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7. 홍산면 마을유래
북촌리(北村里)
홍산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고려말기에 침입해 온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최영 장군의 말굽소리가 요란하였을, 조선 선조때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의 말굽소리가 성급하게 뛰어다녔던 그 역사적인 태봉산 아래에 북촌리는 위치하고 있다.
백제 때는 대산현의 고을이었으며 통일신라, 고려 때에는 백제 멸망의 상처에서 다시 일으키는 씨족이 번영을 꿈꾸었던 지역으로서 한 고을의 숙명적 은둔 지대였었다. 고려 초기에 홍산순씨가 처음 새로운 성씨로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창원황씨가 정착하며 풀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 북촌리의 마을이 들어선 처음이라 한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홍산 행정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朝鮮時代末期)는 홍산군 군내면(鴻山郡 郡內面)의 지역으로서 홍산 군청(鴻山郡廳) 북쪽이 되므로 북촌(北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좌촌(坐村), 여단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북촌리(北村里)라 칭하였다.
북촌리에는 현재 면사무소를 비롯한 홍산파출소, 홍산초등학교, 홍산중학교, 홍산농·공업고등학교, 보건지소 등의 기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문화재 유적으로는 만덕교비, 만덕교, 삽다리비, 객사, 태봉산 최영 장군 대첩비 등이 다수 잔재하여 옛 고을의 현청이 소재하고 있던 곳으로 문화와 역사가 함께 숨쉬고 있는 지역이다.
리의 면적은 1.60㎢ 가구수는 282호에 인구는 813명이다. 뜸별로는 홍산 관청이 있었던 뒤에 마을이 있으므로 아후(衙後), 관리들을 맞아들이는 연봉정(蓮峰亭)이 있고, 풍수설에 관주혈(貫珠穴)이라는 산과 연화부수혈(蓮花浮水穴)이라는 연못이 있어 이 부근이 명당자리라 하여 연봉이라 부르게 된 마을이 있다.
남촌리(南村里)
동북쪽으로는 태봉산이, 그리고 서북쪽으로는 옥녀봉(玉女峯)이 낮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앞으로는 넓은 바다 같은 들녘이 펼쳐지는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 때는 대산현의 중심지였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는 백제 때에 비해서 비교적 한가한 지역이었으나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명문들이 정착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었다. 고려 초기에는 이 고장의 유일한 토착성씨인 홍산순씨가 탄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 때에는 이몽학의 난이 일어남에 따라 그 이후엔 다시 향촌(鄕村)으로 변모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홍산군청의 남쪽에 있으므로 남촌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약현리(藥峴里), 안량리(安良里) 일부를 병합하여 남촌이라 해서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남촌리에 있는 고적으로는 동헌, 형방청, 금천교 창립비 등이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중기에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장터로 알려져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군산, 강경을 제외한 가장 큰 시장이였다는 홍산 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리의 면적은 1.26㎢ 가구수는 473호, 인구는 1,398명으로 홍산면에서 가장 많은 가구와 인구수를 점유하고 있다. 뜸별로는 지금부터 백년전까지만 해도 어선이 이곳까지 들어와 닻을 내린 모랭이라 하여 닻전모랭이, 성 아래의 마을이라 하여 성하, 조선시대 약초밭이 있었다 해서 약현, 약막재 등의 마을이 있다.
홍량리(鴻良里)
홍산의 영산인 비홍산(飛鴻山)이 서북쪽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남쪽과 동쪽으로 낮은 야산지대와 들이 있는 곳에 홍량리는 위치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도 그쪽에 속했었다. 이미 백제시대 이전에 취락을 형성하였으나 백제 멸망 후 쇠퇴하는 지역으로 변하였다가 고려 초기에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씨족으로는 일찍이 사찰 안양사가 있는 이 지역에 연안이씨가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번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안량리(安良里)와 상서면의 한동(閑洞) 신서리(新西里)를 병합하여 비홍산의 홍자와 안량리의 양자의 이름을 따서 홍량리라 칭하였다. 홍량리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홍량리 5층 석탑이 있으며 농가소득 증대 및 농촌경제 활성화를 위한 홍산농공단지가 1997년 7월에 준공되어 126,815㎡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또한 홍량 2리의 주 소득원인 시설 딸기재배(42호 17ha)로 연간 20여억원의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리의 면적은 2.35㎢ 가구수는 145호에 인구는 443명이다. 뜸별로는 고개를 등지고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등자말, 마을 앞으로 두내가 흐른다 하여 수구동, 무루내, 안량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안량골, 안량곡, 옛날에 풍류를 줄기던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한희동(閑希洞)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좌홍리(坐鴻里)
옛날에는 큰비가 올 때마다 금천의 물이 범람을 해서 농경지 및 도로 등이 침수하는 피해를 입은 지역이였다. 또한 좌홍리 앞뜰은 구룡평야의 허리에 대치하는 지역으로 농업적 요건이 풍부한 지역이며, 작은 좌촌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시대의 적갈색 연질 심발형토기 및 회청색 경질의 타날문토기편이 수습되고 있어 인류의 정착은 구석기시대부터였고 그때부터 농업이 발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산면내 전체 답면적 중 좌홍들이 차지하고 있는 답면적은 85.6ha로 전체의 13.2%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에는 홍산현의 영역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산되며 마을의 형성은 고려 중기부터라고 전해진다. 처음 정착한 씨족으로는 제주고씨로서 상당한 기간을 두고 집성촌으로 알려진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의 아전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던 곳이었으며 이몽학의 난 이후에는 마을이 옛날보다 쇠퇴해 갔으나 조선시대 말기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홍양리(鴻陽里), 좌촌일부와 상동면의 삼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좌홍이라 하고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또한 기러기가 많이 내려앉는 절경을 예찬한 것을 볼 때 기러기 홍에서 유래되어 좌홍이라는 설도 있다.
리의 면적은 1.18㎢, 가구수는 92호에 인구는 260명이다. 뜸별로는 비홍산과 금천의 정기(精氣)에서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이 있다해서 좌촌(坐村)이라 부르고 큰 마을을 큰좌촌(大坐村), 작은 마을을 작은 좌촌(小坐村)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교원리(校院里)
서쪽으로는 태봉산이 우뚝서고 북쪽으로는 홍산향교(鴻山鄕校)가, 동쪽에는 역촌이 위치하여 좋은 대조를 이룬다.
백제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추산되나 태봉산 서쪽에서 출토되는 유물(돌검)로 보아 백제 이전에 인류가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산할 수도 있다. 교원리의 마을형성은 고려 초기로 추측을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군 폐합에 따라 역촌, 서원골, 교촌, 북촌 일부를 병합하여 교촌과 서원의 이름을 따서 교원리라 칭했다. 교원리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조선조 초기 창건된 홍산향교가 있으며 매월당 김시습과 광산인 김효종을 배향하는 사우로 청일사(淸逸祠)가 있다. 그리고 고적으로는 홍산면 교원 89번지 일대에 조선시대 역(驛)인 숙홍역(宿鴻驛 : 옛날의 이름은 비웅(非熊)이었는데 태종 원년에 나는 기러기의 형세가 있다 하여 개칭하였음)이 있었다.
리의 면적은 1.52㎢ 가구수는 149호에 인구는 395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에 향교가 있으므로 향교골이 향교곡, 생적굴이 되었고 김시습 등을 모신 청일사가 있으므로 서원골, 서원곡, 청동(淸洞)이라 부른다.
토정리(土亭里)
풍수설에 따르면 지형은 토끼 형상을 한 산에 용이 누워 있는 형국이라 “토산지상 유와룡형(兎山之上有臥龍形)”이라 하였는데 그 형국의 모듬 장소를 발견하면 유복해 진다고 전하나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로 추산한다. 그리고 마을이 형성되고 개간이 서둘러진 것은 고려 말기가 확실한 것 같다. 고려 말기 양천허씨가 개척의 꿈을 안고 처음 정착하였으며 이어 동래정씨, 경주김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은 점점 대형화해 갔다.
조선시대에는 홍산현 군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토동(土洞)과 정동(亭洞), 구산리(龜山里), 여단리 일부를 병합하여 토동의 토자와 정동의 정자 이름을 따서 토정리라 하여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토정리에 소재하고 있는 고적으로는 질·병신을 제사하던 홍산여단지가 있다.
리의 면적은 3.79㎢ 가구수는 98호에 인구는 246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앞 산모양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구산, 거그매, 조선시대 홍산현 여단이 있는 장소의 마을이라 여단, 마을에 큰 정자나무가 있으므로 정주안, 마을 부근에 토끼와 닮은 산이 있으므로 톳골, 토동(兎洞), 냇물이 갈라지는 그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가르내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상천리(上川里)
홍산면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부여군 내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상천리는 산이 많은 지역이다. 리의 남쪽으로는 상천 저수지가 여러 곳에서 흘러오는 산악지대의 물을 저장하는 구실을 하고 산아래 계곡사이로 들이 펼쳐져 있어서 비교적 안전한 농경지대를 이루고 있다.
백제 때에는 대산현의 영역이었으며 산악지대인데 비해서 일찍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고려 중기에 달성서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광산김씨가 터전을 잡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에는 두 씨족이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대야곡면(大也谷面)의 지역이었다. 숲이 우거져서 토양이 풍부하며 자연적인 경관이 또한 아름다운 곳이므로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 지방의 선비들이 자주 찾으며 안식지로 우러러본 지역으로도 통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대야면의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노리(上老里), 하노리(下老里), 와천리(瓦川里), 늑동(勒洞) 일부를 병합하여 상노의 상자와 와천의 천자의 이름을 따서 상천리라 하고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5.98㎢로 홍산면 전체 면적의 25%를 점유하고 있어 가장 크며 가구수는 89호에 인구는 220명이다. 고적으로는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40호인 상천리마애불상(上川里磨崖佛像)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마을의 허리가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느실, 삽티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을 삽티라 하고 위는 윗삽티 아래는 아래삽티, 지형이 반달처럼 생겼다 해서 월구리라 하는 마을들이 있다.
정동리(井洞里)
남쪽으로는 남면의 삼룡리(三龍里) 들을 지나 금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면서 농경지대를 이루고 있어 그 위쪽에 위치한 정동리는 산악에서 흐르는 물이 좋아서 선비가 많이 탄생한다고도 전한다.
백제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백제 때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취락의 구성도 있었던 곳으로 마을의 형성은 고려 말기부터라고 전한다.
조선시대 초기는 홍산현 대야곡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함평모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나갔으며 그 이전 씨족의 정착과정을 보면 마을형성은 있었으나 어느 씨족이 주축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어 정착 씨족으로는 파평윤씨가 지금의 사기점골에서 정착시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는 홍산군 대야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정리(上井里), 백동(白洞), 가동(加洞)과 군내면(郡內面)의 소곡리(蔬谷里)를 병합하여 상정과 가동의 이름을 따서 정동리라 하여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사창(社倉)들이 경지정리(耕地整理)되면서 일명 샛터라고 부르는 하소곡(下蔬谷) 마을이 없어지고 앵시동으로 이전 취락구조(聚落構造) 주택마을을 형성하였다.
리의 면적은 2.54㎢ 가구수는 131호에 인구는 347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이 모롱이에 자리해 있다 해서 모랑이, 모랭이, 잣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 백시동(栢市洞), 조선시대 사기점이 있었으므로 사기점골, 가동, 마을에 우물이 많으므로 상정, 상정리, 백시동 남쪽에 있는 마을인 안추실, 소곡(蔬谷), 꾀꼬리 집이 많아 앵소동(鶯巢洞), 마을 가운데 큰 바위가 있어 포석골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무정리(務亭里)
북쪽으로는 부여군 내산면과 동쪽으로는 구룡면과 경계를 이루며 비교적 산악이 많은 지역에 무정리가 위치한다. 인류의 정착은 고려중기로 추산하나 그 이전에 마을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중기에 씨족의 번성을 위하여 처음 자리잡은 무안이씨의 중시조가 무정리에 처음 자리잡은 인물로 손꼽히며 그 후 마을이 형성 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공론이 되었다. 백제 때는 대산현의 영역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대야곡면의 지역이었다. 조선 성종(1490년경) 때의 온양방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광산김씨, 여흥민씨가 정착하면서 무정리 일원에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대야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선정리(仙亭里), 무중리(務中里), 무량리(務良里) 일부를 병합하여 무량의 무자와 선정의 정자의 이름을 따서 무정리라 하고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79㎢ 가구수는 64호에 인구는 178명이다.
자연마을은 물이 많고 수원이 풍부하다 하여 물양이라 부르다 무량이가 되었고, 옛부터 선인들이 정자를 짓고 놀며 풍류를 즐기는 마을이라 하여 선정(仙亭)이라 부르고 쇠가 많이 나왔다 하여 쇠정이, 쇠정, 철정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조현리(鳥峴里)
홍산면에서 가장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천보산과 월명산의 준령을 뒤로 하고 낮은 야산지대와 들이 자리하며 구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마을이 형성된 때는 백제시대로 대산현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홍산현 대야곡면 상조리(上鳥里)는 조현 1리 지역이었으며, 홍산현 대야곡면 신동리(薪東里), 신서리(薪西里)는 조현 2리의 지역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에 보면 상조리(조현 1리)는 현청으로부터 거리가 7리이며 호수는 25호이고 인구는 105명(남자 54명, 여자 51명)이며, 신동리·신서리(조현 2리)는 거리가 10리이며 호수는 176호이고 인구는 687명(남자 348명, 여자 339명)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조 때 일어난 이몽학의 난 이후에 많은 씨족이 이촌하였으며, 끝까지 이 지역에 정착한 씨족으로는 경주김씨, 광산김씨 가문이 있고 숙종 이후의 수원백씨가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대야면의 지역으로 새재고개 아래를 새재 또는 조현(鳥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조리, 신동리, 신서리를 병합하여 조현리라 하고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조현리에는 장수초등학교(長壽初等學校)가 위치해 있으며 문화유적으로는 경주김씨 계성군(慶州金氏 鷄城郡) 위패를 모신 영모당(永慕堂)과 경주김씨 가문의 효자비문이 마을 한가운데 청룡이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1930년경 마을청년의 공동체 의식과 협동심, 새로운 문화 풍습을 전수하기 위하여 조직된 근로 청년단(勤勞 靑年團)의 단체가 있었으며 해방직후 홍산면 자체로 청년단 운동경기를 홍산초등학교(鴻山初等學校)에서 가질 때 마을의 사기와 선수들의 필승정신을 북돋우기 위하여 김영진, 김기인씨 등이 작사 작곡한 마을응원가도 있어 현재까지 불리워지고 있다.
리의 면적은 1.90㎢, 가구수는 122호에 인구는 351명이다.
자연마을은 큰뜻을 품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하여 대야골, 새재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하여 새재, 수해를 막기 위해 고을 원이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나무를 많이 심은 마을이라 하여 식송(植松), 천석군이 많이 나올 만큼 기름진 땅이 주위에 있다 해서 천석골, 천석곡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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