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5. 내산면 마을유래
천보리(天寶里)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광산김씨와 평산신씨 등이 이주하여 설촌하였다고 전하며, 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신기리·늑동리와 무량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산면에 편입되고 천보산의 이름을 따서 천보리라 하여 현재에 이른다. 그후 상륵·하륵·신기의 3개 마을로 구분되었으며, 상륵마을은 지세가 말이 굴레를 벗는 형국이라 하여 상륵이라 하고, 하륵마을과 함께 늑동리로 변했다가 천보리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뒷산에 반개절이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약 100여년 전에 없어졌다는 절터가 있다.
하륵마을은 아랫구레울이라 하여 하륵이라 칭하였다. 마을입구에 소류지가 있어 10여 ha의 경지에 몽리하고 있다.
신기마을은 새로이 촌락을 이루었다 해서 옛 이름을 새터라 하였으며, 그후 신기라 칭하였다. 마을 면적은 2.95㎢이고 76가구에 인구는 199명이다.
묘원리(妙院里)
1100년경 광산김씨와 창녕조씨가 각각 이주하여 설촌하였다고 전하며, 본래 홍산현 지역이었는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묘원리와 산저리(山底里), 만자리(晩者里) 일부를 합하여 묘원리라 하였다.
묘원마을은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를 돌봐주는 묘원이 있었으므로 묘원리라 불리우다가 이를 줄여 원곡(院谷) 또는 면동(面洞)이라 하였다. 산저마을은 묘원 마을 안쪽에 있다 하여 안터라 하는 마을과 옛날 선비 한 분이 이곳을 지나다 갈증을 면하려고 우물가에서 물을 청하니 아낙네가 버들잎을 띄워주는 물을 마시려 할 때 황새가 날았다 하여 황새말이라 전하는 두 마을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두 마을은 합하여 서운산(棲雲山) 밑에 있다 하여 산저(山底)라 칭했다.
묘원리의 면적은 2.63㎢이고 57가구에 인구는 176명이다.
율암리(栗岩里)
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율치리(栗峙里)·만자리(晩者里)와 해안면(海岸面)의 용암리 대사동이었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부여군 내산면에 편입되어 율치와 용암의 이름을 따서 율암리라 하였다. 율치마을은 1400년경 황토재에 조상의 산소를 모신 평택임씨가 그 산소에서 금비둘기가 날아갔다는 말을 듣자 이곳이 귀한 곳으로 알고 그 산소를 보전하고자 이주하여 개촌하였다고 전하며, 그후 창녕조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이 융성하였다 한다. 마을을 둘러싼 밤나무가 많다 하여 밤고개라 불렀고 밤율자를 따서 율치라 칭하였다. 만자마을은 조선 연산군 때에 창녕조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지형과 지리적 운세로 보아 운이 늦게 트인다 하여 만자실이라 불렀다 한다.
용암마을은 1400년경 전주이씨가 이주하여 마을이 생겼다 전하고, 마을 뒷산 서쪽에 있는 바위 밑에 용이 살았다 하여 용암이라 전하게 되었다 한다. 율암리의 면적은 2.75㎢이고 80가구에 인구는 237명이다.
운치리(雲峙里)
조선초기 밀양박씨·김해김씨·창녕조씨 등이 각각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해진다.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지역인데 1914년 안치리·죽림리·서운리와 만자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내산면에 편입되고, 서운과 안치의 끝이름을 따서 운치리라 하였으며, 안치·죽림·서운의 3개 마을로 구분되어 있다. 안치마을은 선녀 한 분이 인간으로 환생하고자 백마를 타고 날아와 신구제산에 정착하였으나 또 하나의 황마가 먼저와 버티고 서 있어 이를 쫓으려 함에 황마가 용트림을 하고 불총으로 백마를 쫓으니 백마는 떨어져 흔적이 없고 황마는 그 자취를 변치않고 서 있어 질마재라 하였는데 이 고개 이름을 따서 안치라 이름지었다 한다. 죽림마을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였기에 대숲말이라 부르다가 그 후 죽림이라 칭하였다.
서운마을은 서운산 밑에 위치하였다 하여 서우내라 칭하였으며, 서운사가 있었다는 절터가 있다. 내산면의 중심으로 면소재지를 이루고 있으며 1974년 3월까지 5일장이 섰던 곳이기도 한다.
운치리의 면적은 4.83㎢이고 184가구에 인구는 562명이다. 인동장씨 열녀문(烈女門)과 신갑순 효자문(申甲淳孝子門)이 있고, 특히 이름이 있는 바위가 특이하게 많다(굴구루바위, 농바위, 마당바위, 문바위, 쉰질바위, 장군바위).
주암리(珠岩里)
축융봉 산줄기 아래 자리잡은 이 마을은 1536년경 광산김씨와 무안박씨가 낙향하여 거처를 정하려고 현재의 내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는 느티나무 밑에 앉아 지형을 살피던 중 북쪽의 지세가 좋은 녹간마을을 형님격인 무안박씨가 자리를 잡고, 이보다 못한 동촌마을을 아우격인 광산김씨가 택하여 거처를 정하여 살았다 한다. 광산김씨는 현재까지 16대에 걸치면서 마을이 융성하였다.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숙동, 녹간리와 저동, 미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주암리라 해서 부여군 내산면에 편입되었다.
동촌마을은 서당이 있다 하여 숙골이라 하였다가 그후 숙동으로 불리어오다 조선말기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촌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나 지금도 숙동과 동촌 두 이름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녹간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마을지세가 목마른 사슴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녹간이라 칭하였다. 마을의 면적은 3.54㎢이고 가구수는 67이고 인구는 187명이다. 또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1,400년된 은행나무가 있다.
저동리(苧洞里)
국도 40호선의 서쪽으로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 마을로 미암과 저동은 조선 선조 때에 청주한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지우마을은 1780년경 여산송씨가 설촌하였다 전한다. 본래 홍산현 지역으로 1914년 미암리·저동리·지우리를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며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미암마을은 뒷산 바위에서 부처님께 봉양할 쌀이 나왔다는 쌀바위의 이름을 따서 미암이라 칭하였으며, 저동마을은 모시밭이 많아 모시울이라 부르다가 그 후 저동이라 칭해졌다. 전통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마을의 한 해 행운을 비는 동화를 세우고 있다. 지우마을은 마을의 지세가 바지게 형국이라 하여 지루지라 이름지었다 하며, 바지게에 짐이 차면 부린다 해서 재산을 오래 보존하지 못하고 입촌할 때 빈손으로 온 사람만이 재산을 모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면적은 3.59㎢, 가구수는 87이고 인구는 243명이다.
마전리(麻田里)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나 조선시대 홍산현 내산면 지역으로 조선중기 선조 때에 경주최씨가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이어서 옥천전씨가 정착하여 현재는 세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내산면 지역으로 삼밭이 많이 있으므로 삼바실 또는 마전곡(麻田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해치리(蟹峙里) 일부를 병합하여 마전리라 해서 내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4.39㎢이고 가구수는 52에 인구는 133명이다.
온해리(溫蟹里)
월하산(月下山) 아래 남쪽으로 펼쳐지는 지역에 위치하며 외산면으로 넘어가는 게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지관(地官)들이 자주 찾는다. 병자호란 때의 척화신(斥和臣) 윤집(尹集)의 묘(墓)도 온해리에 있다. 온해리에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한 씨족은 엄씨 가문으로 해마다 12월 30일에 동민들이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진주강씨, 파평윤씨의 가문이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밀양박씨, 김해김씨의 씨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 홍산군 내산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온수리(溫首里), 해치리(蟹峙里), 지우리(地隅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온수와 해치의 이름을 따서 온해리라 하여 부여군 내산면(內山面)에 편입되었으며, 리의 면적은 4.93㎢이고 가구는 84에 인구는 239명이다.
뜸별로는 지형이 마치 게가 기어가는 형국이라 해서 게재라고 부르고, 마을 부근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샘의 머리쪽에 있다 하여 온수, 온머리, 온수리라하고 온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서촌(西村)이라 부른다.
지티리(芝峙里)
지티마을은 985년경 안동장씨가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하며, 지티고개에 위치하였으므로 지티라 칭하였다.
괴목마을은 1486년경 남원양씨가 개촌한 것으로 전하며, 그후 차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이 융성하였으나 양 성씨의 세력다툼으로 임진란 당시 의병으로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모두 징집되어 현재에는 이 두 성씨는 한 가구도 남지 않았다. 마을에 큰 괴목나무가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괴목이라 하였다 한다. 지금도 그 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약 5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리의 면적은 4.83㎢이고 가구수는 93에 인구는 281명이다.
금지리(金池里)
본래 홍산현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군폐합에 따라 부여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며, 금지와 산정의 두 마을로 구분되어 있다.
금지마을은 조선 세종 때 창녕조씨가 입촌하여 형성되었다 전하여지고 월명산 중턱에 금지사가 있는데 이 절터 안에 선녀가 목욕을 하였다는 샘이 있었다 하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 샘의 이름을 따서 금지사라 하였고 마을 이름도 금지라 칭하였다 한다.
산정마을은 조선 태종 때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마을을 만들면 크게 흥한다 하여 연안이씨가 입주하여 설촌하였다 전하고, 정자나무가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산정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의 면적은 5.99㎢이고 가구수는 73에 인구는 2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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