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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8] 부여군 마을 유래 // 옥산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2. 2. 11.

<부록>부여군 마을 유래

8. 옥산면 마을유래


상기리(上基里)
조선시대 말기에 홍산군 상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립리(上笠里), 하립리(下笠里), 신기리를 병합하여 상립과 신기의 이름을 따서 상기리라 하여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2.71㎢이고, 가구수는 72호에 인구는 229명이며, 자연마을으로 갓점, 아래갓점, 위갓점, 신기 등이 있다.

■ 상립마을

상립마을은 원래 홍산군 상서면에 속하였으며, 회관옆에 있는 정자나무(수령 1,000년 이상으로 추정)를 보아 마을의 설촌년대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1730년경에 광주정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김해김씨, 청주한씨가 들어와 마을이 번창하였으며, 마을 원래 이름은 마을 앞 뒷산의 지형이 삿갓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여 입점리(笠店里, 上·下笠)로 불려오다 현재 상립은 상기 1리, 하립은 신기로 병합되었다. 홍산 감포문(鴻山 鑑浦問)이 가활만인지지(家活萬人之地)라 하여 만가대(萬家垈, 상립의 북쪽에 있던 집터)에 만석군이 살았다 한다.

■ 신기마을

1850년경에 전주이씨가 입점리의 아래에 개촌한 후 그뒤 양주조씨의 유학자가 정착한 후 수많은 문하생을 두어 새로운 마을이 생겨나 새로운 터라는 뜻으로 신기라고 불리어 오다 행정구역 조정때에 입점리의 하립을 흡수하여 신기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은 조선시대에 갓을 만드는 갓점이 있었으므로 갓점, 갓점골, 입점, 입점리라고 부르고 갓점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윗가점, 갓점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아래갓점, 마을이 새로 생겨 신기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학산리(鶴山里)

옥산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비홍산의 뒤편에 학산리가 위치한다. 차령산맥의 산폭이 서서히 낮아지는 북단 상기리, 음양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옥산저수지로 들어가는 쇠내의 냇물이 리의 중앙을 뚫고 흘러가면서 조성한 들과 산은 수려하기가 이를데 없다. 달기봉과 지네봉의 높은 산이 민간신앙의 온상지처럼 보이는 것도 수려한 산천에 의미가 깃들어 있음에서 그 수려함이 보인다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홍산현 상서면의 지역으로 조선시대 중기 홍산에서 일어났던 이몽학의 난 때 그 난을 피하여 이곳에 정착한 홍산순씨가 마을형성에 따른 개척인으로 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가천리(加川里), 가장리(加莊里)를 병합하여 이곳에 학이 많이 날아드는 고개가 있으므로 학산리라 개칭하였으며 리의 면적은 2.22㎢이고, 가구수는 45호에 인구(人口)는 122명이다.
자연마을은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 마을이 생겼다 하며 먼저 살던 터보다 더욱 좋은 위치로서 마을을 형성한 지역이라 해서 가장, 마을 앞에 내가 흐르며 냇가 부근에 마을이 있다 해서 가천이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홍연리(鴻淵里)

홍산들에 북쪽을 가리고 우뚝 솟은 해발 267m의 비홍산, 서쪽 넓은 들이 지역에 위치하여 옥산저수지 위쪽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홍연리이다.
조선시대에 처음 정착한 풍천임씨, 경주김씨 들이 조선시대 500년 동안 번창하는 집성촌을 이룩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상서면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도 홍산군 상서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비홍리, 목동, 보곡리, 용연리(龍淵里)를 병합하여 비홍과 용연의 이름을 따서 홍연리라 하여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2.56㎢에 가구수는 101호에 인구는 23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목동, 비홍, 용연 등이 있다.

■ 목동마을
1480년경에 풍천임씨가 이주하여 개촌한 것으로 추정되며, 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목동이라 칭하였다. 그후 앞산에 기러기가 날아든다 하여 비홍리로 부르는 마을이 있었고, 사기를 많이 구웠었다는 산적골과 독그릇을 많이 만들었다는 독전골이 있다.

■ 용연마을

조선초 마씨가 개촌한 것으로 전하여지나 그후 경주김씨가 개척하면서 마을의 뒷산 용상(龍上)골에서 용이 승천하여 마을 이름을 용연이라고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개촌 후부터 매년 정월 14일에 마을 어귀 미륵바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봉산리(鳳山里)

옥산저수지를 끼고 넓은 들과 산이 있는 서쪽에 봉산리(鳳山里)는 위치한다. 마을 뒤로는 수려하고 드높은 옥녀봉(玉女峯)이 있어서 풍류객들이 자주 찾던 곳이 또한 봉산리다.
조선 중엽으로 추정되는 때에 남원윤씨와 풍천임씨, 청주곽씨 등이 개촌한 뒤, 마을 뒷산 옥녀봉의 형국이 봉의 형태라 하여 봉곡(鳳谷), 신당(神堂)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산(堂山), 원두밭이 있다 하여 원곡(院谷)으로 부르던 3개 마을이 있었으나 1914년 군 폐합시에 윗마을을 봉곡마을, 아랫마을의 당산과 원곡을 병합하여 원당마을로 하여 봉곡의 봉과 당산의 산을 따서 봉산리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의 면적은 2.31㎢이며 가구수는 68호에 인구는 159명이고 당산 마을에는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7세기의 백제 고분군(百濟古墳群)이 있다. 내부에서 관형토기, 광구토기, 철제장검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자연마을은 산에 신당이 있어서 당산이라 부르고 마을이름도 당산이라 부르며, 마을 뒷산 옥녀봉의 형국이 봉의 형태라 그 아래 마을을 봉곡이라 부르고, 조선시대에 길을 안내하는 원이 있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 해서 원곡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중양리(中陽里)

조선초기 난리가 있어 은진송씨, 강릉유씨 등이 이곳으로 피난온 뒤 개촌한 것으로 추정되며, 호랑이가 저무는 해에 개를 만나 개를 쫓는 형국이라 하여 모흘(毛屹), 마을 앞에 방죽이 있다 하여 방중(防中), 마을에 햇볕이 따스하고 바위가 많다 하여 양암리(陽岩里)로 부른 3개 마을이 있었으나 1914년 군 폐합시에 방중리와 양암리의 지명을 따서 중양리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의 면적은 1.74㎢에 가구수는 40호에 인구는 90명이다.
자연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지형이 호랑이가 개를 쫓는 형국이라 모흘이라 부르고, 전에 방죽이 있었던 마을이라 방중말, 방중리, 바위가 많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서 따뜻한 마을이라 양암, 양암리, 양수바위라고 부른다.

대덕리(大德里)

옥산면의 남서쪽에 위치해서 서천군 판교면(舒川郡 板橋面)과 보령시 미산면(嵋山面)과 접하고 있는 대덕리는 조선시대 중기 전주이씨가 정착하면서 남원윤씨, 밀양박씨, 진주강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하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일유리(日遊里), 대마동(大馬洞), 부덕리(富德里)를 병합하여 대마와 부덕의 이름을 따서 대덕리라 하여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15㎢이며 가구수는 54호에 인구는 121명이다. 일유마을과 마을 지형이 큰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대마동, 처음에는 우만리(右萬里)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마을이 빈곤하여 부를 쌓고 덕을 베푸는 동네가 되라고 부덕이라고 고쳐부른 자연마을이 있다.

신안리(新安里)

조선시대 홍산현 하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안곡리(雁谷里), 옹점리(甕店里), 신기리, 율동(栗洞, 밤골), 안서리의 일부를 합쳐 신기리와 안곡의 지명을 따서 신안리라 하였다. 마을의 유래로는 해주최씨가 효종 원년(1650)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양주조씨, 평산신씨 등과 같이 입촌하여 개척한 것으로 전해지며, 기러기가 많이 나오는 동네라 하여 안동(雁洞)이라 칭한 곳과 밤나무가 많다 하여 율동이라 한 곳과 안서리 옆에 새로 생긴 마을을 신기라 하여 신안 2리를 이루고 있으며, 시강 마을은 마을내 김해김씨의 12대조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엽에 설촌된 뒤, 금녕김씨, 경주최씨 등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옹기를 굽던 곳이 있다 하여 옹점리와 시를 잘하시는 분들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시강을 신안 1리라 하였다.
리의 면적은 1.71㎢에 가구수가 84호에 인구는 224명이다.
자연 마을명으로는 방골, 시강, 안동, 옹점리, 안곡리 등이 있다.

안서리(安西里)

남쪽으로는 서천군 문산면(文山面)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옥산 저수지 아래쪽 반경에 이르기까지 관할하며 옥산면의 행정적 각 기관이 자리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초기 홍산현 하서면, 조선 태종때 조선말기 홍산군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해주최씨가 1600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설촌한 뒤 하서면 지역으로 안곡리 서쪽이 되므로 안서리라 하였는데, 1914년 군폐합시에 안서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8년에 수암리(秀岩里)에 있던 면사무소가 안서리로 옮겨와 면소재지 마을이 형성되었다.
안서리들을 안섯들이라고 부르고 이들에 짐한톳이라고 부르는 논이 있다. 옛날 흉년이 들었던 해에 김 한톳과 바꾼 논이라 김 한톳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짐 한톳으로 변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리의 면적은 1.21㎢이며 가구수는 69호에 인구는 197명이다.
자연 마을로는 새로된 마을로서 학교가 섰으므로 교촌(校村), 또는 새탕이라하며,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안동리(安東里)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내대리(內垈里)

백제 때는 대산현, 신라 고려 때도 그쪽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하서면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홍산군 하서면 지역으로 차대리(車垈里), 내동(內洞) 소안동(巢安洞)을 병합하여 내동과 차대의 이름을 따서 내대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50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인동장씨, 한양조씨, 김해김씨 등이 개척한 뒤 소안동과 차동을 분리하고, 차씨가 살았다 하여 차대리, 안에 있는 동네라 하여 내동, 기러기가 날아와 새 집을 많이 지었다 하여 소안동으로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소안동은 소안동(小安洞)으로 전음(轉音)되어 현재에 통용되고 있다.
리의 면적은 2.61㎢이며 가구수는 90호에 인구는 268명이다.
자연 마을로는 안굴, 소안동, 차대리 등이 있다.

가덕리(加德里)

조선시대 홍산현 하서면 지역으로 한산이씨, 경주김씨, 진주장씨, 전주이씨 등이 설촌한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이곳이 갈대만 무성하고 황폐하여 갈때기 또는 가덕이라 칭하였고, 그 뒤 노덕(蘆德)이라 부르다 1914년 군폐합시 남면의 선서리(船西里) 일부를 병합하여 가덕리라 하고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하였다.
특히 부개촌(富開村) 마을은 일제 때 형성된 마을로 그 전에는 사람이 별로 거주하지 않고 솔밭만 많이 우거져 청재[靑峙]라 일컬었으며 1930년대 일본인 도미나가 고우츄[富永光中]가 거주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고용하여 개간에 참여할 때에 앞으로 부를 알리기 위해서 개간하는 마을이라 지칭하여 부개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마을이다.
또한 마을의 형태가 가늘다 하여 세동(細洞)이라 칭하였고, 앞산이 소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오양골, 전쟁시 이곳에 군사들이 진을 쳤다 하여 진등(陣燈)이라 하는 마을들이 있다.
가덕리 면적은 3.37㎢이며 가구수는 140호에 인구는 348명이다.

수암리(秀岩里)

본래 홍산군 상서면의 지역으로서 증암리(甑岩里)와 석우리(石隅里)에 원곡리(院谷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수암리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연안이씨, 청주한씨, 여산송씨 등이 유입되어 개척하면서부터 시루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증암(甑岩)이라 했다. 1958년까지 면사무소가 있다가 안서리로 옮겨갔으며 또한 돌모루는 남평문씨, 연안이씨 등이 1720년경에 개촌한 뒤 마을어귀에 큰 바위가 있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은 반드시 이 바위를 돌아서 온다 하여 돌모루로 칭하였으며 홍산면과 면계를 이룬다.
리의 면적은 1.79㎢에 가구수는 81호에 인구는 194명이며 자연 마을명은 돌모루, 시루바위, 좌곡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