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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11] 부여군 마을 유래 // 양화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11. 양화면 마을유래


입포리(笠浦里)
입포리는 갓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강경 아랫쪽으로는 유일한 금강의 포구였으며 강경, 장항을 제외하고는 강경 어업조합 갓개지소가 있을 정도로 큰 해상시장과 항구로서 1940년 전에는 수로를 통해서 드나드는 상인들로 인해서 선상시장(船上市)은 전국에서 널리 알려진 배 장터뿐만 아니라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갓개 시장은 육로가 발달되면서 점점 갓개 포구도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강경 어업조합 입포지소도 1966년에 폐쇄되어 장항 수협으로 흡수되면서 지금은 5일 시장(3, 8일)의 소규모로 형성되어 시장의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대동면 지역이었다. 입포는 처음 갓개나루인 작은 나루터로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과 더불어 강경 등과 통하는 중요 나루터였고,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김해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나갔고 시장이 들어서면서 빠른 속도로 큰 마을이 되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으로서 금강가가 되므로 갓개 또는 관포(冠浦), 입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大積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상입포리, 하입포리와 지서면(紙西面)의 초일리(樵逸里) 일부를 병합하여 입포리라 부르게 되었다.
입포리는 양화면의 소재지 마을로서 면사무소, 초등학교,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 공공기관이 있고 금강변도로(폭 4m)가 있으며, 백제 의자왕과 관련된 유왕산(留王山)이 있다. 또 99년 10월에 완공된 웅포대교는 익산시와 연결된다.
입포리의 인구는 1963년 271가구에 1,491명이였으나 현재는 176가구에 454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강가에 있으며 지형이 삿갓과 같다 하여 입포, 관포 갯개라 부르고 위쪽을 위갓개, 상입포, 아래쪽 마을을 아래갓개, 하입포라고도 부른다. 동쪽 갯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동녘개, 마을과 떨어져 있는 지역에 자리한 마을이라 북간도, 서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섯녘재, 마을 안쪽에 있으므로 안동네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경주이씨열부비(慶州李氏烈婦碑)가 있고 백제 때의 절터로 알려진 용연사지(龍淵寺址)가 있다.

초왕리(草旺里)

초왕리는 서북쪽으로 무제산(武帝山)이 있다. 이 산에는 보광사란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서쪽에 시루산이 있는데 이 산모양이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체적으로 산이 맥이 흐르듯 깔려 있으며 냇물로는 초왕천에 들어서는 탁굴천과 손머리천, 왕동천 등이 흐르고 동남쪽으로 작은 들을 조성한 지역이다.
또한 왕골마을에 향토유적(제42호) 왕의영당(旺義影堂)이 있는데 이 영당은 조선시대 세조 2년(1456)에 박팽년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아들과 함께 처형된 백촌 김문기(白村金文起) 선생을 배향(配享)한 곳으로 숭고한 절의 정신을 받들기 위한 영당이다. 또한 일제시대 금계청년회를 조직하여 야학당을 개설하여 애국정신을 함양하였고, 1931년에는 애국단체 ‘조선인 친우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하다 1934년 검거되어 옥사한 허환 선생이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 유민들이 나당군을 피해서 둔군(屯軍)이 되어 그후 정착했다는 구전과 고려 때에 무란을 피해서 선비들이 초막(산막)을 짓고 피난하다가 정착하였다는 설도 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었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적량면(積良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동래정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이어 진주강씨, 김해김씨가 정착하였으며 다시 밀양박씨, 한산이씨, 금녕김씨, 전주최씨가 정착하였으며 많은 인물이 배출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1895)년에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초동리, 왕동리 일부와 지서면의 탑리 일부를 병합하여 초동과 왕동의 이름을 따서 초왕리라 하였다.
초왕리는 3.38㎢ 면적 중 2.24㎢가 임야이며 72가구에 180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옛날에 풀이 많았던 지역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새울, 초동, 초동리라 하고, 마을 뒤의 산세가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큰 마을로 부를 누릴 것이라 해서 왕골, 변하여 왕굴, 왕동, 왕동리라 불린다. 김해김씨 효열문(金海金氏 孝烈門)과 금녕김씨 효열문(金寧金氏 孝烈門)이 있다.

오량리(五良里)

오량리는 양화면의 국도 29호선변 북쪽들에 둘러 쌓인 곳에 위치한 지역으로 경지정리 완료된 평야 농경지대이다.
이곳에는 오송대화 대수골로 불리우는 산 41-7번지에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향토유적 제3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주요 지형지물로는 수령이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으며 백제 때 죽리와 오송대 일원은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온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원주이씨가 정착하여 초지를 개간하여 갔으며 이어 고령박씨와 해주오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의 여러 차례의 사화로 수난도 겪었던 씨족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그만큼 두메였으나 선비가 많았으며 학문에 대한 열의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으로서 적량면사무소가 이 지역에 있었다.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오송리, 적량리, 왕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송과 적량의 이름을 따서 오량리라 부르게 되었다.
오량리는 1.94㎢의 면적에 오량 1,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95가구에 247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나무 밭이 많은 지역이라 하여 대수골 죽리, 옛날에는 마을에 다섯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쉬어갔던 마을이라 하여 오송대(五松臺), 오송리, 마을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머리, 용두라는 마을이 있다.

족교리(足橋里)

원당천과 요산천이 흐르는 지역에 위치하며 옛날부터 부여 임천에서 서천 한산으로 통하는 길목에 널찍하게 들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한때는 한산모시의 원료인 모시 밭이 즐비하던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중기 전주최씨가 촌락을 형성하였고, 밀양박씨가 촌락을 이루어 집성촌을 이루었다 하며 옛날부터 족다리가 있었으므로 족다리 또는 족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족교리라 부르게 되었다.
족교리는 1.88㎢의 면적에 74가구에 169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밭이 많은 모롱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밭전모랭이, 글을 잘하는 선비가 대를 이으는 마을이며 선비들이 정착하여 소요할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요산, 인력보다 자연이 힘을 지배하는 것같은 지형에 마을이 있으므로 역구산이라고 불린다. 박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던 마을이라 박가말, 마박, 마발(馬發), 마을에 쪽다리가 있으므로 족다리, 족교라 불리는 마을 등이 있다.

송정리(松亭里)

서쪽으로는 석천산(石泉山)의 산줄기와 동쪽으로는 무제산의 산줄기가 두 맥을 잡고 남쪽으로 흐르는 그 북쪽에 충화면의 가화리 저수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들이 조성되고 두 산줄기 아래 흐르는 원산천과 오발천 방죽골천 주변에 조성되는 들과 함께 농경지대를 이룩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다. 백제 이전에 취락이 형성되었다는 송정리 북부지역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때때로 발견되며, 백제 멸망 후에는 큰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기를 거치면서 분산되었다가 고려 중기이후 다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는 임천고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밀양박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형성되었으며, 이어 경주최씨의 정착으로 들이 개간되면서 큰 마을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말기는 임천군 홍화면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은 지역에 정자가 많으므로 소정이 또는 송정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는 홍화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오전리(五田里), 월은리(月隱里)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송정리는 2.25㎢의 면적이며 51가구에 134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산등성이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하여 등사래, 네 갈래 길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사거리, 오산(五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오밭, 오전(五田)이라 불리는 마을 등이 있다.

벽룡리(碧龍里)

양화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의 능선아래 들이 깔리고 낮은 야산지대와 함께 서쪽의 광활한 들녘 농경지로 보유하고 국도 29호선이 북에서 남쪽으로 군도 3호선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통과하는 지역에 벽룡리는 위치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이미 군사가 주둔하였다는 사수막(沙水幕)이란 터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형성은 그 뒤가 아닌가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었다. 서남쪽에 위치한 서천과 한산쪽에서 부여로 통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이 있었다. 또한 들을 앞에 둔 야산 기슭에 초막 산막과 함께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로 추산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풍양조씨들이 대거 정착하여 처음 집성촌이 등장하였으며 이어 단양우씨, 남양홍씨, 강릉함씨들이 마을을 형성해 나간 중요한 씨족들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에는 지방관제 개정 때에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벽절과 덕룡골과 월은리, 윤동리(允洞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벽절과 덕룡의 이름을 따서 벽룡리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5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마을이다.
벽룡리는 3.36㎢의 면적에 117가구이며 338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에 흐르는 냇물에 돌이 많아서 내가 늘 말라있다 해서 건촌(乾村), 건드래, 마을에 둥근산이 있으므로 둥굿재, 벽절이란 절이 있었으므로 벽절, 벽사(碧寺), 모래가 많고 마을 뒤에 토성이 있어서 백제 때 성을 지키는 막이 있었다 해서 사수막(沙水幕), 설중반월형(雪中半月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설중, 설젱이,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맹골이라 부른다.

수원리(水原里)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가는 의자왕과 백성들을 보내면서 백제에 남은 백성들이 산에 올라가 통곡하였다는 망배산(望拜山)을 동쪽에 두고 마을 앞 서쪽은 넓은 들로 원산천을 경계로 한산면 나교리와 마주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군도 3호선이 마을 앞을 통과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백제 유민들이 많이 정착하여 때로는 백제 부흥군에 가담하여 피를 많이 흘린 유민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오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겪으면서 정착한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쇠퇴하는 지역같이 보였으나 고려 말기에 달성서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룩하고 새로운 활기를 찾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홍북면의 지역이었다. 전주이씨, 풍양조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였으며 농경지로서 입지적 조건이 좋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으로서 물이 풍부하게 좋은 마을이라 수원골 또는 수원곡(水原谷)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윤동리(允洞里) 일부를 병합하여 수원리라 부르게 되었다.
수원리는 2.76㎢ 면적에 113가구이며 291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은 물이 풍부하게 수원이 좋은 마을이라 하여 수원골, 수원곡, 망배산 아래로 옛날에는 신선객이 많이 머물렀던 마을이라 하여 가자울, 가자곡이라 부른다. 산마루에 자리한 마을로 들과 마을이 평평하다 하여 마루골, 말골, 윤동이라고도 부르며,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말머리 등으로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상촌리(上村里)

북쪽에 우뚝 솟은 망배산 서남쪽으로 흐르는 낮은 산악지대가 금강에 접어들면서 넓은 들을 조성하고 서쪽으로는 내동천과 상천천이 흐르는 들녘도 지금으로부터 오십년 전만 하여도 금강물이 드나드는 강이었고 낮은 산악지대 끝머리에는 포구가 있어서 많은 배들이 기항했었다. 그래서 이름하여 상지포(上之浦)라고 부르며 소금배와 새우젓배가 무수히 드나들던 지역이 상촌리(上村里)의 포구였으며, 군도 3호선이 마을 앞을 지나고 들 건너 한산면 동지매, 토산리와 마주하며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의 영역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 고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상지포면에 속했으며 백제 때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오나 확실치 않으며 처음 상지포가에 밀양박씨가 정착한 것은 고려 말기로 추정되며 이어 금녕김씨, 한산이씨, 진주유씨의 정착과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한다.
상지포가에 있으므로 상촌이라 하였는데, 고종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교항리(橋項里), 홍화면이 수원리의 각 일부와 한산군 동상면의 녹양리(綠楊里) 일부를 병합하여 상촌리라 불렀다 한다.
상촌리는 3.01㎢ 면적이며 77가구에 191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상지포라는 갯가 가에 있으므로 상온리, 상촌, 한겨울이면 기러기가 많이 날아오던 지역에 마을이 있다 하여 안곡, 안골이라 불리는 마을 등이 있다.

시음리(時音里)

시음리는 북쪽에서 흐르는 금강과 서쪽에서 흐르는 원산천(院山川)이 맞닿는 곳인 양화면 동남쪽 끝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금강 제방공사로 들이 조성되고 음푹 들어간 갯가도 발견할 수 없으나 이 지역은 100년 전만해도 철석거리는 강변이었다. 금강의 풍부한 수량을 넓은 들에 농업용수의 안정적 공급으로 농업에 적합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이미 곱절 마을에 고을이 있었다는 구전에 따라 마을 형성이 있었을 것이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유민들이 이 지역에 모여 살던 곳이라 한다.
고려 때에는 임천군에 속해서 금강 수로변에 자리한 한가한 농촌지대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상지포면 지역이었고, 이때 금녕김씨가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이어 여산송씨들의 정착으로 해륙을 통한 산업지역으로 발전해 갔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상지포면의 지역으로서 뒷산이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미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시음 또는 금강가가 되므로 시름개라 하였다. 고종 32년 (1895)에는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읍리(古邑里), 포촌리(浦村里), 교항리(橋項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시음리라 하고 부여군 양화면에 편입되었다.
시음리는 5.73㎢ 면적에 148가구와 369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별로는 백제 때 고들이 있었던 마을이라 곱절, 또는 고읍(古邑)이라 부르고, 마을에 좋은 샘이 있으므로 샘골, 천동(泉洞), 곱절 북쪽으로 등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등너머, 드메기, 두목리(豆木里), 마을 뒷산이 꼭 시루처럼 생겼다고 시음, 시루미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또한 백제 때의 전설이 담겨있는 고읍(古邑) 마을의 군장산(軍場山)과 선돌이 이 마을을 지키는 듯하다.

내성리(內城里)

백제 마지막 의자왕이 백성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갈 때 그 아낙과 아들, 그리고 백성들이 산 위에 올라서 통곡하였다는 망배산은 그래서 천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의 발자국을 싫어한다고 전하며, 인간을 싫어하는 망배산은 그래서 아낙들이 일년에 한 번 만나는 놀이터로 승화된 것이라고 전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고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인류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하며, 고려 중기부터는 여산송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수원백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원주이씨의 정착으로 금강변과 그 주변에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이었고, 고종 32년(1895)에는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내항리(內項里), 검성리(檢城里), 원당리(元堂里) 일부를 병합하여 내항과 검성의 이름을 따서 내성리라 하였다.
내성리는 2.69㎢ 면적에 52가구이며 203명이 거주한다. 마을 주민 대부분 논 농업과 느타리 및 양송이 버섯재배를 실시하고 있다. 내성리와 익산시 웅포면과 연결되는 길이 1,226m의 웅포 대교가 99년 완공되었고 이곳 금강에 모터보트 수상레저시설을 설치 운영중이다.
자연 마을로는 금강 연안에 산성처럼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금성(錦城), 금성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내동,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마치 황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해서 황골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원당리(元堂里)

북쭉의 시루산에서 남쪽의 망배산과 그 아래 산악산(山岳山)으로 산의 줄기 동쪽에 위치해서 냇물로는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금강에 유입하는 원당천이 흐르며 서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에 원당리가 위치하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구수내골 주변에 인류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마을이 형성되기는 고려 초기로 지적을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이었고 조선시대에 밀양박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이어 상주이씨와 김해김씨가 정착하여 집성마을을 형성하면서 조선시대 중기에는 농경지 개간이 실시되었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대동면 지역으로서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원당(願堂)이 있어서 원당(元堂)이라 불렀는데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홍상면의 월은리 일부를 병합하여 원당리라 하였다. 원당리는 1.95㎢ 면적에 원당 1, 2, 3리로 나뉘어져 있으며 85가구에 인구는 211명이다.
자연마을은 옛날에 내가 마을로 흘렀고 우물이 아홉 개가 있다 하여 구수이골 또는 구수천(九水川), 마을이 밧가운데 있다 해서 밭가운데라고 부르다가 밧간디, 전중촌(田中村)이라 부르고,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터, 양지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양지편, 마을에 원당이 있었으므로 원당, 원댕이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암수리(岩樹里)

양화면 동쪽으로 낮은 야산지대와 금강가에 암수리는 자리한다. 농경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들이 넓고 산이 가파르지 않아서 백제 때는 말탄 군사들의 수련장이었고 기마를 사육하던 지역이라고 전한다. 부여의 군수리와 함께 많은 군사가 촌막을 짓고 주둔하였다고 전한다. 또 왕과 관련되었다는 유왕산(留王山)이 있어 지금도 매년 음력 8월 17일 추모제(追慕祭)가 실시되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부여에 백제가 천도하기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마을은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까지 벌판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으로서 연안이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였고 이어 밀양박씨, 경주이씨의 정착으로 여러 곳에 다시 마을이 형성되고 그들의 씨족이 뿌리를 내리는 집성촌이 형성되어 갔다.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산리, 견암리(犬岩里), 목수리(木樹里)를 병합하여 견암과 목수의 이름을 따서 암수리라 부르게 되었다.
암수리는 2.71㎢ 면적에 77가구이며 189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은 마을에 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며 마을 지형이 개의 아구처럼 생겼다 해서 가야구, 견암(犬岩), 가이아구라 부르고, 동쪽에 검은 바위가 있어 검배, 목수가 살던 마을이라 목수곡, 목수굴, 비단같은 금강의 맑은 물이 유난히 빛나는 마을이라 빗날, 인호(鱗湖)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