조산(太祖山) 아래 동쪽으로 흐르는 증산천(甑山川)을 끼고 낮은 야산지대와 들에 위치한다. 태조봉(太祖峯)에 오르면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들과 야산지대가 꼭 군사가 주둔한 군영지 같다 해서 지형에 명당자리가 많다고 소문난 지역이다.
백제 때는 진악산현, 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으며 백제 말기 사비성을 지키는 백제군과 신라군과의 격전지로 전하는 군장동(軍藏洞) 지역에서는 당시 무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고려 때는 석성현,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산현에 속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석성현에 속했다. 고려시대 평양조씨가 정착하였으며 파평윤씨와 전주이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말기는 석성군 증산면의 지역으로 뒷산이 시루처럼 생겼으므로 시루미, 미르메 또는 증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종북리(宗北里), 건평리(乾坪里), 연화리와 비당면의 상리 일부와 북면의 하화리(下禾里), 상정리(上正里) 일부와 초촌면(草村面)의 응동리(鷹洞里) 일부를 병합하여 증산리라 해서 부여군 석성면에 편입되었다. 백제군이 마지막까지 신라군에 저항한 군장동(軍藏洞)이 있으며, 네 갈래의 길이 있다 해서 네거리, 십자가(十字街), 땅이 메마른 마릿들에 마을이 있으므로 마리티 마을, 옛날에 한 중이 살면서 여러 사람에게 영락을 누리도록 불도를 닦으며 살았던 마을이라 해서 중락골, 또는 중락동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으며 면적은 7.32㎢이고 가구수는 559에 인구는 1,853명이 거주한다.

정각리(正覺里)

석성면 최북단에 위치하였고 산악지대가 많아 백제 때는 진악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었다.
부여에 백제가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의 정착이 따랐으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라고 전한다. 사비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사찰이 들어설 때에 극락사(極樂寺)라는 절이 창건되고 많은 신도의 출입과 함께 절 부근에 마을이 형성된 것이 이 지역의 처음이라고 한다.
그후 백제 멸망과 함께 극락사는 소멸되고 현재 절터만 남아 있는데, 일본에는 이와 같은 형태의 절이 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석성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산현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뒤에는 석성현에 속했었다. 신라 때부터 오랫동안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던 각 씨족은 조선시대를 전후하여 이 지역에서 떠났으며 그후 들어선 남양홍씨, 밀양박씨가 정착하고 이어 제주고씨가 정착하여 모두 집성촌을 이루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인 1895년에는 석성군 북면에 속했으며 정각사(正覺寺)가 있으므로 정각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화리, 중정리, 상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정각리라 하고 석성면에 편입되어 4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감나무가 많이 있다 해서 감나무골, 옛날에 산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점이 있었다 하여 갖점, 옛날에 숯을 구웠던 마을이라 하여 숯골, 숯골 위쪽에 있다해서 위숯골, 정각사 절이 있다 하여 절골 또는 사곡(寺谷)이라고 부르는 절골이 있으며, 면적은 4.33㎢이며 가구수는 83호에 인구는 195명이 거주한다.

현내리(縣內里)

석성면의 중앙에 위치해서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냇물이 합류하며 서북쪽에 자리한 국사봉(國師峯)과 용머리산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산악지대와 야산, 그리고 지방도 799호선이 관통하며 현내천이 흐르고 있다.
백제 때는 진악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한 고을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형성해 나갔던 지역이다. 백제 말기 나당군의 침입 때는 파진산의 병력이 이곳까지 나와서는 격전을 하였다는 지역이며 구전에 따르면 백제 멸망 후 군졸들이 정착하여 오래도록 백제 재건을 꿈꾸며 살다가 그 숱한 한과 함께 영생하는 곳이라고도 전한다.
고려 때는 석성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산현에 속했다가 석성현에 속했었다. 고려시대 말기와 조선시대 초기를 전후하여 원주변씨, 함평이씨가 뿌리를 내리면서 집성촌으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이 지역의 뿌리로 정착되는 곳이다.
조선시대 말기인 1895년에 석성군 현내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정각리, 탑동리, 봉북리(奉北里)와 북면의 하정리와 비당면의 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성면 현내리에 편입되었다.
석성산성은 백제 때의 외곽성이며 백제 멸망 후에도 부흥군의 거점이였고 변씨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변뜸,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말, 마을 주변에 섶이 많이 있다 해서 섬바텡이, 청룡이 왼쪽을 싸고 있는 것 같다하여 청룡, 마을에 석탑이 있어서 탑골 등의 마을이 있고 면적은 5.95㎢이고 가구수는 235이고 인구는 699명이 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