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16. 초촌면 마을유래
연화리(蓮花里)
연화리는 초촌면의 서남쪽에 위치해서 중앙에 흐르는 냇물과 북쪽에 접경을 이루는 야산지대와 남쪽의 야산과 들이 그 절경을 이룬다 해서 옛날에 연못이 있을 때부터 가경지로 알려진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는 정착하였으며 취락의 형성도 이루어졌던 지역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들이 개간되어 농경지가 조성되어갔다는 구전과 함께 연화지는 백제 때부터 궁중의 놀이터였었다 한다. 백제 말기 사비성시대에는 호화가 깃들었던 지역으로 꼽힌다. 이곳 농부가중에 “연화지에서 연꽃 꽂고 오화지지에 꽂노리가고” 라는 가사가 있음으로 보아 백제 왕궁에서 꽃놀이의 경승지를 조성한 듯도 하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새로운 씨족이 정착하여 들을 개간해 나갔으나 집성촌 구성 등으로 오늘날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문은 드물며 기계유씨가 드물게 집성촌을 이루며 이 지역의 뿌리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연화지라는 큰 연못이 있었으므로 연못골 또는 연화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련리(上蓮里), 하련리(下蓮里), 내련리(內蓮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연화리라 하여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0.72㎢에 가구수는 74호이며 인구는 247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연화지라는 못이 있었으므로 연화동, 연못골이라 부르며 연못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아래말 또는 하련, 마을의 형국이 방안처럼 생겼다 해서 안골, 안동이 변해서 안굴이,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양지편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으며, 메밀산 중턱에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연화리 석곽묘(蓮花里 石槨墓)가 있으며 세형동검 4점이 출토되었다.
추양리(楸陽里)
초촌면의 서쪽에 위치해 석성면과 경계를 이룬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이후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의 사비성 시대에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백제멸망 후에는 잔여 세력들이 끈질기게 저항한 지역으로 전해진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 지역이었다.
고려 말기부터 평산신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달성서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으로 형성해 나갔다. 그후 임진왜란시 전주이씨 이적(李績)이 금구현감(金溝縣監)으로 행차하던 중에 그의 자손을 서진사(徐進士) 집으로 피난케 하여 정착시키므로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이름은 마을 앞에 오래된 떡나무[楸木]가 있어 고추동, 고추골로 불려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고추동, 응양리, 건평리, 내연리 일부를 병합하여 고추와 응양의 이름을 따서 추양리라 하였으며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20㎢이고 가구수는 175이며 인구는 541명이 거주한다.
자연마을로는 추양리 동쪽에 있는 큰 뜰을 황못들이라 부르고 황못들 안쪽에 있는 마을을 고추동 또는 안말이라 부른다. 즉 황못들 안쪽이 되므로 안말, 북쪽으로 등너머에 있는 마을을 넘말, 양지바른 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양상(陽上)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초평리(草坪里)
초촌면의 최남단에 위치해서 중앙에 흐르는 응평천과 남쪽을 적시며 흐르는 석성천, 그 동북쪽과 서쪽의 넓은 들과 낮은 야산지대에 초평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일찍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였을 때는 이미 큰 마을이 조성되었던 지역이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 사비성시대에는 사비성의 관들이 이곳에 있었으며 백제 멸망 직전에는 황산벌의 마지막 전쟁터라는 전언과 함께 백제 멸망 후에는 산에서 전열을 가다듬던 백제군들이 신라군들과의 접전이 잦았던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충주지씨들이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말기는 한때 서해안에 거점을 둔 왜구들의 침범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가옥이 모두 불타버리고 인명의 피해를 입히려는 왜구들에게 농부들이 단합하여 그들을 쫓아낸 유일한 지역으로도 알려진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초리, 하평리와 노성군 소사면의 봉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초리와 하평의 이름을 따서 초평이라 하고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08㎢에 가구수는 121호이며 인구는 344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서생을 가르치고 학문을 토론하는 강당이 있었으며 주위에 대나무숲이 우거졌으며, 강당이 있으면 대인이 나올 것이라고 여겨 강당이 있는 이 마을을 강당재 또는 대인마루, 죽현(竹縣)이라 부르고 마을 뒷산 모습이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말미, 마산, 하평리, 벌판에 풀이 무성함으로 새울이라 부르고 산의 형국이 마치 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봉곡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인조 때의 공신인 지계최(池繼崔)의 정려문이 있다.
송국리(松菊里)
송국리는 초촌면의 한복판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응평천이 흐르고 동서쪽으로 낮은 야산지대가 놓이는가 하면 그 사이로 남북쪽으로 트인 듯 들이 자리한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공주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취락의 형성이 따랐으며 백제 말기 부여의 전성시대에는 큰 고을로 등장하여 이 지역을 관할하는 관아가 있었던 지역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던 인류의 이동이 이 부근을 적지로 선택하였고 석성천 주변과 북쪽의 야산지대를 근거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장소로 선택하였다는 것이 매장문화재가 많이 발굴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서서히 그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편 수렵시대에 이미 취락이 구성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잘못된 견해는 아닌 것 같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하국리, 하평리, 신송리의 각 일부와 노성군 소사면의 덕상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송과 하국의 이름을 따서 송국리라 하여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72㎢에 가구수는 89호이며 인구는 26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 백제 이전부터 이 지역을 다스리는 관아가 있었던 지역이라 하여 국령(國令)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궁영이, 국령이라 부르고, 학이 날아와서 장관을 이루었던 마을로 산과 학이 신성지를 이루는 마을이라 하여 산 학골이라 부른다. 소나무가 우거져서 좋은 경치를 이룬다 해서 송현이라 불리는 마을도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를 밝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송국리 석관묘(松菊里 石棺墓)가 있으며,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고, 청동기시대의 취락지로 가장 중요한 송국리 선사취락지(松菊里 先史聚落址)가 위치하고 있다.
응평리(鷹坪里)
초촌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응평천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는 낮은 산악지대 아래 야산이 판점을 찍은 듯 놓여 있는 그 아래로 넓은 들이 펼쳐진 지역에 응평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때 이미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인류가 정착한 초원지대로 백제 때는 사비성을 지키는 외곽성의 전초기지가 있었던 지역이라 한다.
백제 멸망 후에는 한때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으나 그후 모두 안착하여 농경화됨으로써 오랫동안 백제혼을 유지하였던 곳으로도 소문나 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파평윤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새롭게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광산김씨, 달성서씨가 정착하면서 조선시대 이후 집성촌을 이루면서 뿌리를 다져간 지역이며 오늘의 빛이 서린 지역이라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평리, 중평리, 탑동, 응동 일부를 병합하여 응동과 중평의 이름을 따서 응평리라 하고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2.93㎢에 가구수는 183호이며 인구는 541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앞의 땅이 자주 말라서 풀도 자주 마르는 그 들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건들, 건평이라고 부르고, 산 모양이 매처럼 생겼다는 매봉재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매골, 응동, 응동리라 부르고, 전에 오동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 오평(梧坪)이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세탑리(細塔里)
세탑리는 초촌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면내에서는 비교적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이며 초촌면의 중앙에 흐르는 응평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망월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낮은 산악지대와 야산, 그리고 들이 가경을 이룬다 해서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는 시인묵객들의 요람지였다고도 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는 정착하여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수렵시대부터 농경사회로 접어드는 시기에 적절하게 인류가 안착한 지역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부터 정착한 인류가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뿌리를 내린 씨족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정착한 청주한씨와 금녕김씨라고 할 수 있다. 두 씨족이 집성촌을 이루면서 다시 마을을 형성하고 들을 개간하여 농경지를 더욱 확대해 나갔다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탑동리와 신송리, 세동과 몽도면의 보각리 일부를 병합하여 세동과 탑동의 이름을 따서 세탑리라 하고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4.72㎢에 가구수는 59호이고 인구는 161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가느른 골짜기에 자리해 있으므로 가는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농골 또는 세동, 마을에 오층석탑이 있는 마을이라 탑골 또는 탑동이라 부르며 탑골 부근에 새로된 마을이라 하여 신탑골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으며, 백제 때 것으로 보이는 50여기의 세탑리 고분군(細塔里 古墳群)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세탑리 오층석탑(細塔里 五層石塔)이 있다.
신암리(莘岩里)
신암리는 초촌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부여와 경계를 나누고 남쪽으로는 석성면과 접하는 비교적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산악지대는 이곳에 자리한 감투봉을 중심으로 동쪽에 많은 면적을 차지하며 신암리 신뜸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증산천이 들을 조성하여 그 중앙지대에는 들이 펼쳐지고 남쪽에는 다시 낮은 산악지대가 자리해서 쉽게 산간벽지임을 한눈에 느끼게 하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지역이다. 청마산성의 줄기가 이곳까지 뻗어있으며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을 비우는 사람들이 이곳을 선택하여 정착하고는 오랫동안 그 명맥을 이어왔다는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오나 그 당시부터 뿌리를 내린 씨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바위가 많이 있으므로 신암이라고 불렀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반남박씨, 신천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신암, 신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중리와 몽도면의 보각리 일부와 그리고 석성군 증산면의 건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암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5.86㎢이고 가구수는 107호에 인구는 270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바위가 많은 지역에 마을이 있으므로 신암, 신뜸이라 하고, 마을이 평정에 있으므로 평정말, 신뜸과 평정말 중간에 있으므로 중뜸, 중말, 가운데뜸, 또는 중리라 부르며 새로된 마을을 새터, 보가 있는데 그 가에 마을이 있다 하여 보각골 또는 마을에 보검장갑형(寶檢藏匣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라 보각골이라 부르고 마을지형이 구멍처럼 되어 있다 해서 구멍골이라고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백제 때로 추정되는 100여기의 고분이 있어 신암리 고분군(莘岩里 古墳群)이라 부른다.
송정리(松丁里)
초촌면의 동쪽에 위치해서 논산시 노성면, 광석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하관천이 조성하는 들녘의 동쪽과 반도형으로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조성하는 낮은 산악지대와 야산지대, 그리고 전반적으로 바둑판 같은 농경지를 조성하는 지역에 송정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열야산현(熱也山縣)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현에 속했었다. 다른 초촌면 지역에 비해서 늦게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인류의 정착은 고려시대 초기로 보며 마을의 형성도 고려시대 말기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노성에서 석성, 임천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므로 사람의 왕래는 잦았던 지역이며 옛날부터 생활권은 논산시 노성에 속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성현 소사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칠원윤씨, 함평이씨, 함안조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전주이씨 등의 정착으로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넓게 토지가 개간되고 넓은 들이 농경지로 변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노성군 소사면의 지역으로서 뒷산 마루에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 소정이, 장마루, 정마로 또는 송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운교리, 장월리와 대정리, 왕촌, 진호리의 각 일부와 장구면의 오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97㎢에 가구수는 79호이며 인구는 233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좋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가절이라 부르고, 초생달이 떠오르는 것 같은 마을의 형국 또는 잔다리가 있었으므로 잔다리라 부르다가 장달, 장월, 장월리, 뒷산마루에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 송정으로 부르다가 변하여 소정이, 정마루, 정마로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진호리(眞湖里)
초촌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북쪽에서부터 흘러오는 하관천이 흐르고 옛날에는 긴 호수가 있는 지역으로 동쪽의 등성이를 제하고는 비교적 들로 일관된 지역에 진호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열야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현에 속했었다.
초촌면에서 인류의 정착이 상당히 늦은 지역으로 고려 때에 이르러 인류가 정착하고 마을의 형성은 그때부터 서서히 이루어져 나갔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성현에 속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서 김해김씨와 신천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나갔다. 현재도 거주하는 지역으로 집성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노성군 소사면의 지역으로서 긴 호수가 있었으므로 진물 또는 진호(眞湖)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비안동, 신룡리와 회화리, 왕촌의 각 일부와 공주군 곡화천면(曲火川面)의 신흥리 일부를 병합하여 진호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38㎢이고 가구수는 136호이며 인구350명이다.
자연마을로는 긴 호수가 있으므로 긴물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진호, 진물이라 부르며, 들이 메마른 마을이라 해서 건평이라고 부르고 겨울에는 기러기가 많이 날아온다 해서 비안동이라고 불린다. 왕재말랭이 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왕촌이라고 부르고, 마을이 구석진 곳에 있으므로 귀뜸, 구억뜸이라 불린다. 또한 전에 전나무가 많았다 해서 장찬(長贊)이라고 불리는 마을들도 있다.
소사리(素沙里)
소사리는 하관천과 석성천이 풍부한 수원을 공급하는 지역에 위치해서 서북쪽으로 낮은 야산지대가 자리하고 남동쪽으로 넓은 들을 조성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열야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현에 속했었다. 수렵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농경시대로 접어들면서 인류가 정착하고 취락이 형성된 곳으로 본다. 또한 이 지역은 남쪽지방의 석성천의 범람으로 지형이 자주 변동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공주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성현에 속했었다. 고려 말기 마을을 형성하였던 거창신씨가 오늘까지 대를 이어온 유일한 성씨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노성군의 지역으로서 새, 즉 풀이 무성하였으므로 소새 또는 소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의 장찬리, 하관리, 상관리, 수랑동과 진호리, 수화리, 송정리의 각 일부와 장구면의 오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사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41㎢에 가구수는 106호이며 인구는 313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과 마을 부근에 풀이 무성하였으므로 소사, 소래라 부르고 마을이 위쪽에 자리했다 해서 상관, 아래쪽에 마을이 생김으로 해서 하관, 마을 앞들에 수렁이 많으므로 수랑골, 수당골, 말구렁이라 부르고, 마을 뒤에 뚝, 즉 언(堰)이 있으므로 원뜸, 옛날에 노송이 우거져서 학이 많이 날아왔다 하여 비학동, 비학골, 피아골이라 불리며, 백제시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토광묘(土壙墓) 10여기가 있다.
산직리(山直里)
산직리는 초촌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북쪽 감투봉을 주축으로 동남쪽으로 흐르는 낮은 산악지대가 야산지대로 변모하면서 석성천 가까이에서 들로 내려앉는 그 주변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열야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현에 속했었다. 백제가 공주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는 정착하기 시작하여 부여에 천도하였을 때는 큰 마을의 조성도 이루어졌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성현에 속했었다. 고려시대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밀양박씨, 평산신씨, 함안윤씨 등이 정착하여 들을 개간하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발전해 나간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노성군 소사면의 지역으로서 산지기가 살았으므로 산직말 또는 산직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신대리와 덕상리, 봉곡리의 각 일부와 석성군 증산면의 연화리 일부와 부여군 초촌면의 초리, 하국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산직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02㎢에 가구수는 106호이며 인구는 323명이다.
자연마을은 백제때 재상이 살았던 마을로서 이곳에 낙향하여 덕을 쌓고 살았다는 마을이라 하여 덕상골, 덕상동, 등성이 너머 있으므로 등너머, 옛날에 산지기가 살던 마을이라 산직말, 산직촌, 세 갈래의 길이 있는 마을이라 삼가리(三街里), 중뜸 위쪽을 상뜸, 상촌, 마을이 안쪽에 있다 해서 안뜸, 마을이 새로 생겨 새뜸, 신대라 불리는 마을이 있으며, 충청남도 지정기념물인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支石墓)가 있다.
참고문헌
최문휘. 1992. 『여기가 부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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