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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2] 부여군 마을 유래 // 규암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2. 규암면 마을유래


규암리(窺岩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로 보기도 하지만 구석기시대 수렵인들이 정착하였던 지역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부여에 백제가 천도하였을 때는 한촌이었으나 여러 갈래로 드나드는 길이 있어 강을 건너던 휴식처임을 짐작할 수도 있다.
백제 말기 나당군의 침공이 있을 때는 전쟁터였으며 사비성이 나당군에 의해 점령된 후에는 백제부흥군의 요람지였다. 그러나 도무재에서 700여명의 백제군이 저항하다가 모두 전사한 후부터는 그 성과 함께 다시 한촌으로 변해 갔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군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진주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이어서 조선시대에 청주한씨가 정착하여 두 가문의 집성촌으로 지금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 지역으로 엿바위가 있으므로 엿바위 또는 규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자온대(自溫臺), 수북정(水北亭)이 있다. 부풍사(扶風祠)라는 사당이 있고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초삼일 자온당산제(自溫堂山祭)를 지내고 있다. 1968년 백제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부여를 왕래하던 규암나루가 현재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용되었고 한때는 활기가 있던 규암시장이 교통의 발달로 부여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어 쇠퇴하였다. 영농조직으로는 규암원예작목반 22호, 규암싸작목반 43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규암리에는 면사무소, 규암파출소, 규암농협, 규암우체국, 규암예비군면대, 백제권개발사업소 등의 기관단체가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부여팔경(扶餘八景)인 수북정청람(水北亭晴嵐)과 규암진귀범(窺岩津歸帆)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자온대에 오르면 역사의 흥망성쇄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리의 면적은 0.62㎢, 가구수 380호, 인구는 1,060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엿바위와 새터가 있다.

외리(外里)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백제 때에는 어부들과 상인들이 배를 몰고 금강을 출입하는 기착지이기도 하였다 한다. 외리의 인류 정착도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이다. 육지로부터 인류가 강변에 흘러와서 정착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금강을 따라 올라가고 내려 다니던 선인(船人)들에 의해서 정착이 시작되고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말이 구전으로 전하기도 한다. 그만큼 신라시대까지는 수로를 필요로 하는 지역이었으며 육로보다 백마강이 더욱 소중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는 부여군 내륙지방으로 드나드는 상선들이 대왕포를 지나 이곳이 정박지였다 한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순천김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 내리에 있는 여울의 바깥이 되므로 바깥말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리(內里), 검복리(檢卜里), 돌리(乭里), 임천군 북박면 석우리(石隅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외리라해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외리산성, 외리폐사지가 있다. 1997년 밭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딴펄수박작목반 44호, 돌말수박작목반 14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무, 배추, 수박의 집산 단지이다. 외리에는 부여정보고등학교, 농업기반공사 부여출장소 등의 기관이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봉(金鳳)이 알을 품는 형국[金鳳抱卵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붙여진 금봉마을이 있으며, 마을에 돌이 많고 마을 중앙에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는 커다란 바위가 있어 돌말[石村]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딴펄마을은 원래 이 지역이 백마강변에 위치한 섬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려졌다고 한다.
리의 면적은 3.01㎢, 가구는 621호, 인구수는 2,069명이다.

내리(內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고나서 강변을 지키는 성이 쌓였던 지역이며 그 성벽은 금강의 범람으로 많이 허물어졌으나 아직껏 유적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 지역이었다.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들을 개간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김씨와 순천김씨의 정착으로 더욱 발전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여울 안쪽이 되므로 속뜸 또는 속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반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내리 성터가 있으며 1966년도에 규암면에서는 처음으로 경지정리를 실시한 마을이나 기계화영농이 불편하여 1997년 재경지정리를 실시하였다. 영농조직으로는 여울호박작목반 7호, 여울수박작목반 17호, 내2리수박작목반 29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정관장 홍삼으로 유명한 한국인삼공사고려홍삼창이 위치하고 있다.
리의 면적은 3.06㎢, 가구수는 250호, 인구수는 794명이다.
자연마을은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북새기[北石], 백마강여울 안쪽이 되므로 속뜸, 내리, 마을 앞에 여울이 있으므로 여울, 대장간이 있는 마을이라 풀뭇간 등의 마을이 있다.

반산리(盤山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백제 멸망 후 많은 정착민과 함께 농경지 개간에 따라 큰 마을을 형성하였던 지역이다.
그후 신라, 고려 때를 지나면서 비옥한 땅과 함께 부촌을 이루기도 하였으며 비교적 여유가 많은 지역이 반산리 주변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의 지역이었다. 원거인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생활을 누렸으나 오늘날까지 뿌리내린 씨족은 없으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전주이씨가 정착하고 집성촌을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의 천을면 지역으로서 소반모양의 산이 있으므로 소반뫼 또는 반산(盤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걸산리(杰山里), 신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 반산리로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반산성(盤山城)이 있으며 규암초등학교, 백제중학교, 육군7연대 3대대, 장애인종합복지관의 기관이 위치해 있다. 반산저수지 인접에 2001년 대동황토방아파트 402호가 준공되었고 현재 무지개임대아파트 300호가 공사 중에 있다.
리의 면적은 1.66㎢, 가구수는 407호, 인구수는 1,188명이며 자연마을에는 소반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소반, 소반뫼, 반산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고, 백제 때의 반산성(盤山城)이 있다.

합송리(合松里)

규암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반산저수지를 두고 서쪽으로는 구룡면에서 돌출해 오는 야산지대가 위치해 있다. 동남쪽으로 넓은 들녘이 있으며 소나무가 많아 송당(松堂)이라고도 한다. 반산저수지를 이용한 수원이 풍부하여 비교적 부촌을 이루어 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고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송당면(松堂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교하노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경주김씨가 정착하였다. 연안차씨, 남양홍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농경지를 조성하여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한 지역이다. 우리나라 농촌으로서 특히 충청도 농촌으로서 그 전통적인 농촌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며 농촌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 지역으로 면소재지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송동리(松東里), 송서리(松西里), 노화리(蘆花里) 일부를 병합하여 송동과 송서를 합하였다는 뜻으로 합송리라 하였고, 이후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합송리에는 합송초등학교, 백제어린이집, 규암농업협동조합 종합미곡처리장이 위치해 있고, 또한 합송우체국이 1972년에 개국하여 2000년에 규암우체국에 통폐합되기도 하였다. 반산저수지 인접지에 2001년 강산아파트 263호가 준공되었다.
리의 면적은 5.07㎢(면내 총면적의 10.8%)이고, 가구수는 425호 인구수는 1,331명이다.
자연마을은 옛날에 소나무 우거진 곳에 당집이 있었다 해서 송당(松堂), 마을지형이 장구목처럼 생겼다 해서 장구동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노화리(蘆花里)

규암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으로는 야산지대를 넘어 반산저수지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차지한 들녘에 노화리는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구룡면과 경계를 이루고 들녘에는 옛날부터 갈대가 많아 갈대꽃 명당이라는 노화부수 자리가 있다 하여 노화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을이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을 피하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이 지역 여러 곳에 마을이 생겼다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송당면의 지역이었다. 경주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중추적 씨족으로 남은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의 지역이었다. 지형이 갈고지, 즉 갈고랑이처럼 생겼다 해서 갈고지 또는 갈구지 또는 노화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홍산군 해안면(海岸面)의 지경리(地境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노화리로 편입되었다.
노화리에는 부여군 농업기술센터가 위치하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2.45㎢, 가구수는 201호, 인구수는 563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지형이 갈고랑이처럼 생겼다 해서 갈고지, 노화, 구룡지(九龍池)를 만들 때 저수지 속으로 수몰되는 마을을 이주시키고 마을을 형성했다 해서 이민촌이라 불리는 마을도 있다.

부여두리(扶餘頭里)

규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그 남쪽으로는 금강에 유입하는 금천이 활대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고 그 북쪽으로는 광막한 들이 광범위한 지역에 부여두리는 위치한다. 남쪽의 금천은 큰 물이 지날 때마다 지형의 변화가 있있으며 부여 지역에서 농부가가 우렁찼던 지역으로도 꼽는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사비성의 왕족들이 정착했다고도 전해오며 백제때 이곳에는 만호(萬戶)가 살은 마을이라 해서 만가대(萬家垈) 마을이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정착했던 씨족은 고려, 조선시대를 겪으면서 분산되어 그 뿌리는 이 곳에서 찾을 수 없으며 조선시대에 정착한 기계유씨들이 한때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부여, 홍산(鴻山), 임천(林川)의 세 고을의 경계가 되는데, 이곳에서부터 부여로 들어가는 머리가 되므로 부여머리 또는 부여두리(扶餘頭里)라고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잉불리(芿不里)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부여두리로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02㎢, 가구수는 59호, 인구수는 130명이며, 자연마을에는 부여머리, 잉불, 만가대가 있다.

수목리(秀木里)

부여에서 떨어진 농촌지대이나 반산저수지가 생김에 따라 그 문화적 혜택이 빨라졌으며 고유한 풍속을 지닌 고장으로도 알려졌다.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참나무가 많은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숯을 많이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전해지며 조선시대부터 한산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간지대로는 너무나 토속적인 과일나무가 많아서 감을 비롯한 대추의 생산지로도 알려졌으며, 시목(枾木)골의 감은 한양에서도 손꼽히는 감으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학리(月鶴里), 시목리(枾木里)와 가좌면(加佐面)의 수천리(秀川里), 외경리(外敬里) 일부를 병합하여 수천과 시목의 이름을 따서 규암면에 수목리로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30㎢, 가구수는 103호, 인구수는 296명이며 자연마을로는 빼내라는 냇물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빼내, 감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시목골, 대추나무가 많은 마을로서 풀이 우거진 지역이라 초동(草洞)이라 불리우는 마을이 있다.

석우리(石隅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가 부여로 천도하기 전이며 마을의 형성도 그때 이미 이루어졌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해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부여군의 송당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큰 마을을 이룬 지역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오나 지금까지 뿌리를 둔 가문은 없다.
조선시대 초기에 진천송씨가 정착하였고 서당산(書堂山) 아래 서당 또는 쑥이이 마을은 옛날부터 산세가 좋은 곳으로 낮은 야산지대이나 선비들이 따로 초막 또는 산막을 짓고 소일하던 곳으로 시조에 능한 선비가 대를 이어 전해왔다는 구전도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의 송당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모퉁이에 돌이 많이 있으므로 돌모루 또는 석우동(石隅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석우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충덕사(忠德詞)라는 사당이 있는데 충덕사에는 조선 숙종 때의 명신 김우항(金宇杭)을 배향하고 또한 전주이씨 열녀비가 있다. 1966년과 1972년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라석 수박작목반이 조직되어 20여호가 참여하고 있다.
리의 면적은 0.88㎢, 가구수는 81호, 인구수는 253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 모퉁이에 돌이 많으므로 돌모루, 석우동은 옛날에 서당리라 부르다가 변하여 쑥댕이, 숙당리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나복리(羅福里)

규암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사비성에서 두메를 찾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초지와 들을 개간하여 조선시대까지 비교적 부유한 환경을 누렸던 지역이라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부터 탐진최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조선시대에는 순천김씨, 담양전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원거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지역이 마치 소라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나복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건지리(乾芝里), 월구리(月九里), 학곡리(鶴谷里), 신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나복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나복리선사유적지(羅福里先史遺蹟地), 나복리지석묘(羅福里支石墓), 김진행정려비(金鎭行旌閭碑)가 있다.
리의 면적은 4.60㎢, 가구수는 196호, 인구수는 619명이다.
자연마을은 건지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건지말, 소가 엎드린 형국이라 나복(羅福), 근처가 노승예불(老僧禮佛) 형국이라 바랑굴, 반달의 지형처럼 생겼다 해서 월구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모리(茅里)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이 경둔리에 주둔하여 이 지역까지 출동하여 나당군과 싸운 전쟁터였다고도 전하며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고 부여의 외곽지대로 백제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그 맥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었던 지역이라 전하며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의 지역이었다.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전통을 이으며 생활을 누려왔던 지역이나 이 지역에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집성촌은 고려시대부터 정착한 고령이씨와 조선시대 정착한 여흥민씨의 정착으로부터 시작된 듯하다. 고려 때부터 정착하여 일시 맥이 끊긴 듯 하던 고령이씨들의 정착이 이 지역의 뿌리인 듯하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띠가 많이 났으므로 띠울 또는 모동(茅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에 채야리(菜野里), 함양리(咸陽里)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모리로 편입되었다.
향토문화유적으로는 입암집판각이 있고 고적으로는 모리사지(茅里寺址)가 있다.
리의 면적은 1.68㎢, 가구수는 46호, 인구수는 14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는 마을이 음달이 져서 검게 보인다고 해서 검은머리, 띠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 띠울, 모동(茅洞)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함양리(咸陽里)

은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은산천의 하구에 넓게 펼쳐지는 들과 백마강으로 이어지는 바둑판 같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 서서히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고려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함양리는 그 지역의 산세가 또한 수려하여 명당자리가 많다 해서 지관들의 발길이 끈기지 않는다고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기계유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오늘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으로 풍부한 생활적 여건에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의 영역을 조성했던 지역으로도 알려진다.
햇빛이 하루종일 내리는 지역이라 해서 함양(咸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함양리라하고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함양리고분군(咸陽里古墳群), 함양리태봉(咸陽里胎峰), 유대칭묘(兪大稱墓), 청농정터[聽農亭址]가 있다.
리의 면적은 1.69㎢, 가구수는 89호, 인구수는 258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 전체가 햇빛을 잘 받는다 해서 함양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신성리(新城里)

백제 때는 백제부흥군의 주둔지구로 신라군과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이루어졌으며 조선 선조 때는 이몽학이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군사를 양성하던 지역으로 반란 이후 많은 고초를 겪었다. 조선 말기에는 동학 혁명시 책임자인 복주채를 체포하기 위하여 왜병이 마을을 방화 전소했던 어려운 고비를 겪기도 한 마을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비교적 일찍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아래 속했으며 조선시대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밀양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다 전주이씨가 정착하면서 오늘의 뿌리로 등장한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중리(上中里)를 병합하여 신대와 성산(城山)의 이름을 따서 규암면에 신성리로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신성리고분군(新城里古墳群), 증산성(甑山城), 사자봉산성(獅子峰山城)과 전설로는 성재산의 남매바위가 있고 정규환(鄭珪煥) 정려비가 있다.
리의 면적은 3.51㎢, 가구수는 85호, 인구수는 228명이다.
자연마을로는 강여울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강시울이라 부르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 신대, 증산성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성재 또는 성산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금암리(金岩里)

청양에서 발원된 지천이 흐르면서 호우가 내릴 때마다 금암리 북쪽에는 지형의 변화가 따른 듯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서 전망이 확 트인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때 동쪽 지천과 금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동남쪽으로 왕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였다는 천정대(天政臺)의 서북쪽에 위치한 금암리는 군마가 주둔하고 백제 군사들의 요람지가 아니었던가 한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사비성을 지키는 외곽성을 구축할 때 북쪽에 위치한 두윤산성(豆尹山城)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었다고 전해오며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놓인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예천임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전에 토착한 성씨들과 함께 지역을 개간하고 농경지를 조성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장주리(長州里), 금사리(金沙里)를 병합하여 금사와 돌고개에서 이름을 따 금암리라 하고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금암리오층석탑(金岩里五層石塔)이 있고 고적으로는 포천석교비(浦川石橋碑)와 유진춘(柳震春)의 정려비가 있다.
리의 면적은 2.57㎢, 가구수는 85호, 인구수는 249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 바깥쪽으로 금모래가 깔려있다 해서 금사(金沙), 고개에 돌이 많으므로 돌고개라 하고 그 아래 마을도 돌고개라 한다. 마을 앞으로 강폭이 넓고 긴 냇물 안쪽으로 마을이 있다 해서 장수, 장주(長州)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호암리(虎岩里)

규암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지천이, 남쪽으로는 들이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옥천산(玉泉山)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야산지대와 들을 경계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면적을 차지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는 천정대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었으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 멸망 후로 추정된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금강변의 잦은 범람과 지형의 변화로 정착민이 오래 뿌리를 내리지 않았으나 고려 공민왕 때에 예천임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으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호암리의 뿌리로 30여호가 거주하는 지역이다
뒷산에 범바위가 있어 범바위 또는 호암(虎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상호암리(上虎岩里), 하호암리(下虎岩里)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호암리로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천정대(天政臺), 호암사지(虎岩寺址)가 있고 전설로는 천정대의 임금바위 신하바위가 있다.
리의 면적은 2.56㎢, 가구수는 41호, 인구수는 127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 뒷산에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 하여 범바위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합정리(合井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추측되는 합정리는 북쪽과 남쪽으로 드나드는 길과 백제의 군마가 자주 지나갔다는 구전으로 보아 사람들의 발자국은 오래 전부터 서린 지역 같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문화유씨가 정착하여 한때는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이 고장의 뿌리로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 온 마을이 한 우물을 먹으므로 한우물, 합우물 또는 합정(合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수답리(水沓里), 신대리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합정리로 편입되었다.
합정리에는 2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으며, 2000년에는 한국전통문화학교가 개교하였고, 1997년 100만평 규모의 백제역사재현단지의 지반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리의 면적은 2.93㎢, 가구수는 91호, 인구수는 249명이다.
자연마을에는 물이 좋은 논이 많아서 수답리(水沓里), 무논골, 큰우물이 있어서 온마을이 합하여 한 우물을 먹는 마을이라 하여 한우물, 합우물, 합정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신리(新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무왕때 완공하였다는 왕흥사(王興寺) 터가 이곳에 있으며 왕과 왕족들이 불공을 드리러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이라 한다. 또한 백제 멸망 후에는 도무재 즉 울성산성(蔚城山城)에서 백제부흥군들이 나당군에 저항하다가 660년 11월 5일에 신라왕 무열왕(武烈王)이 이끄는 신라군과 접전 끝에 7일간 성을 사수하며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 백제군의 처참했던 도무재성터도 이곳에 있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초기부터 전주이씨가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도 70여호가 그 뿌리를 잇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새로된 마을이므로 새말, 신촌이라고 부르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신구암리(新九岩里), 진변리(津邊里)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왕흥사지(王興寺址)가 있고 고적으로는 신리고분군(新里古墳群), 청간사지(淸澗寺址), 도무재산성,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리의 면적은 2.56㎢, 가구수는 107호, 인구수는 347명이다.
자연마을에는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말, 백제때 왕흥사가 있었던 마을이라 왕안이, 청간사 부근에 자리한 마을을 청간절[淸澗寺], 청간사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오수리(午水里)

남쪽의 오수리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금강물이 범람할 때 북쪽에서 떠내려와서 떠 있다는 부산(浮山)이 보이고 부여의 부소산과 구드래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인류가 정착한 지역이며 마을의 형성도 그때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오수리의 남쪽은 금강이 범람할 때마다 지형의 변화가 있었던 지역이며 남쪽 깊숙한 곳까지 물이 들어와 백사장을 이루는 듯하여 농경지로는 부적당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 연산군 폭정이후 신리와 진변리 등 인근 마을에서 정착하던 전주이씨와 제주고씨가 이주 설촌하면서 마을의 형태를 이루었고 그 후 파평윤씨와 인동장씨가 입촌하였다고 전해진다. 마을명 유래는 당시 전주이씨는 수원터, 제주고씨는 오실, 파평윤씨는 질목정, 인동장씨는 용추골, 기타 성씨는 다람골에 살어 뜸이 다섯이라 오곡(午谷, 五谷)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오곡리, 신리, 수원리(水原里), 진변리(津邊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곡(午谷)과 수원(水原)의 이름을 따서 오수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개교한 백강초등학교가 이 마을에 위치한다. 1999년 백제역사재현단지 편입지 이주민을 위한 53호의 문화마을이 조성되었다.
리의 면적은 1.96㎢, 가구수는 97호, 인구수는 270명이 거주한다.
자연마을에는 마을에 하늘로 용이 되어 승천한 용추가 있는 마을이라 용추골이라 불리는 마을과 다섯 골짜기가 있는 마을이라하여 오곡리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진변리(津邊里)

남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북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바둑판 같은 전답이 놓여 있는 지역이다. 남쪽에 자리한 부산은 전설에 따르면 큰 비가 오고 금강 물이 범람하였을 때 북쪽으로부터 떠내려와서 이곳에 떠있게 되었다는 지역이다. 그리고 부산의 신령한 사람이 살아서 날아다니며 일산(日山)과 오산(烏山)의 신령한 사람과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산으로 백제말기까지 구드래를 앞에 두고 영산으로 알려져 신성시하는 지역이었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의 정착이 있었으며, 마을의 형성도 이미 그때 이루어졌었다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제주고씨에 이어 완산이씨, 영월신씨가 정착하였다고 전하나 현재는 영월신씨가 맥을 잇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조선 효종때 명신 백강 이경여가 은거하였던 마을이고 명나라에서 가져와서 심은 동매(冬梅) 한그루가 보호를 받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백마강 나루의 가가 되므로 나룻가 또는 진변(津邊)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수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진변리로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 백강동매(白江冬梅), 대재각(大哉閣)이 있고 고적으로는 부산성(浮山城), 부산서원(浮山書院), 청룡사지(靑龍寺址), 환문암지(喚文庵址)가 있으며 또한 가림조씨(嘉林趙氏), 연일정씨(延日鄭氏) 정려가 있다.
리의 면적은 1.47㎢, 가구수는 91호, 인구수는 272명이다.
자연마을로 백마강가에 있는 마을이라 백강, 나루터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진변(津邊) 또는 나룻가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