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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10] 부여군 마을 유래 // 충화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10. 충화면 마을유래


지석리(支石里)
서쪽으로는 노고산이 북쪽으로는 마가산이 우뚝서서 수렵문화로부터 농경문화로 접어드는 고대의 현상을 눈 익혀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지석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오목내가 이곳에 뿌리내리는 인류의 귀착지 이기도 하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벌써 마을의 형성이 따랐을 것이며 백제 때에는 대산현의 영향을 받았으나 차츰 임천권(林川圈)에 속해서 고려시대로부터는 완전히 임천문화권에 들어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팔충면(八忠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팔충면의 지역으로서 고인돌이 있으므로 고인돌, 괸돌, 지석(支石)이라 불렀는데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팔충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지석리(上支石里)와 하지석리(下支石里)를 병합하여 지석리라 해서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57㎢에 농경지가 1.19㎢ 중 70% 경지정리되어 영농에 편리하게 되어 있으나 용수원이 부족하여 매년 한해가 극심한 지역이고, 가구수는 99호, 인구는 234명이다. 팔충면 당시 면소재지가 이곳에 있었으며, 여산송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오래동안 정착한 김해김씨, 밀양박씨의 가문의 뿌리가 깊은 곳으로 범황(梵皇)골, 갈마(渴馬)골, 외뜸말, 남촌, 하지 등의 뜸이 있는 지역이다.
자연마을으로 옛날에 늙은 선녀가 말을 타고 와서 말에 물을 먹이던 장소가 있는 마을이라하여 갈망골, 갈마동이라 부르고 갈마음수형(葛馬飮水形) 명당자리가 있다 한다. 마을 앞 길옆에 고인돌이 있는 마을이라 고인돌, 괸돌, 지석이라고 부르고, 옛날에 범황사라는 절이 있던 마을이라 범황골이라 부르고 고인돌 마을 위쪽에 자리해 있다 해서 상지석, 상지, 상지석리라고도 부른다. 외따로 떨어져서 가운데 마을이 있으므로 외촌(外村), 중지, 중지리, 지석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지 하지석, 하지석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지석리 도로변에 고인돌 3기가 있으며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로 추정하고 있다.

천당리(天堂里)

천당리는 청남리(靑南里)와 경계를 이루는 천등산(天燈山) 아래 펼쳐지는 야산지대와 들녘에 마을이 생기면서 풍부한 자연적 자원으로 발전하여 현재는 충화면의 행정적 중심지가 되었다. 인류의 정착은 청동기시대, 즉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이미 마을의 형성이 이루어졌던 지역으로 백제 멸망 후에는 많은 백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들녘이 화려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겪으면서 정착민들에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여 오늘의 천당리 문화권 형성은 고려말기에 정착한 창녕조씨의 꾸준한 혈통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또한 조선시대 초기에 입촌한 해주오씨들의 꾸준한 변화도 특이할 만하다. 그리고 백제 때부터 정착하여 천당리 문화를 계승한 신창표씨의 충성은 전설에도 여러 갈래 구전되어 오듯이 천당리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겠다.
백제 때부터 가림군(加林郡) 등 임천문화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팔충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그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천리, 중천리, 하천리, 당동리(堂洞里)와 하지석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천과 당동의 이름을 따서 천당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05㎢에 농경지는 1.11㎢로 80%가 경지정리되어 영농에 편리하게 되어 있으나 수리시설이 안되어 농사에 어려움이 있으며, 가구수는 132호에 인구는 349명이다.
자연마을을 뜸별로 살펴보면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 조선시대에 사창이 있었다 하여 돌창리(乭倉里), 옛날에 신당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당골, 당동, 당곡, 천등골 중앙에 있다 하여 중뜸, 중촌, 월촌(越村), 중천(中天), 천등산 아래 추원(秋元)골 위 마을로 천등골, 추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추원(秋元)골, 천등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계백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여 표석(表石)을 남기고 출전하였다 하여 표뜸, 표촌, 상천 등의 뜸이 있다.

팔충리(八忠里)

팔충리는 마가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을 적시며 흐르는 오목내가 점점 강폭이 넓어지는 유역에 있다. 신석기시대에 이어 청동기시대 후반에는 많은 인류가 정착하였고, 백제 때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는 특이한 지역이다. 구전에 따르면 백제 말의 충신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 팔 충신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도 이 지역의 많은 인물들이 백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고려 때에도 그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팔충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계 개정에 따라 팔가면(八可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마리, 하마리, 수철리(水鐵里), 그리고 상금리(上金里) 일부를 병합하여 팔충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고려시대부터 밀양박씨들의 정착과 번성으로 문화권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현재는 영월신씨가 정착한 후 그 대를 잇는 지역이나 조선시대에 큰 길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닌 곳도 이 지역이다.
면적은 3.25㎢에 농경지는 1.0㎢ 중 70%가 경지정리되었으며, 가구수는 64호이고 인구는 179명이 살고 있는 곳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 덕림사라는 절이 있는 곳으로 덕림(德林), 옛날에 한양에 오르내리는 큰길로 말굽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여 마치(馬峙), 두현(斗峴), 들판에 수렁이 많다 하여 수랑들, 옛날에 절이 있어 중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중생골 무쇠가 많이 나오고 마을 부근에 냇물의 물줄기가 많아서 수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무쇠점 또는 수철리의 뜸이 있다.

복금리(福金里)

복금리는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지역으로 가림군의 은자(隱者)들의 낙향지로도 알려진 지역이다. 백제에 따른 임천문화권 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으로 지목을 받기도 한다. 특히 구곡천(九谷川), 어은골, 주막골에 전승적 구비문화의 유산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백제 때부터 임천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강릉유씨들이 정착하여 새롭게 지역을 개발한 곳으로 조선시대 말기에도 임천군에 속했었다.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팔가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금리, 하금리, 복심리(福深里)와 북박면의 소년동(少年洞) 일부를 병합하여 복심과 상금의 이름을 따서 복금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53㎢이며 가구수는 91호, 인구는 24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대나무가 많이 우거진 마을이라 하여 대숲골, 죽림동이라 부르고, 마을 지형이 마치 거미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주복(蛛伏)골, 주막이 이곳에 있다 하여 주막골로 부르며, 이 뜸을 합하여 금학(金鶴)이라고도 불린다. 마을에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매까실이라 부르고, 그후 매옥, 매곡이라 불린 곳이며 마을의 토지가 박해서 마을사람의 생활이 어려운 마을이라 밥전말, 박전(薄田)말이라 부르고, 마을이 매우 아늑하며 좋은 냇물이 흐르고 또한 숲이 잘 우거져서 신선객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어은(魚隱)골, 어은동(魚隱洞)이라 하며, 이 뜸들을 병합하여 상금마을이라 부른다. 유만갑 효자비(劉萬甲孝子碑), 유병하 효자비(劉秉夏孝子碑), 나주정씨 열녀각(羅州鄭氏烈女閣)이 있어 청소년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만지리(晩智里)

만지리는 충화면의 동북단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수려한 금성산(錦城山)을 경계로 임천면 군사리와 접한 만지리는 서남쪽으로는 산과 복심 저수지(福深貯水池)와 면한 아늑한 지대이다. 백제 때부터 임천 고을의 영향아래 있었으며 행정구역이 뚜렷해지는 조선시대 초기에도 임천군에 속해서 박곡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의 말기에도 박곡면의 지역으로서 옛날부터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정착하는 곳이라 하여 만지울 또는 만지동(晩智洞)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소년동 일부를 병합하여 만지리라 해서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6.07㎢에 농경지 1.35㎢ 중 65%가 경지정리가 되어 선진영농을 하고 있으며, 가구수는 118호, 인구는 329명이다.
자연마을은 신라 때에 향덕사(香德寺)가 이 뜸에 있어 향덕골, 향덕동(香德洞)이라 부르며 산수가 좋은 곳으로 산수동, 산수골이라 부르던 곳이며 마을이 벌판에 있어 법말이라 부르며 소년들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이 뜸을 소년동이라고도 불리는 지역이다.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정착하여 사는 마을이라 만지울이라 부르고, 오목한 내가 흐르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오목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 뜸을 병합하여 만지동으로 부르고 옛날에 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을에 강당을 지어 놓고 아들의 내일을 위해 정성껏 사랑했다 하여 사랑을 베푸는 고을로 사랑골 또는 애동(愛洞)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또한 소나무가 우거진 고개라 하여 솔티 고개가 있는 마을로 솔티라 불리던 마을이 있고, 백제가 한참 번창할 때 여러 개의 절이 있었으나 이곳에 신라시대에 처음에 새로 절이 생김에 따라 새절매, 신사동이라 부르는 마을이고, 이 뜸을 병합하여 하만지(下晩智)라 부른다.
조선시대 창건한 향림사지(香林寺址)가 있으며 1977년 향림사사적비(香林寺事蹟碑)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현미리(玄眉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문객들이 그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낙향지로는 임천땅 옥실을 그리고 풍류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미를 지적했던 현미가 바로 충화면 현미리다. 고려말기 조선조의 등장과 함께 임천의 선비로서 개경의 왕조에 참여했던 선비들은 일찍이 짐을 싸들고 낙향하여 옥실과 현미에 자리를 정했다. 그 후손들이 지금도 자리를 정하고 있는데, 김해김씨, 나주정씨, 그리고 밀양박씨들이 그 후예들이다.
백제 때에는 가림군 즉 임천의 영향권이었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도 그 영향권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으로서 마을앞에 아름다운 산이 있으므로 선미 또는 현미라 불렀다.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팔가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현미리라 해서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72㎢에 농경지는 0.8㎢ 중에 90%가 경지정리되어 농사짓기에 편리한 곳으로 가구수는 45호 인구수는 118명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도로변과 논둑에 11기의 지석표가 있어 이를 현미지석묘군(玄眉支石墓群)이라 부른다.

가화리(可化里)

가화리는 백제 때부터 임천군에 속했던 곳이며,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도 임천군 가화면에 속했었다. 가화리는 당시부터 면사무소의 소재지였으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의한 행정구역 변경이 있을 때까지 가화면의 중심지였다. 1895년에 이웃인 팔충면과 병합하여 처음에는 팔가면이라 하여 그에 속했으나 1914년 당시 행정구역 개혁 때에 팔충과 가화의 이름을 따서 충화면이 될 때에 이웃인 용동리, 마차리(馬里), 금남리(金南里) 일부를 병합하여 가화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으로 가화리라 하고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99㎢이고, 농경지 0.66㎢ 중 90%가 경지정리되어 농사짓기에 편리한 지역이며, 가구수는 51호에 인구수는 135명이다.
자연마을 뜸은 마을 지형이 용의 머리 부근에 마을이 위치했다 하여 용골, 용동이라 부른다. 마을이 옥비녀를 꽂은 머리와 같이 맑은 지대에 놓여있다 하여 마차실이라 부른다.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며 마을 지형이 병목처럼 생겼다 하여 병목안, 금남리라 부르고, 금남에 금자와 마차에 마를 붙여 금마라고도 부른다. 백제의 토성으로 무제산(武帝山) 줄기인 누루개재 산정에 누루개재 산성이 있다.

청남리(靑南里)

청남리는 천등산 아래 남쪽에 위치하여 백제 때부터 백제 혼을 되살리는 신앙이 뿌리깊이 내려진 지역이다. 천등산에 있는 우물 즉, 계백장군이 자랄 때 식수로 사용하였다는 그 우물을 병에 담아서는 솔잎으로 막은 다음 마을로 가져와서는 마을 우물에 거꾸로 걸어놓고 1년간 풍작과 마을의 태평을 비는 축제를 거행하는 곳도 청남리이다. 이와 같은 풍습은 백제 멸망 후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라고 전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역사적으로 임천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인조 때에 평산신씨들이 정착하면서 더욱 번영을 이룬 지역으로 통한다. 지리적으로도 산세가 상제봉조(上帝奉朝), 즉 신하가 왕에게 아침 예를 올리는 형국이라 하는데 단결심이 강하며 국난 때에는 두드러지게 공을 세운 지역으로 소문이 나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팔가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청등리와 시남리를 병합하여 청등과 시남의 이름을 따서 청남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49㎢에 농경지는 0.69㎢ 중 85%의 경지정리를 하여 농사짓기에 편리한 지역이다. 가구수는 46호이고 인구수는 128명이다.
자연마을로 농사를 지어 불을 밝히는 마을이라 하여 청등, 청등리라 부르고, 순박하고 뛰어난 신하들이 상제를 모시고 영화를 누리는 마을이라 하여 제산골, 제신동이 있고, 마을이 두리봉 아래 있는데 신하가 상제를 우러러 보는 형국이라 하여 신앙리(信仰里), 시남, 시남리라 부른다. 천등산에 천등사지(天燈寺址)가 있고 김령제 효자비(金領濟孝子碑)가 있다.

오덕리(五德里)

오덕리는 구전에 따르면 한산(韓山)의 건지산성(乾至山城)에서 봉기한 백제 부흥군(百濟復興軍)이 자란(自亂)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하였을 때 군사들이 석천산(石泉山)을 넘어 한 산골에서 분산하여 덕을 쌓는 농부 또는 초부로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있거니와 그 덕을 쌓는 곳에 오덕사(五德寺)라는 절이 생겼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면 오덕리 지역은 확실히 백제인들이 개척한 지역임에 틀림없다. 백제 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말기까지 임천고을에 속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팔가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수리, 장자리, 갈태리(葛台里), 하수리 일부와 한산군 하북면 구시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있는 오덕사의 이름을 따서 오덕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43㎢에 농경지는 0.85㎢ 중 경지정리는 85%를 실시하였으며, 가구수는 57호, 인구는 144명이다.
자연마을 뜸은 옛날에 숲이 많이 우거져 마치 갈대밭 같았다 하여 갈태라 부르고, 마을이 냇물 안쪽에 자리해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마치 물방망이처럼 생긴 마을이라 하여 물안골, 수침리(水砧里)라 불렀으며, 선조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아래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장자(壯者)가 살았다하여 장재울, 장자리(壯者里)라 불렀다. 물길이 좋은 지형에 마을이 있으므로 수담골이라 부른다. 신라 경덕왕 때 원효선사(元曉禪師)가 창건하였다는 오덕사가 있고 조선 선조와 관련이 있는 어필각(御筆閣)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