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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6] 부여군 마을 유래 // 구룡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6. 구룡면 마을유래


구봉리(九鳳里)
면소재지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규암면과 은산면을 경계로 위치해 있으며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고, 통일신라시대 때는 한산현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추정되나, 1985년에 청동기시대 때 사용하던 돌칼, 청동검, 주먹도끼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된 것으로 볼 때 이 시기부터 생활의 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집성마을을 이룬 것은 조선시대 초기에 한산이씨가 정착하면서 이루어졌고, 1700년경 영월엄씨와 연안이씨, 경주최씨 등이 이주하면서 집성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말기엔 홍산군 해안면 지역으로 1914년 군폐합에 따라 행촌(杏村), 신성리, 독성리(禿城里), 지경리, 동쌍리(東雙里), 침산리(砧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구봉리의 큰산인 봉황산의 이름을 따서 구봉리라 하였으며, 행촌과 지경리를 구봉 1리라 칭하고 독성리, 신성리 등 일부가 구봉 2리 죽동마을이라 칭해져 왔으나, 1978년 신성마을이 분리되어 구봉 2리가 되고, 죽동마을은 구봉 3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해방이후 1960년에 약 164가구에 930여명이 논 농업으로 어렵게 생활하여 왔으며 이후 경제성장에 의한 인구이동과 대가족제도에서 소가족제도로 바뀌면서 인구가 많이 줄어 지금은 121가구에 304명만이 거주하고 있다.
고적으로는 동아시 마을의 진산인 해발 94m의 야산정상을 중심으로 구축한 구봉산성(九鳳山城)이 있고, 선조 29년(1596) 불만에 찬 민심을 선동하여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의 주거지가 이곳에 있다.
리의 면적은 2.27㎢이며 뜸별로는 옛날부터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대숲골 또는 죽동, 성(城)이 있는 마을로 성벽이 테를 두른 것 같다 해서 동아시, 성(城) 이름에 따라 독성, 마을에 그릇점이 있었으므로 점촌(店村), 또는 마을이 새로 생겨서 신성리, 조선시대 홍산현과 부여현의 경계라 지갱이라 불리는 뜸들이 있다.

죽절리(竹節里)

긴 장대같이 뻗어 내린 봉황산(鳳凰山) 줄기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봉황이라는 새가 영조(靈鳥)로서 죽실대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벽오동(碧梧桐)이 아니면 깃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죽절리라 했다 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백제 말기에 축조한 성터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조선초기 연안이씨들이 대거 입촌하여 집성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말기에 홍산군 해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쌍리(西雙里), 산막리(山幕里), 동쌍리(東雙里), 일부를 병합하여 죽절리라 하였다.
구룡면에서 유일한 단일마을로 면적이 1.53㎢이고 임야가 55%를 차지하고 있는 등 전·답 면적이 적어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지금은 주정리 앞들에 경지를 소유하여, 딸기 등 하우스 재배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해방 후 1960년대에 99가구 613명이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77가구 261명만이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고적으로는 효성이 지극하여 고종 22년(1885)에 하사 받아 세워진 이도성 효자문(李度星孝子門)이 있고,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의병장 민종식과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고, 그후 계속하여 왜병과 맞서 싸워온 독립운동가 이용규(李容珪)의 생가지가 이곳에 있으며, 규암면과의 경계인 해발 142m의 봉황산 산정에 있는 토축, 석축의 산성인 봉황산성이 있다. 뜸별로는 마을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막골, 방죽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방죽안, 옛날 절이 있었으므로 죽절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주정리(舟亭里)

구룡면 중앙에 위치하여 잔잔한 야산과 들로 이루어진 마을로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마을의 형성은 백제이후라고 하나, 1600년경 조선 중엽 한산이씨가 배매라는 곳에 설촌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때부터 집성촌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홍산군 해안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배매, 작교, 침산(砧山), 망정(望亭)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배매와 망정의 이름을 따서 주정리라 개칭하였고 배매와 침산을 주정 1리라 하고, 망정을 주정 2리라 하여 현재에 이른다.
리의 면적은 1.37㎢에 가구수는 93호이고 인구는 269명으로 주 소득원은 벼농사이다.
뜸별로는 마을 뒤에 있는 고개는 은산, 홍산, 규암으로 가는 세 갈래의 길이 있어서 목이 좋은 고개라 그 아래 있는 마을도 먹고개라 부른다. 마을 형국이 배를 맬 형국이라 해서 배매, 마을 앞에 외딴산이 있으며 들판에 마을이 있으므로 벌리, 나무정자가 있는 외딴섬이 있으므로 망정(望亭), 다듬잇돌처럼 생겼다 해서 침산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현암리(玄岩里)

동쪽으로 멀리 바다가 보인다는 해발 344m의 우뚝 솟은 망신산(望宸山) 아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의 충신들이 이 산골짜기에 들어와 숯을 굽기도 하면서 한을 달래며 연명하였다 하며, 이때부터 이 고장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안동장씨가 집단적으로 정착하여 설촌하였다는 설도 전해진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해안면의 지역이었으며 무안이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달성서씨 등이 입촌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말기에는 홍산군 해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망동(望東), 망중(望中), 망서(望西), 곤유리를 통합하였으며, 마을 중심부에 검은 바위가 있다 하여 현암리(玄岩里)라 개칭하였고, 망동, 망중, 망서를 현암 1리, 곤유를 현암 2리라 하여 현재에 이른다.
임야가 72%로 구룡면에서 유일하게 산간지대라 불리우며, 1945년도에 설치한 현암 소류지가 소재하고 있어 웬만한 한해에도 농업용수 공급이 용이한 지역이다.
고적으로는 조선시대 백자를 굽던 백자요지(白磁窯址)가 있다.
리의 면적은 4.22㎢이며 1960년대만 해도 약 114가구 663명이 거주하였으나, 차츰 줄어들어 현재는 93가구에 267명만이 남아 있다. 주 소득원은 논 농업과 딸기 하우스재배이며,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곤이란 새가 많았던 마을이라 곤유동( 遊洞), 망신산에 오르면 바다가 보이므로 이로 연유해서 망해(望海), 망해를 중심으로 서쪽마을을 서편망해, 중앙에 자리한 마을을 중뜸망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태양리(太陽里)

구룡면의 중심부이자 소재지로서 일력(日歷) 또는 장승백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한 풍수지리 학자가 이곳을 지나다 풍수를 보니 태양의 혈이 쏟아지는 명당자리라 하였다 하여 그 후로 일력이라 칭하였고, 마을 안에 장승이 있어 장승배기라고 하였다 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시대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로 보나 인근마을인 현암리 일원에 신석기시대 후기의 유적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취락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마을의 형성은 고려초기 안동김씨가 입촌하여 설촌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려말기 연안이씨, 밀양박씨, 그리고 조선초기에는 김해김씨, 달성서씨 등이 태양리 마을형성에 공이 많은 씨족으로 손꼽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해안면 지역으로 일력 또는 태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작교리(鵲橋里), 망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태양리라 하였다.
홍산군 해안면 시절 해안면사무소가 작교에 위치해 있었으며 아직도 그 건물이 남아 있고, 지금은 개인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1954년 면사무소가 주정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주민이 점차 늘어 인구 집중화가 이루어졌고, 대가족에서 소가족제도로 바뀌면서 인구가 급격히 줄어 지금은 197호에 631명이 거주하고 있다.
1994년도에 관내 처음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이 이루워져 27동이 신축되었고, 동방사료, 화강산업, 영미산업 등 사업체가 있으나 주민의 고용창출 효과는 미흡하다. 현재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용강중학교, 구룡초등학교, 구룡파출소, 예비군중대본부, 구룡농협, 구룡신협 등 각 기관단체가 집중되어 있고, 상권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소재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고적으로는 도지정 기념물 제45호인 백제석실고분이 있고, 향토문화 유적 제35호인 고인돌군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1.81㎢이다. 마을별로는 옛날 지사가 지나다가 햇빛이 쏟아지는 들에 자리한 이 마을은 세월이 흐를수록 햇빛의 덕을 많이 볼 명당이라 일력이라 부르고 변하여 태양, 옛날에 마을에까지 다리가 있었다 하여 작교(鵲橋), 마을에 장승이 서있다 해서 붙여진 장승백이의 마을이 있다.

금사리(金寺里)

소재지로부터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내산면과 홍산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구룡천이 금사리의 북쪽에서 흘러 서쪽으로 마을을 휘돌아 동으로 흐르고 있어, 살기에 여건이 아주 좋은 지역으로 오래 전에 인류가 터전을 잡고 살았을 것으로 본다.
마을형성은 백제유민이 정착하면서부터로 추정하고 있으나, 고려시대 말기부터 김해김씨와 금녕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새롭게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경주김씨가 정착하면서부터 집성촌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으로 본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조선 말기에는 홍산군 해안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군폐합으로 금동리와 소사동, 대사동, 신기리, 용암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금동과 대사동의 이름을 따서 금사리라 하였다. 20세기초 천주교인 금사리 성당이 건립되어 새로운 종교의 요람지로 등장한 지역이며, 지금도 금양마을의 80% 이상이 천주교인이다.
고적으로는 도지정 기념물 제22호인 창렬사(彰烈祠)와 제143호인 금사리 성당(金寺里聖堂)이 있고, 부여군 향토문화유적 제15호인 독락정(獨樂亭)이 있으며, 선사시대의 지석묘로 추정되는 석광묘식 지석묘가 있으며, 효자로 소문난 정우(鄭優)의 비(碑)가 마을 안에 있다.
일제시대 모시 생산량이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하며, 해방 후 한때는 쇠양이 모시하면 전국에서 알아주었고, 높은 소득을 올렸으나, 산업발달로 모시 재배가 점점 줄어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리의 면적은 1.55㎢이고 가구수는 138가구에 인구는 387명이며, 주 소득원은 벼농사이다. 뜸별로는 옛날에 큰절이 있어 많은 중생이 기거한 곳이라 대중처라 불리었으며, 물레방아간이 있던 마을이라 방앗거리, 마을 동쪽에 소(沼)가 있고 그 옆으로 벼랑이 되어 있는 마을로 소에 금빛보다 더 다복한 햇빛이 내리는 마을이라 하여 쇠양이, 이, 금양이라 부르고, 절이 있던 마을이라 절굴로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논티리(論峙里)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한 마을으로 구룡평(九龍坪)이 마치 넓은 바다처럼 들 바다를 이루는 그 가에 위치해 있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 홍산과 부여를 왕래하는 길이 있었으며, 그 길이 논티라고 전해온다.
마을의 형성은 백제 때부터이나 확실치 않고 조선시대 초기에 경주김씨들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홍산군 해안면으로 논티 고개밑을 논티라 하고, 금양의 서쪽마을이라 해서 금서리(金西里)라 했는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논티리라 칭하였다.
1931년 논티시장이 개장되어 해방 후 40여년간 성시를 이루웠고 구룡면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지역경제를 주도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 도로망확충과 운송수단의 발달로 상권을 부여 등지에 빼앗겨 사양화되었고, 상점도 2∼3개뿐이 없으며, 마을주민 대부분이 딸기 등 비닐하우스 재배와 벼농사를 짓고 있다. 1960년대 인구가 1,300여명 이었으나 현재 467명인 것을 보아도 당시 성시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관으로는 구룡 우체국이 있고, 마을내 음료수 공장인 대한양행이 성업중에 있다.
고적으로는 논티시장 남쪽으로 약 800m에 위치한 해발 75m의 산 정상을 중심으로 테뫼식 토성인 논티산성(論峙山城)이 있다.
리의 면적은 구룡면에서 가장 적은 0.87㎢이며 가구수는 170호에 인구는 467명이며, 뜸별로는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논티, 마을에 부자가 많이 나는 명당자리가 많은 마을이라 다부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동방리(東芳里)

구룡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3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으로 옥산면 음양산(陰陽山)에서 발원하여 흘러오는 금천이 큰 냇물로 변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의 지역이었다.
1650년경 조선중엽에 밀양박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며, 이어 광산김씨와 풍천임씨가 정착하여 농경지를 조성하면서 큰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당시 마을 앞에는 큰 강이 흘러 배가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왜침이 잦았다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上東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촌(東村), 죽리(竹里), 석교리(石橋里), 내당리(內堂里), 방계리(芳溪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동촌과 방계의 이름을 따서 동방리라 하고 있다.
해방이후 전체면적의 50%가 답으로 이루어진 넓은 들을 이용하여 1960년대 약 160가구 960여명이 주로 논농사로 생활을 하였으나, 산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인구가 줄어 지금은 119가구 367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80년대 경지정리가 이루어지면서 딸기와 수박 등 비닐하우스 재배기술을 도입하였고 지금은 60여 농가가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부여군에서 하나뿐인 도축장(동방식품)이 이곳 동방리에 있으며, 리의 면적은 2.30㎢로 비교적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여름 장마철만 되면 수해 상습지로 농경지 피해가 극심한 지역이나, 2000년도 동방 배수장이 건설되어 수해 상습지에서 벗어났다. 뜸별로는 동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동촌, 방축을 쌓은 마을이라 해서 방축리, 왜구의 침범이 잦을 때 망을 보던 마을이라 망가래라고도 부른다. 방죽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방죽안, 방죽을 끼고 풍류가 있는 마을이라 방계, 질그릇을 굽는 요지가 있어서 점촌(店村), 대나무가 많다 해서 죽리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죽교리(竹橋里)

구룡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한 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상동면의 지역이었다.
1800년경 연안이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이어 광산김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송죽리와 내당리(內堂里) 석교리(石橋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죽과 석교의 이름을 따서 죽교리라 하였다.
해방이후 1960년만 해도 650명의 인구가 넓은 들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 왔으며, 바로 옆 마을인 논티리의 논티시장을 활용한 되메기 장사꾼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점차 인구가 줄어 지금은 82가구에 23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1980년대 경지정리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딸기와 수박 등 비닐하우스 재배기술을 도입하였고, 지금은 전체 농가의 60%인 50여 농가가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리의 면적은 1.72㎢이며 고적으로는 철종 9년에 하사 받아 건립한 광산김씨 열녀문(光山金氏烈女門)이 있고, 자연마을로는 과녁촌, 돌다리, 상굴, 송죽골 등이 있다. 뜸별로는 옛날에 어렵게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과녁촌, 돌다리가 있던 마을이라 해서 돌다리, 석교, 석교리, 마을 위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상굴, 상곡, 마을 뒷산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서 송죽골, 송죽, 송죽리라 하는 마을들이 있다.

용당리(龍塘里)

구룡면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초기에 왕씨가 정착하여 부를 누렸다고 전해지나 조선 초기에 광산김씨, 경주김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으로 앞에 용못이 있고, 그 옆에 할미당이 있어 용당이 또는 고당(姑堂)이라 하였는데 1914년 군 폐합에 따라 부두리(扶頭里), 외당리, 내당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당리라 하였다.
구룡면에서 가장 넓은 경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지형적으로 구룡천과 금천의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비가 조금만 와도 수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다. 그러나 87년 수해 이후, 배수 개선사업에 의하여 배수장이 건립되었고, 농경지의 98%가 경지정리를 실시하여, 지금은 수해 위험지역에서 벗어나 마음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며, 벼농사 이외에 딸기 등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1960년대 인구는 1,700여명이었으나 급격한 경제성장과 자녀교육 문제 등으로 인하여 도시로 전출하고, 소가족제도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줄어 현재는 219가구에 671명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고적으로는 부여군 향토문화 유적 제7호인 만가대 팔각정(萬家垈 八角井)이 있고, 연안이씨 열녀문(延安李氏 烈女門)이 있다.
리의 면적은 4.21㎢이며 뜸별로는 마을 앞에 용못이 있고 그 앞에 할미당이 있다 하여 용당, 고당, 용당이이라 하고, 부여로 들어오는 서쪽의 처음 장소가 부여머리, 부두리, 부여두리, 부두라 부르고 긴 등성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진등, 장등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