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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3] 부여군 마을 유래 // 은산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3.은산면 마을유래


은산리(恩山里)
은산면의 행정적 중심지이며 은산시장 은산별신당(恩山別神堂)으로 널리 알려진 은산리는 북쪽은 야산과 평지로, 그리고 남쪽은 넓은 들로 조성된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의 백제군과 나당 연합군의 격전지였음은 은산별신굿의 원인으로도 짐작이 가며 규암면 합정리(合井里) 도무재 울성(蔚城)싸움에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성을 버리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한 백제군이 은산을 중심으로 한 은산사람들이었다는 전설을 통해서도 은산은 백제 때 큰 마을과 군사가 주둔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한촌으로 변한 이 지역은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方生面)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이인도찰방(利仁道察訪)에 딸린 은산역(恩山驛)이 있었으므로 은산 또는 은산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산직리를 병합하여 은산리라 하였다.
면적은 1.92㎢이고 304가구에 인구는 983명이다.
인접지 청양군 장평면 화산리 중석광산이 성황될 때는 은산리 장터의 광범위한 시장 거래로 성시를 이루었으며 상권경제의 명성을 떨쳤으나 광산의 폐광, 공업화시대로 변화, 인구의 급격한 감소, 교통수단의 발달 등으로 부여의 직접 영향권 내에 있어 현재는 소규모 도시지역으로 상권의 한계성이 있다.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은산별신제가 유명하며 별신당 앞에 1990년 은산별신제 전수회관(137평)이 건립되었으며 격년제로 별신대제가 거행되고 있다.
1991년 124,000㎡의 농공단지가 조성되었으며, 자연마을로는 1960년대 난민들이 새로 정착하면서 새로된 마을이라 신흥동(新興洞), 버들이라 불린다. 옛날에 산지기가 살던 마을이라 산징말, 산직리(山直里), 산허리에 자리한 마을이라 선허리라 부르다가 산허리, 산아래에 몇 호 있으므로 은산(隱山)이라 부르다가 그후 역말이 생겨 역으로 인해 덕을 얻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은산(恩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들이 있다.

신대리(新大里)

옛날에는 장마가 지면 금강이 범람을 하여 이 지역까지 물이 올라 수해를 당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규암면 진변리의 방파제로 수해의 위험은 없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이미 마을의 형성이 이루어졌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유민들의 정착지였다고 전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方生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기계유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신대리, 대은리(大恩里), 은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대와 대은의 이름을 따서 신대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2.31㎢이고 259가구이며 인구는 861명이다.
면소재지의 연접리로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예비군중대본부, 마을금고, 은산초·중학교 등 각 기관단체가 집중되어 있고 재래시장터 등 상권이 점차 늘어 소재지인 은산리에 버금가는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에 부엉바위라는 바위가 있는 마을로 은산들의 덕을 크게 입는다 해서 대은리, 부암(富岩), 부엉바위라 부르며, 새로된 마을을 새태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토기, 석기, 마제석검이 발굴된 선사시대로 추정되는 지석묘(支石墓)가 있다.

회곡리(檜谷里)

규암면 신성리(新城里)와 경계에 백제 때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있고 청양군 장평면의 넓은 들이 펼쳐진 은산면에서는 비교적 들이 많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부여에서 북쪽으로 왕래하는 큰 길이 있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막이 있었으며 많은 행인이 쉬어가던 지역이라고 전한다. 농경시대로 접어들면서 가장 활발한 촌락을 이루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번창한 마을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동쪽에 펼쳐진 넓은 들의 은덕이었다고도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 아래 위치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公洞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순흥안씨가 집성마을을 이룩하면서 마을은 더욱 번창해 나갔으며 이어 평산신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의 성격으로 지역이 발전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공동면의 지역으로서 전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전나무골이라 불리던 마을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도성면(道城面)의 구룡리(九龍里)를 병합하여 은산면에 회곡리로 편입되었다.
면적은 1.63㎢이고 69가구에 인구는 222명이다.
백제 때의 토성인 은산이중산성(恩山二重山城)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성재, 새터, 양지뜸, 형제바위가 있다.

금공리(琴公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후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의 불교의 대가람인 금강사(金剛寺)가 들어설만큼 지형이 수려한 지역이었고 금강사가 들어서서는 백제인들의 정신적 안식처로 지목되었던 곳이 또한 금공리다.
고려시대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놓인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 고령신씨들이 정착하여 불당과 연관해서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집성촌까지 등장을 했다. 그후 신천강씨가 정착함으로써 들은 개간되고 마을은 부유의 길로 접어들었으니 불문의 대가람인 금강사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마을의 이름을 처음에는 안저울[安垈], 안재울[鳳垈], 귀골[公洞], 금강이[琴江, 금갱이]로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봉대리(鳳垈里), 공동(公洞), 금강리(琴江里) 일부를 병합하여 금강과 공동의 이름을 따서 금공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2.41㎢이고 76가구에 인구는 220명이다.
사(寺)유지인 금강사지(金剛寺址. 사적 제435호)를 군에서 매입 발굴하여 문화유적지로 개발 계획 중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강사(金剛寺)가 있었던 마을이라 금강이, 옛날 안적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봉(鳳)이 앉아서 우는 소리가 마음에 들어 안씨가 정착한 마을이라 안재울, 안대, 봉대(鳳垈), 봉대리라 부른다. 백제의 오릉이 있었던 마을이라 오릉거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가곡리(佳谷里)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어 고부실[曲阜], 아가펄[棠坪], 옥가실[玉佳谷], 옥계[玉溪] 등 자연마을 명으로 불려 오다가 조선시대 군현제 실시에 따라 옥가곡(玉佳谷), 중리(中里)로 명명되어 공동면에 속해 오다가 1914년 군폐합시 옥가곡과 중리를 병합하여 가곡리(佳谷里)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곡부리(曲阜里)를 가곡 1리로, 옥가리를 가곡 2리로 개칭하였다.
마을 면적은 3.86㎢이고 120가구이며 인구는 393명이다.
마을 이름은 뒷산인 매화봉(梅花峰)이 『정감록(鄭鑑錄)』에 “십승지지(十勝之地) 매화낙지(梅花落地)”라는 설에 따라 함양박씨, 청송심씨, 연안송씨가 이주하였다 전하며, 곡부(曲阜)라는 명칭이 공자의 출생지와 그 이름이 같아 훌륭한 성현이 태어날 것이라 믿고 조선시대부터 곡부서당(曲阜書堂)이 끊이지 않았다. 옥가리(玉佳里)는 옥녀가 옷을 벗고 비파를 타는 모습이라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는 데서 옥가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마을앞 병풍산과 매봉재가, 좌측에는 황새봉, 우측에는 번개재가 감싸고 있어 마치 구슬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라 옥가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매화초등학교가 1966년 설립되었다가 1991년 폐교되었다. 주로 수도작 농업이나 맥문동이라는 약초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용두리(龍頭里)

은산면의 최북단인 동북쪽에 위치해서 한적한 산골이다. 북쪽으로는 청양군 대치면(大峙面)과 경계를 이루고 냇물로는 북쪽에서 흘러와서 남쪽으로 흘러가는 금강천을 이루고 용두철터골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용두천(龍頭川)이 동쪽을 적시고 있으며 북쪽은 산악지대이나 남쪽으로는 들이 펼쳐진 지역에 용두리(龍頭里)는 자리한다. 용두리는 동남쪽으로는 금강천을 건너서 정혜산이 있고 정혜사가 자리해 있으므로 옛날에는 불승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한 최북단이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난을 피하고 한적한 지역에서 자리를 잡기 위하여 공산이씨와 성주이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또한 연안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여 현재에도 성주이씨와 공산이씨, 연안이씨가 각 10여호씩 거주하며 그 뿌리를 지켜오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공동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으므로 용머리 또는 용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용두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면적은 1.48㎢이고 42가구에 인구는 133명이다.
전통적인 산골 오지마을이며 앞으로 지천의 냇가가 흘러 19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물이 맑고 내가 넓어 행락객이 끊기지 않았으나 현재는 지천 상류가 오염되고 있다.
수도작 밤나무 재배 등을 주로하고 있는 마을이며, 자연마을로는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머리, 용두라는 마을이 있고 웃말, 논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거전리(巨田里)

거전리(巨田里)는 백제 때 지금의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 금정(金井)에서 백제 왕실에 물을 나르기 위하여 새벽에 출발해서 왕궁을 다녀서 돌아갈 때는 꼭 저녁노을이었다는 전설의 지점인 사양(斜陽)고개를 서북쪽에 두고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서쪽에서 흘러오는 냇물과 그 위쪽에서 흘러오는 냇물따라 위 아래쪽으로 들이 조성된 지역에 자리잡고있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한 산골이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이후로 보며 산등성이에 주막이 있었다는 전설로 보아 백제 때 산막 주막이 있었던 지역이며 금정(金井)에서 부여로 가는 큰 길이 있었던 지역같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들이 개간되기 시작하였으며 산막 초막인 농부들의 가옥은 여러 곳에 서 있었으나 마을의 형성은 늦게 조선시대 중기에 들어서 난을 피해 이 지역에 정착한 경주김씨의 설촌으로 처음 마을이 조성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공동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삼거리(三巨里)와 저전리(楮田里)를 병합하여 거전리(巨田里)라 해서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18㎢이고 69가구에 인구는 200명이다.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앞으로 지천 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1973년 거전초등학교가 설립되어 1991년 폐교가 되었다. 현재는 폐교를 야영수련원으로 전환시켜 교육청에서 운영하고 있다.
수도작, 맥문동 밤나무를 주로 재배하고 있는 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마을의 주변에 닥나무가 많으므로 닥밭실, 닥밭, 저전(楮田), 저전리(楮田里)라 부르며, 장벌, 거전, 고무실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다 해서 삼거리라 부르고, 좋은 샘이 있어서 정동(井洞), 정골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장벌리(長閥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에 속했었다.
마을형성에 따른 씨족의 정착은 조선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 당시 격동하는 사회에 밀려 몰락한 양반들이 난을 피하여 정착한 지역이 장벌리(長閥里)라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자채리(自菜里)와 벌리(伐里), 장좌리(長佐里) 삼거리(三巨里) 일부를 병합하여 장좌(長佐)와 벌리(閥里)의 이름을 따서 장벌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6.49㎢이고 85가구에 인구는 241명이다.
오랜 옛적부터 매년 정월 보름날 달이 뜨기 시작하면 벌말마을에서는 동화제 장좌울에서는 탑제를 지내 처음 정착한 조상들의 한을 달래며 풍년을 기원하고 있는데 이는 오랜 옛적부터 전해오는 마을의 풍속이다. 1980년대부터는 약초재배로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맥문동이라는 약초재배로 주재배작물인 수도작보다 몇배 더 높은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고개 아래에 자리한 마을로 옛날에 마을 부근에서 캐는 약초가 유명하여 약초로 유명해진 마을이라 잣재울, 자채리(自菜里)라 부르고 벌말, 안골, 장재울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나령리(羅嶺里)

서북쪽으로 조공산(鳥公山)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외산면과 북쪽으로는 청양군 남양면과 접하고 있는 나령리는 첩첩 산골이다. 그러나 은산면의 중심부로 흐르는 은산천과 나령천 등의 발원지로 풍부한 수원이 흐르고 있어 그 주변에 들을 조성하고 있어서 농경지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깊은 산골이나 백제 때부터 청양과 그 북쪽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백제 때에 이미 마을의 형성이 있었다고 전해오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方生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기름진 땅을 개간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특히 교하노씨들의 정착으로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조령리(鳥嶺里), 여가리(汝加里), 온탑리(溫塔里), 내라마리(內羅馬里), 외라마리(外羅馬里)를 병합하여 나마리와 조령리의 이름을 따서 나령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으로는 13.02㎢이고 112가구에 인구는 290명이다.
산간마을로 임야면적이 은산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수도작 외에 밤나무, 표고, 맥문동 재배와 축산을 많이 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고개에 나팔형의 명당이 있다 하여 전망이 밝아진다는 뜻에서 나마리(羅馬里), 마을이 나마리 안쪽에 있다 해서 내나리(內羅里), 옛날에 절이 있고 탑이 있는 마을이라 온탑이, 온탑리 등이 있고 조선시대의 백자 가마터인 나령리백자요지(羅嶺里白磁窯址)가 있다.

대양리(大陽里)

백제가 부여에 환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나 그 이전으로 마을의 형성을 점칠 수 있다. 즉 부여에서 서북쪽으로 행하는 길목을 조성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이 일찍부터 마을의 형성을 병행해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의자왕의 동생 도천군이 절을 지었다는 도천사(道泉寺)가 폐사지로 남아 있는 대양리는 그래서 백제 때는 궁중의 중요한 영역이었을 것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중기에 함평이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 500년동안 선비들의 은신처가 또한 대양리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의 지역으로서 산세가 햇빛을 잘 받아들이는 형국이라 하여 대양리 또는 댕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중산리(中山里), 동막리(東幕里), 칠목리(漆木里)를 병합하여 대양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60㎢이고 98가구에 인구는 300명이다.
밤나무, 표고, 맥문동 재배와 축산업으로 고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 산세가 태양, 즉 햇빛을 잘 받도록 위치하여 대양리, 태양리, 주변에 옻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옻나무골, 칠목리(漆木里), 산세가 동쪽을 향하여 막을 친 것 같다 하여 동막(東幕), 동막리 등의 마을이 있고 현애사지(懸崖寺址)가 있다.

오번리(五番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이미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형의 명당으로 오릉(五陵)의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많은 지관들이 산막 또는 초막을 짓고 명당자리를 찾다가 정착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성씨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명문인 평산신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조성해 나갔으며 이어 함평노씨, 영일정씨의 집성촌 조성으로 들은 농경지화 되어 갔다.
마을의 명칭은 오릉(五陵)과 오리에서 전음된 오리울[午利里]과 정승이 이곳에 낙향하여 세 그루의 느티나무 정자를 지어 살고 있는데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여 얻은 삼괴정(三槐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번포리(番布里), 삼괴리(三槐里), 오리리(午利里), 검산리(檢山里), 대양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오리(午利)와 번포(番布)의 이름을 따서 오번이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5.30㎢이고 97가구에 인구는 253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느티나무 정자 세 그루가 서 있는 마을이라 삼괴정, 삼거리, 차(車)씨가 처음 여러사람과 살기 시작했다 하여 차중리(車中里), 번포리(番布里), 오리알을 품고 있는 명당이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는 오릉(五陵) 자리가 있다하여 오릉, 오리올, 오리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홍산리(洪山里)

은산면의 중심부로 흐르는 은산천을 유일한 젖줄로 하고 좌우로 펼쳐지는 들에 홍산리는 위치한다. 산악은 남쪽이 험준한 편이고 마치 분지처럼 들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게 보이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농경사회로 접어드는 삼한시대에 이미 인류의 정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가 부여에 환도하기 전에 이미 마을의 형성이 되었었다. 백제 말기에는 큰 마을이 조성되었으나 백제 멸망 후 쇠퇴해 가기 시작하여 고려 때에는 백제 전성기보다 쇠약한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서서 고려의 문신들이 이씨조선 정권 참여에 불참하고 몸을 감춘지역이라는 설도 있으며, 특히 함평이씨와 창원황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의 지역으로서 산세가 거미가 집을 짓는 형이라 하여 검산리(檢山里)와 말무덤에서 유래된 산정말과 앞에 넓은 냇가를 끼고 있는 너봉내(넓은내, 洪川, 廣川), 너봉내 뒤에 있는 뒷골[後洞], 계룡당, 노루목쟁이로 불리고 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때에 황산리(黃山里), 계룡리(鷄龍里), 상홍리(上洪里), 하홍리(下洪里), 후동리(後洞里), 검산리(檢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하홍(下洪)과 검산(檢山)의 이름을 따서 홍산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91㎢이고 123가구에 인구는 390명이다.
일찍부터 비닐하우스로 딸기, 포도 등 특용작물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마을로 현재 딸기, 포도 등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로 지형이 거미가 집을 짓는 형국이라 검산리라 부르고 마을 앞에 넓은 냇물이 흐르므로 너벅내, 홍천, 광천, 너붕내, 마을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노루목이, 계룡산 아래 마을이 있고 신당(神堂)이 있는 마을이라 계룡댕이, 계룡당, 제룡대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가중리(佳中里)

백제 때에 이미 큰 사찰이 들어섰던 흔적이 보이면서 또한 고려시대에는 미녀봉(美女峰)을 중심으로 그 아랫녘에 부촌이 조성되고 지방의 토호장자가 한때 지배했던 봉건사회제도의 마을사회 구성의 판도가 엿보이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한때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가재울을 중심으로 안뜸, 갓골(산과 마을의 형상이 갓과 비슷한데서 유래), 지금도 미륵불이 남아 있는 미륵거리와 마을 동쪽 임천으로 통하는 임천고개가 있고 대나무가 많았다는 죽말에서 전음된 중말(中말)이 안중말과 밖중말[外中]으로 불려오다가 조선 초에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가재울이 가좌면(加佐面)의 소재지가 되면서 마을 이름도 대가리(大佳里)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대좌리(大佐里), 내중리(內中里), 외중리(外中里), 내경리(內敬里) 일부를 병합하여 대좌와 내중이 이름을 따서 가중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면적은 2.47㎢이며 135가구에 인구는 421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작은 재 아래 자리하였다 해서 가재울, 조선시대 가좌면사무소가 자리하면서 큰 마을이라 해서 대가리, 마을 어구에 미륵이 서 있는 마을이라 미륵거리, 미륵당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가재울 마을 앞에 속칭 상대바위, 요대바위라 불리었던 바위가 지석묘로 확인되어 2기가 있다.

경둔리(敬屯里)

경둔리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경둔천근처는 산세가 수려하여 옛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지가 많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을 비롯한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이 이곳에 자리한 구티(鳩峙) 등의 명당설이 바로 그것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여 오랫동안 나당군에 저항하였던 곳으로 알려진 경둔리는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과 연관된 부흥군의 거점이 아니었던가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마을 유래는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다는 둔터골[屯垈]과 지형이 병의 목과 같다는 병목안 등으로 불렸으며 둔터골은 후에 두터골[厚洞]로 전음된다. 그리고 산세가 비둘기 알을 품고 있는 형이라는 비지재[鳩峙]와 정자나무와 맑은 샘이 있었다 하여 붙은 정수터[亭水垈]로 불렸다는 설, 정수터는 세조때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洪允成)이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부터 정수터[亭水垈]라 불렸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전주이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김해김씨, 여흥민씨가 정착하면서 부촌의 영역을 조성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둔리, 하둔리, 내경리, 외경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둔과 외경의 이름을 따서 경둔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73㎢이고 70가구에 인구는 226명이다.
수박재배, 밤나무, 축산농가가 많다.
자연마을로는 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비지재, 구티,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다 하여 하둔리(下屯里)라고도 부른다.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던 마을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둔내동, 둔터골, 상둔리, 마을의 지형이 병의 목과 같이 생겼다 해서 병목안, 정자나무가 있고 맑은 샘이 있는 마을이라 정수대라 불리는 마을이다.

내지리(內地里)

은산면의 서남쪽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망신산(望宸山) 너머로 구룡면 현암리(玄岩里)와 경계를 나누고 남쪽으로는 구룡면 죽절리(竹節里)와 규암면과 경계를 나누는 비교적 들이 많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가좌면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목천상씨와 예천임씨, 동래정씨의 정착으로 내지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양지리, 내대리의 지경리와 홍산군 해안면(鴻山郡 海岸面)의 망동리(望東里) 일부를 병합하여 내대와 지경의 이름을 따서 내지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14㎢이고 124가구에 인구는 369명이다.
내지리에 합수초등학교가 1955년 설립되었다가 2000년도에 폐교되었다. 또한 단잡기 놀이가 전해져오는데 1995년에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0년대까지는 주막집이 많고 술과 도박 등으로 어렵고 혼탁스런 마을이었으나, 비닐하우스 재배기술을 도입하여 70% 이상의 농가가 수박, 메론 등을 재배하고 밤나무를 재배하는 등 현재는 살기좋은 마을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수수대, 함적골, 망해, 신동이 있다.

합수리(合首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유민들과 함께 백제부흥군이 진을 쳤던 자리로 전해오며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마을의 형성이 되었으나 그후 재난으로 다시 정착하지 못하고 조선시대 중기부터 오늘의 뿌리를 이루는 씨족의 정착으로 마을이 새롭게 형성되어 갔다. 확실한 기록으로 전해오지는 않았으나 임진왜란 때 뜻있는 선비가 있어 이곳 주민을 이끌고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진산(珍山) 충북지방에서의 의병활동을 하고 돌아와서 다시 농경지를 개척하였으므로 단결심이 어느 지역보다 강한 지역으로 인식된다. 순흥안씨와 전주이씨가 정착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내수양리(內首陽里), 외수양리(外首陽里), 대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수양과 외수양을 합하였다 하여 합수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07㎢이고 60가구에 인구는 182명이다.
자연마을로는 합수리의 목이되는 마을이라 수양리(首陽里),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양지뜸 등이 있다.

각대리(角垈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이전으로 추산되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가 부여에 환도한 후라 하겠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은 더욱 여러 곳에 조성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의 고려시대를 겪으면서 쇠퇴해 갔으며 오늘의 마을을 이루는 씨족의 뿌리는 고려 말기부터 정착한 각 씨족을 처음으로 한다.
조선시대 초기는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마을명을 큰터굴[大垈]과 운암(雲岩)으로 불렀는데 한 스님이 운암마을을 지나다가 마을이 조용하고 산세가 아름다우며 쇠뿔과 같은 바위가 하늘 높이 솟아있어 지경이라 하고 절을 짓고 쇠뿔같은 바위를 파서 절 이름을 숭각사(崇角寺)라 지어 그 후로 운암이라는 마을 대신 숭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절 숭각사가 있어서 불교의 탄압에도 불신도의 내왕은 끊기지 않았으며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부여군내에서 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숭각리와 대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숭각과 대대의 이름을 따서 각대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98㎢이고 46가구에 인구는 125명이다.
은산면 밤나무재배를 시초한 선구적인 산간 마을이다. 현재에도 밤나무 재배 농가가 50% 이상이며 표고, 맥문동 재배 등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에 숭각사가 있었으므로 절명칭을 따서 숭각, 숭각리(崇角里)라 하며, 고려시대에 창건된 숭각사터가 있으며 60여년전 절을 헐어 고란사를 건축하였다는 설도 있다. 법당앞 오층석탑은 군산으로 반출되었다 하나 그 행방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