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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부여의 지리//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1. 부여읍 마을유래

구아리(舊衙里)
부소산의 나무숲과는 거리가 떨어진 지금은 부여 도시의 중심가이며 오늘과 같은 부여시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백제 때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관청이 있었던 지역이다.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후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는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백제 멸망 후 부여에서 가장 타격이 심했던 유민들의 이동으로 한 때 마을이 폐허화된 모습으로 가장 크게 변한 지역으로 손꼽을 만하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말기까지 500년간 부여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홍문리 일부를 병합하여 부여군청이 있었던 지역임으로 구아리라 하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그 뒤 부여면 구아리, 읍 승격으로 부여읍 구아리가 되었다.
1980년 5월 구아 1, 2, 3리로 분구되었다가 1995년 2월 구아 4리로 재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리의 면적은 0.42㎢이며 1,309가구에 3,891명의 인구를 갖고 있고 부여시장이 있는 상업 중심 지역이다. 구 부여 경찰서 자리가 백제때 천왕사(天王寺) 절터로 확인된 명문이 양각된 기와 편과 백제때 정(井)자형 우물이 발굴되었으며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공원을 조성하였다.
지금도 구아리를 홍문거리, 옥터(옥뒤), 절터 등으로 부르고 있다.

관북리(官北里)

관북리는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 남쪽에 위치해서 백제시대에는 왕궁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관아가 있었던 지역의 북쪽이며 지금에는 찬란했던 백제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백제 때의 유물을 전시했던 부여 박물관이 자리했던 지역이며 마을 전체가 왕궁터로 알려지는 마을이다.
조선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홍문리, 흑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관북리라 하고, 1960년 읍 승격과 함께 현재의 부여읍 관북리가 되었다.
1916년 국보 제196호인 금동석가여래삼존입상(金銅釋迦如來三尊立像)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리의 면적은 0.22㎢이며 267가구에 740명이 살고 있다.
관북리는 흑천(黑川) 마을 또는 학(鶴)샘 마을로도 불린다. 큰 비가 오면 이상하게 검은 물이 흐르는 냇가 옆의 마을이라 흑천(黑川)으로, 부소산 입구에 큰 샘이 있어 물이 좋고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학샘이라 부르며 마을도 학샘마을이라 부른다.

쌍북리(雙北里)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을 중심으로 그 둘레 위쪽을 쌍북리라 부른다.
백제 때는 백제의 중심지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고려 때에는 공주에 한 때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 정착한 진천송씨의 번창과 이어 다른 씨족의 정착으로 활기를 찾기 시작한 곳이 쌍북리 일원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쌍구리(雙九里)와 북포리(北浦里), 흑천리(黑川里)의 각 일부와 몽도면(蒙道面)의 석교리(石橋里) 일부를 병합하여 쌍구와 북포의 이름을 따서 쌍북리라 하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쌍북리가 되고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쌍북리가 되었다.
쌍북리는 1980년 1, 2, 3리로 분구되었다가 94년 주공아파트의 건설로 4리까지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쌍북리 면적은 2.47㎢이며 2,037가구에 6,789명이 거주하고 있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낙화암(落花岩), 조룡대(釣龍臺), 군창지(軍倉址) 등 백제 때의 고적(古蹟)이 많이 있는 지역이다.
뜸별로는 거무내(흑천), 뒷개(북포), 사근다리가 있다.

구교리(舊校里)

구교리는 백제시대부터 형성된 마을로 백제시대의 빙고(氷庫)와 구드래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빙고리(氷庫里)와 학서(鶴棲)를 병합시켜 옛날에 부여향교가 있던 곳이라 하여 구교리(舊校里)라 칭하였다.
백제 때는 왕궁의 영역이였으며 조선시대에 백마강 건너 규암면 진변리와 청양군 청남면과 왕래하는 나루터로 융성되었던 지역이다. 본래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 구드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빙고리, 학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교리라 하였다.
특히 구드래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전하는 것처럼 돌석 「구들돌」이 있는 동네에서 어원이 유래하였다.
구교리의 면적은 1.66㎢이며 552가구에 인구는 1,590명인데 80년대 초에 조성된 구드래 공원은 생활공간으로 바뀌어 조각 작품 등이 세워져 있고 읍민들의 휴식공간이고 백제문화제 행사장으로 각광을 받는 지역이다.
뜸별로는 백제때 빙고가 있었다고 빙고재라 하고, 고개아래 있는 마을을 빙고리라 하며 장승이 있어서 장승마을들이 있다.

동남리(東南里)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는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산리, 마천리, 신대리, 남산리, 학서리 일부와 대방면의 탑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산과 남산의 이름을 따서 동남리라 하고 부여군에 편입되었다가 그 후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동남리에 이어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동남리가 되었다. 1948년 동산(東山), 마천(馬川)으로 구분되었다가 1980년 동남 1, 2, 3, 4, 5로 분리되었고 1990년 동남 6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 면적은 1.67㎢이며 2,420가구에 인구는 7,788명이다.
동남리는 동남 2리 전 지역이 상가지역이며 그밖은 거의 주거지역으로 되었고 고적으로는 백제 때의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 궁남지 등이 있으며 부여군청 등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
뜸별로는 백제의 마동왕자(무왕)가 신라의 선화공주와 이곳에 살다가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마을로 마래마을, 부장대가 있었다고 부장골, 향교가 있어서 향교골이 있다.

군수리(軍守里)

군수리는 백제때 군사들이 주둔하였던 곳이라 번창하였으나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어 잡초만 우거졌다가 조선 중엽부터 촌락을 형성하고 군수(軍守)들 또는 군수평(軍守坪)이라 불려졌다. 백제시대에는 꽃다운 여성들이 찬란한 옷차림으로 이곳을 왕래하였다 하여 꽃정 또는 꽃노들(곶노들)이라 불리워졌으며, 두루미 마을은 백제때 문무백관들의 수뇌가 모여 회의장소로 쓰던 누각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군수리 [군숫들, 군수평]는 본래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 백제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들이므로 군숫들 또는 군수평(軍守坪)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수리라 칭해져 오다 군수·신기(新基)로 분구되고, 군수 1, 2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군수리 지역은 81년도에 취락구조 마을이 생겨 도시근교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마을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마을 주변의 넓은 농지는 수박 및 단무지 생산의 주된 마을로 타 농촌 마을보다 윤택하다.
리의 면적은 2.87㎢에 이르고 302가구에 인구 1,022명이 거주하고 있다.
뜸별로는 백제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지역에 마을이 생겼다 해서 군숫들, 군수평이라 부르고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뜨말, 신대리(新垈里), 백제의 성터인 나성(羅城)이 있는 마을이라 성말, 정자를 짓고 잘살수 있도록 노력하는 새마을이라 신기정(新基亭)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또한 사비성의 외곽성인 나성이 있고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座像)과 금동미륵보살입상(金銅彌勒菩薩立像)이 발굴되었으며 많은 연화문와당과 유물이 출토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가 있다.

가탑리(佳塔里)

백제 멸망후 백제유민들이 이주해 와서 정착하면서 고려 초기에는 마을이 대단위로 늘어났으며 지금 구장터로 불리우는 장소는 고려 초기부터 장이 섰던 자리라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는데, 이 고장에 처음 집성마을을 형성한 것은 고려 말기 예천임씨 가문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대방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가속리와 오산리 탑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속과 탑리의 이름을 따서 가탑리라 하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부여군 부여면에 1960년 1월 1일자로 부여읍 가탑리가 되었다. 1990년 2월에는 가탑 1, 2리로 분구되었다.
가탑리 면적은 2.23㎢이며 가구는 287에 920명이 살고 있다. 가탑리 탑골은 전에 탑이 있었기에 불리워진 이름으로 이곳에 석등 연대석이 있었는데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가탑리에서 능산리로 가는 모퉁이를 탱종모롱이라 부르고 옛장터가 있던 곳을 구장터라고 한다. 용바위라는 곳은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백제 때의 나성으로 능산리와 용정리와의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 동문지와 동문교지가 있어 동문다리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금성산 동쪽 기슭에 두시럭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예천임씨 문중의 제각인 경모각이 있다. 농민도장이라는 뜸은 1930년대 농민교육장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그후 학교 분교로 사용하다가 철거되었는데, 철거된 지금에도 농민도장으로 불리운다.
농민도장 동북편 국도변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1979년 15동을 신축 입주하였으며 그 주변 국도 4호선 국도변에 90년말 녹원빌라가 2000년대에 부여고등학교 옆에 빌라 3동이 생겨 도시 형태로 되어가고 있다.
나성의 동문지(東門址)가 확인되기도 했으며 연화문와당이 발굴된 가탑리사지가 있고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도 가탑리 폐사지에서 발굴되었다.

왕포리(旺浦里)

백제 때에는 사비군의 지역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의 영역이었고 고려 때에는 한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포구로 더욱 활발했던 대왕포는 금강의 강경 입포와 함께 많은 상인들이 드나들었으며, 특히 봄 가을로 서해안에서 소금과 새우젓을 싣고 오는 상선이 이곳을 기항지로 택해서 많은 사람들로 붐볐었다.
조선시대부터 여흥민씨가 집성마을을 이루었으며, 현재 집성마을을 이루고 있는 예천임씨의 60여호가 처음에는 조선시대 초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대방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구포리, 왕호리, 대왕리, 구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왕리와 구포의 이름을 따서 왕포리라 하였다. 이후 현내면에 속했다가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왕포리에 이어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왕포리가 되었다.
리의 면적은 1.59㎢이고 가구수는 114호에 인구 390명이다.
백제 때에는 금강물이 바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큰 포구로 임금님이 궁남지에 올 때면 이 포구까지 소요하며 나들이 하던 포구라 하여 대왕포라 하였으나 지금은 강물의 유로가 변경되어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옥토의 대왕펄이 생겨 특산물로 수박이 유명하다.

중정리(中井里)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시대에는 한때 공주군에도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마을의 형성은 백제때 이미 큰 마을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거주하였으나 백제 멸망 후 마을은 차츰 쇠퇴해 갔으며 고려시대 초기에는 마을의 맥이 끊길 정도로 쇠퇴하였다. 그러나 중정리 북동쪽에 정착하는 의성김씨와 문화유씨의 피땀어린 개간으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여 오늘의 농경지 조성에까지 이르고 있다.
중정리는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대방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중리, 동리, 당리, 구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중리와 구정의 이름을 따서 중정리라 하였고,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그 뒤에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중정리가 되고 이어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중정리가 되었다.
중정리는 염창리와 백제 때의 나성지로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황바우 나루를 통해서 장암면과 왕래하였고, 나성 끝에 치마같이 생긴 옷바위가 있서 옷배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백제가 망할 당시에는 옷바위 밑으로 금강물이 흘렀던 바 이곳까지 삼천궁녀가 나성을 따라 적군을 피하여 오다가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하여 낙화암이라고 불린다. 군돌고개 밑에 모시골이라는 마을은 백제때 지금의 여관촌인 모숙골에서 연유된 지명이라 하며, 마을 북쪽에 있는 상봉을 당산이라 하여 매년 정월 망일 저녁에 천제를 지내어 마을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마을 앞에 제방을 축조한 후로는 홍수피해 등의 재해의 우려가 없기에 폐지되었다.
현재 중정리의 면적은 3.94㎢이며, 가구수는 186호에 인구수는 597명이다
또한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된 중정리건물지(中井里建物址)가 있고 당산마을 산정에서 화장분묘(火葬墳墓)로 추정되는 4기의 용기도 발견되었다.

염창리(鹽倉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나당군이 침공해 들어올 때는 백제군이 고군분투한 전장터가 염창리였으며 사비성이 무너진 후에도 백제군이 산발적인 투쟁으로 끝까지 백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군사들의 무덤이 많았던 지역으로 손꼽힌다.
고려 때는 한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형성은 백제 때부터 이루어져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에 정착한 탐진최씨가 정착하면서 대마을 단위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백제때 의염창(義鹽倉)이 있어서 염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상염리, 하염리, 군석리 일부와 석성군 북면의 염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염창리라 하였다가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염창리로, 다시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염창리가 되었다.
면적은 3.21㎢에 가구수는 166호이며 인구수는 417명이다.
80년대 초에 상염마을에 한국조폐공사 부여조폐창이 건립되었다. 군돌마을에는 백제군이 파진산에서 패하고 최후로 나성을 수비할 때 수차의 접전에서 거듭된 패전으로 군사의 수가 너무나 약세이므로 군석 뒷산인 필서봉을 중심으로 군사들을 빙빙돌도록 하니 신라군이 즉시 침공을 하지 못하여 왕을 피난토록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군사들이 돌던 곳이라 하여 군돌이라 하고 이를 한자로 군석(軍石)이라 표기하였다.
이 군석마을은 조선 성종조 사헌부 감찰과 삼등현령을 지낸 최응하(崔應河)가 폐허된 마을에 입촌하여 주거케 되었던 바 필서봉 아래인 이곳에 살면 학자가 끊기지 않는 길지라 입촌하였다 한다. 동편마을에 최씨 제각인 영모재(永慕齋)가 있고, ‘성안이’는 나성 안에 있는 마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북리(縣北里)

백제 때에는 진악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후에는 석성현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는 석성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엔 석성현 북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석성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노상리, 노화리, 월경리, 염창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조선시대에 현북면이 있었으므로 현북리라 하여 부여군 석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에 부여읍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5.32㎢에 가구수는 162호이며 인구수는 517명으로 거의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2000년 대규모 경지정리 사업으로 인하여 특용작물 재배면적이 확대되고 현북제방 보수공사로 매년 수해지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현북리는 원래 석성현 북면지역으로, 현북 1리는 노상, 노상리 지역으로 희여티라 불리우며, 이곳은 산의 생김새가 군사요지로 백제때 기마병의 훈련장으로 사용됐다는 구전도 있으나 실증할 수 없고 사원지는 희어대라는 추정과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대석이 산재해 있다. 현북 2리는 월경, 나말 석성말의 3개 뜸으로 구성되었으며, 나말은 라씨들이 사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전국을 순회할 때 오석산하 남7리인 이곳에 운중반월(雲中半月)이라는 명당이 있다고 하였으며, 지명에 월경, 달아래들, 자무내 등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또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된 백제 때의 절터인 임강사지(臨江寺址)가 있고 백제금동보살입상(百濟金銅菩薩立像)이 발견된 현북리폐사지(縣北里廢寺址) 등의 고적이 있다.

능산리(陵山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현재의 자리를 견지한 마을 형성은 조선시대 초기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대방면의 지역으로서 백제의 왕릉이 있었기 때문에 능뫼, 능메, 능미 또는 능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체마리(遞馬里), 산막리(山幕里)와 오산리(烏山里), 군석리(君石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능산리라 하였고 읍의 승격에 따라 부여읍 능산리가 되었다.
부여읍 능산리는 능산 1, 2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제때 삼산의 하나인 오산은 이 산의 형국이 까마귀형이라 하여 오산(烏山) 또는 오석산(烏石山)이라 하였다. ‘치마수’동네는 백제때 군사들이 말타는 훈련장이었다는 야마소 전설이 있고,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는 심방골 뒷산은 소의 형국으로 소의 유(乳)통위치에 능이 있다. 체마소 뒷산은 써래산이라 하여 소가 써래를 끌고가는 형국이라는 전설이 있다. 1979년 새마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한식가옥 12동을 오석산 아래에 신축하였다. 또한 이곳은 왕릉관리사무소와 능산리에서 1993년도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견으로 더욱 유명하다.
현재 능산리의 면적은 4.24㎢이며 가구수는 168호, 인구는 470명이다.
뜸별로는 능산, 도마동, 체마소, 신직말, 오산으로 부르고 있다. 앞으로 논산 부여간 고속도로가 마을 중앙을 지나가게 되어 있어 농지의 감소와 교통의 편리함 등으로 도시 근교의 형태로 바뀌게 될 형편이다.

석목리(石木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이미 큰 마을이 있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는 불교의 요람지였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후 마을은 차츰 쇠퇴해갔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다시 마을이 살아나 정리해 나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는 진목리, 용전리, 석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교와 진목의 이름을 따서 석목리라 하였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그후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석목리가 되었고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부여읍 석목리가 되었다.
면적은 1.18㎢에 가구수는 213호이며 인구는 675명이다.
석목리는 백제시대의 나성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페허가 되었다가 조선중기 1600년경부터 함열남궁씨와 동래정씨가 입촌하였다.
본 마을은 석교리와 진목리를 병합하여 석목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 안에 노은사란 절이 있어 이의 준말로 논절이라는 이름도 붙여진 듯하다. 쌍북로타리에서 논산 공주방면 국도 안에 있는 곳을 ‘만괭이들’이라 하는데, 이는 백제가 망할 때 의자왕이 웅진(熊津)으로 피난함에 만광이란 복술가가 왕의 행방을 알려줌으로써 백제인들이 만광이를 죽이고 그 집터에 연못을 파니 이곳이 만광지(萬光池)로 만괭이 방죽이라 하였으며, 가탑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만괭이고개라 부른다. 노은사지(老隱寺址)에는 석불좌상이 있는데 이 불상이 안질에 효험이 있다는 속된 말이 전해 내려와 옛날에는 안질이 나면 불상 앞에 달려가 부처의 얼굴을 긁어다 안약대신 사용했다 하며, 이로 말미암아 안면 부분의 손상이 매우 심한 상태다. 1979년에 새마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32동의 주택을 신축 입주하여 취락구조뜸이 형성되었고, 90년대 초에 농산물 공판장 설립과 함께 주변에 무지개 빌라가 들어서 도시근교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용정리(龍井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는 한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보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 멸망 후라 한다. 그러나 그 마을을 이룬 씨족은 자연적 이동 또는 지연이 끊기고 오늘에 뿌리한 그 조상의 처음 정착은 고려말기의 창원황씨로 지적된다. 창원황씨의 정착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대방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석정리와 소룡리, 용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전과 석정의 이름을 따서 용정리라 하였다.
면적은 3.22㎢이며 가구수는 200호, 인구는 666명이다.
용정리는 조선시대 이인도찰방에 딸린 역(驛)이 있었던 곳으로 용전과 용관으로 분구된 후 용정1, 2, 3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밭 또는 용전(龍田)은 소정방이 조룡대(釣龍臺)에서 용을 낚아채니 이곳에 떨어져 썩어 밭이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이 있다.
마을 동쪽에 청마산성지와 경룡사지 및 의열사지가 있고 마을 남쪽 엄방골에 깎은 듯한 바위에 네모진 금이 있는 책(冊)바위는 백제가 망하자 중요한 서적을 이곳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다.

가증리(佳增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는 부여군으로, 고려 때에는 한때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정착한 영양천씨와 이어 남양홍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하여 가증리의 뿌리로 오늘날까지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동남쪽에서 흘러와서는 가증리의 중심을 뚫고 서남쪽으로 흘러서 금강으로 들어가는 냇물 가징개가에 있으므로 가징개 또는 가증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분대리를 병합하여 가증리라 했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현내면을 부여면으로 고침에 따라 부여면 가증리가 되었다. 이후 1960년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부여읍 가증리가 되어 1995년 2월 가증1, 2리로 분구되었다.
면적은 1.93㎢이며 가구수 130호에 인구 409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적으로는 청동기시대로 추산되는 석관묘(石棺墓)가 발굴되어 마제석검과 석촉 등 다수가 출토되었다.

정동리(井洞里)

백제 때는 사비군, 신라때는 부여군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고 조선시대 초기 부여현 몽도면(蒙道面) 지역이었으며 한양조씨와 광산김씨의 정착으로 집성마을을 이루면서 마을이 조성되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 지역에 큰 샘이 있었으므로 샘골 또는 정동(井洞)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몽도면 정동리와 소룡리 일부 및 현내면 북포리 일부를 합병하여 정동리라 칭하였으며, 정동, 와봉 2개 행정리로 구분하여 정동1, 2리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동 1리는 마을 안에 큰 샘이 있었으므로 샘골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샴골로 통하고 있다.
정동 2리는 백제때 기와를 구웠던 곳이라 하여 어얏골[瓦峰]이라 하였으며 규암면 호암리로 가는 범바위 나루와 청남면 왕진리로 가던 독정이 나루가 있었으나 버스 교통의 편이로 지금은 없어졌다.
정동리의 면적은 4.64㎢이며 198가구에 인구 591명이 살고 있다.
80년대 초까지 성했던 잠업은 경지정리와 특용작물의 재배로 사향화 되었으며, 앞으로 백제 큰길이 정동 1리 꿩바위 뜸으로 길이 나면 강변과 함께 송림사 등이 있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왕리(自旺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부여군에, 고려 때는 한때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나당군이 사비성에 쳐들어왔을 때 의자왕(義慈王)이 주장산(珠藏山)을 넘어 도망갔다 하여 이곳 마을을 주자왕리(走自王里)라 하였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러나 주자왕리는 주장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 산에 연유하여 내린 지명이 바른 해석이 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에 자왕리에 정착하는 금녕김씨 그리고 전주이씨의 정착으로 지역이 번성해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주장산 아래가 되므로 주장왕이 또는 주장왕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송정리, 저채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자왕리라 해서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자왕리, 그리고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자왕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입구에 마을이 생김으로 즉 먼저 마을이 있는데 또 생김으로 동구머리라 부르다가 변하여 도구머리, 주장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주장, 주자왕이 등의 마을이 있다.
마을 중앙으로는 국도 40호선이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며 마을 주민 대다수가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전형적인 농업이 주가 되는 마을이다.
리의 면적은 2.68㎢이며 가구수는 100호에 인구는 304명이다.
앞으로 백제 큰길이 자왕리를 경유하여 강가로 통과하게 되면 주장산 강변의 경치 좋은 곳이 되리라 본다.

송곡리(松谷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도 그쪽의 영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예천임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하기 시작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이 송곡리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송삼리, 하수락리, 대곡리를 병합하여 송삼과 대곡의 이름을 따서 송곡리라 하였다.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4월 1일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송곡리가 되었고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현재의 부여읍 송곡리가 마을 주민의 요청에 따라 1, 2리로 분구되었다.
리의 면적은 3.63㎢이며 89가구에 인구는 251명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두 냇물이 합치는 곳에 마을이 있으며 물이 떨어져서 고이듯 수량이 풍부한 마을이라 수락, 수대라 부르고, 마을이 북쪽으로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안(北安), 부거니 등으로 불리는 마을도 있다.

상금리(上錦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도 그쪽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예천임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어 밀양박씨가 또 다른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면서 조선시대 말기에는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수락리, 금암리, 회정리, 죽학리, 보각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수락과 금암의 이름을 따서 상금리라 하였다. 후에 현내면에 편입되었고 이어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상금리가 되고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상금리가 되었다.
상금리의 면적은 3.67㎢로 가구수는 78호, 인구는 204명이다.
뜸별로는 ‘벌터’ 마을이 있는데, 이 이름은 벌집의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밀양 박씨가 조선중기에 회정리에 입촌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스님이 찾아와 며칠 유숙을 하고 떠나면서 하는 말이 주인한테 신세를 진 빚을 갚겠다며 훌륭한 자손을 바라느냐, 아니면 당장 돈을 바라느냐고 물으매 우선 호구지책이 모연한 실정이라 하니 한 곳을 알려주며 백회(白灰)가 나올 곳이라 함에 그곳을 파보니 과연 백회가 나와 이를 팔아서 먹고 사는데 걱정을 안했다 하며, 이로부터 회총골이라 불려졌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장군봉 밑에 회를 팠던 큰 구덩이가 남아 있다.
장군봉 아래 보물을 넣어둔 것 같은 명당자리가 있다해서 보각곡(寶角谷), 보각리(寶角里)라 하는데, 이 바위에 불공을 드려 가정과 마을이 번창하여 갔다 할 정도로 바위의 덕으로 번창하는 마을이다. 또한 금암, 금암리 등의 마을들이 있다.

송간리(松間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에는 한때 공주에 속했으나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마을이 형성되기는 조선시대 초기 광산김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갈동(葛洞), 중간리(中間里), 저채리(楮菜里), 송정리(松亭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과 중간의 이름을 따서 송간리라 하였다.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송간리가 되었다가 1960년 읍 승격으로 부여읍 송간리가 되었다.
송간리의 면적은 1.77㎢이며 74가구에 236명이 살고 있다.
뜸별로는 칡넝쿨이 많은 마을이라 해서 갈울, 갈동, 마을에 소나무 정자가 많이 있다 해서 송쟁이, 소정이, 송정등의 마을이 있다.

저석리(楮石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한 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형성이 상당히 빠른 지역이다. 백제 이전의 취락 형성으로 지적하기도 하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가 부여에 환도하기 이전부터 형성된 것 같다. 그러나 하천을 이용하는 산업의 발달로 백제때 이미 마을의 형성을 보았으며 고려시대까지 꾸준히 농경지 조성이 따르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이었으며 한양조씨와 광산김씨의 정착으로 집성마을을 이루면서 마을은 더욱 번성해 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부여군 몽도면의 저채리, 석탄리, 유촌리와 공주군 반탄면의 서원리를 병합하여 저채와 석탄의 이름을 따서 저석리라 하였다.
저석리를 3개 행정리로 분구할 때 저동 내유촌 서원이라 칭하다가 저석 1, 2, 3리로 개칭하였다. 옛날에는 금강물이 버드랭이와 돌을 앞으로 굽이쳐 흘렀다한다. 돌은 돌여울의 준말로 고려말 충신 이존오(李存吾)가 귀양을 와서 살던 곳으로 그의 호 석탄(石灘)은 돌여울의 지명을 따서 스스로 지었다 하며, 당시 그가 살던 석탄정터가 전한다.
저석 1, 2리는 조선초엽의 안동김씨의 입촌마을이다. 저석 3리는 조선때 공주군에 속했다가 1914년 부여로 편입된 곳으로 조선중엽에 평택임씨와 담양전씨가 입촌하여 거주하면서 뒷산에 산신당을 짓고 당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매년 음력 정월 망일에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제사를 지낸 미역을 부녀자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간소하나마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현재 저석리는 면적 3.50㎢, 가구수 168호, 인구는 517명이다.
앞으로 백제 큰길이 나게 되면 부여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되리라 본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망루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다 해서 버드랭이, 마을 주변에 당나무가 많이 있어 저채뜸, 저채, 저동(楮洞), 저채리(楮菜里) 등의 마을들이 있다. 또한 인조(仁祖) 7년(1629년)에 창건된 창강서원(滄江書院)이 있으며 추포(秋浦) 황신(黃愼)을 제사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마을에는 1940년대까지 성시를 이루었던 왕진(지)장터가 있다.

신정리(新正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 고려때에도 그쪽의 영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함양박씨가 조선시대 초기에 정착을 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이 고장의 뿌리를 조성하였다. 이어 전주이씨가 또 다른 이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면서 차츰 농토가 조성되고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한다.
신정리는 본래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대리(新垈里) 일부와 공주군(公州郡) 반탄면(半灘面)의 서원리(書院里), 정곡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대리(新垈里)와 정곡(正谷)의 이름을 따서 신정리라 하였다.
리의 면적은 2.80㎢에 가구수는 82호이며, 인구는 252명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가 백제 큰길 인터체인지가 되고 부여 청남간 다리가 완공되면 교통은 더욱 편리해지리라 본다.
또한 90년대의 경지정리로 특용작물 재배가 활발해졌으며 그동안 한해 우심마을이었느데, 많은 소형관정 개발로 수리안전율이 매우 높아진 마을이다.
마을별로는 큰 동네의 대울은 대나무가 무성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큰대울, 작은대울 뜸이 있고, 공주군에 편입된 동쪽 골짜기를 정배실「正谷」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