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우리나라에는 좌파, 우파 없어요 자유민주주의 지키는 사람과 적화통일 원하는 사람뿐"
"하루 100통의 편지 받아… 외롭지 않습니다"
"李 대통령, 국정에 대한 소신 없고 주변에 인의 장막 너무 심해 세상과 소통할 통로 없어"
"자전거 탈 시간 모내기 할 시간 있으면 쓴소리도 들어야지요 이게 뭡니까"
"친노 '정치적 타살' 주장에 또 하나의 다른 정부라 느껴"
"아파트·도로 만들던 사람이 독재할 감이나 되나"
'태평양시대 위원회'는 설렁탕 집 2층에 있었다. 성경 몇 권과 피아노, 100명 정도가 앉을 공간 끝에 서재가 보였다. 책꽂이에 브리태니커 사전, 이조(李朝)당쟁사, 화엄경 강해 같은 낡은 책이 있었다. 잘 정돈된 책상에는 가족사진과 읽다 만 편지가 놓여 있었다.김동길(金東吉)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때 대권후보로 거론됐었다. 그랬던 그였기에 침침한 사무실 분위기며 위치가 설렁탕 국물에 뜬 고명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정력적이었다. 사람을 끄는 마력(魔力)도 여전했다. 세월은 그의 머리 색을 바꿨을 뿐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군인(軍人) 출신 대통령들에게 쓴소리를 했다. 지역맹주로 서슬 퍼렇던 3김(金)을 향해서는 "낚시나 떠나라"고 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일갈한 "이게 뭡니까"는 지금도 패러디 대상으로 꼽힌다. 그는 정계에 투신해 스스로 인정하듯 '실패한 정치인'도 돼봤다.
21년 전 그를 경기도 양평 언론연수원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말했다. "만날 뿌리 뽑자~뿌리 뽑자 하는 데 뿌리 뽑혔습니까? 그래서 저는 잎사구나 뜯자~잎사구나 뜯자라고 해요." 그에게 '뿌리를 뽑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의 2시간 반짜리 열강이 시작됐다.
- ▲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세월은 없었다. 그는 인터뷰를 하다 답답했는지 "내가 다 말하고 나중에 보충 질문을 하라"며 강의를 할 태세였다. 그의 '강의' 도중 계속 질문을 던지느라 진땀이 났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저 같은 노인들이 이 대통령 당선에 얼마간 힘쓴 건 사실이지요. 제가 대통령은 못 됐지만 만일 됐더라면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걸 씁니다."
―글을 시작한 게 2008년 5월 1일입니다. 글이 꽤 짧던데 몇 시에 집필합니까.
"글은 전부터 써왔던 거지만 이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후 포맷만 바꾼 겁니다. 원고지 석장 정도고요, 많을 때 여섯 장까지 써요. 노인들은 잠이 없잖아요. 아침 6시쯤 글을 씁니다. 이 사무실에서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 '목요(木曜)강좌'를 했어요. 5년간 정확히 60번을 했습니다. 그 뒤 세계사 강의를 했고 한국사 강의도 했지요.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미국 동포에게 방송도 합니다."
―'라디오 코리아'면 '그건 너'를 부른 가수 이장희가 운영했던?
"맞아요. 오늘 새벽에도 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토·일요일만 빼고 매일 10분씩 '김동길 칼럼'이란 제목으로 하지요"
―매일 대통령에게 글을 쓰는 데 반응은 있나요?
"있긴 뭐가 있어요. 오죽하면 제가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라는 제목의 글까지 썼겠어요. '경제풍월'이란 잡지 하는 배병휴씨를 포함해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대통령 만난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명도 없대요. 참 별난 사람이에요."
―정권 출범 후 휘청거리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일간지 칼럼에서 현 정권을 '유리 턱 정권'으로 비유했더군요.
"정권 인수 때부터 잘못됐어요. 거 무슨 여자 위원장 있잖아요, 그 사람 정권 인수를 한 게 아니고 제 철학을 뽐내더군요. '영어교육 다시 하자'고 했지요? 그럴 수 있는데, 왜 그 대목에서 '오��지'가 나옵니까? 그게 뭡니까.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을 망쳐놓은 거예요."
―'오뤤지'가 망쳤다는 이야기입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일할 사람들 감정은 상하지 않게 해야지요. 약만 잔뜩 올렸잖아요. 그걸 보고 이 대통령이 정치력이 없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정권 인수 후 '강부자 내각(內閣)' 파동에 휘말렸지요.
"대통령이 만만한 사람, 자기 말만 잘 듣는 사람에 둘러싸여 있어요. 세상과 소통할 통로가 없어요. 우리처럼 욕먹으면서 악쓰는 사람들, 그거 개인이 하기가 쉬운 게 아닌데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지난해에는 광우병 파동으로 석 달이나 갈피를 못 잡았습니다.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에서 광화문 촛불 내려다보며 '아침이슬'이란 노래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지요. 그 얘기 듣고 기가 막혔어요. 촛불 보고 가슴이 뭉클할 게 아니고 '그 배후에 반미친북(反美親北) 세력이 있구나, 간첩이 마음대로 날뛰고 있구나'하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광우병 파동을 일으킨 세력이 반미라는 증거는 있나요?
"중국 소를 두고 광우병 이야기 나왔으면 그렇게 됐겠어요? 제가 반미친북, 간첩 이야기 하면 '증거 대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왜 내가 댑니까? 국정원이 대야지."
김 명예교수는 "현 정권이 살려면 자유민주진영을 끌어와야 한다"고 했다. 정체 모호한 '좌우'개념이 아니라 자유민주 대 반미종북(反美從北)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내정(內政)과 관련된 전권을 주고 이회창(李會昌) 선진당 총재도 끌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정치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공부를 했기 때문"이라며 "정치의 본질이 뭔가를 봤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통령이 국정에 대한 소신이 없고 주변에 쳐진 인의 장막이 너무 심하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요.
"대운하(大運河)계획에 서울대 교수들이 반대했잖아요. 그 말이 나오자 대통령이 금세 접었잖아요. 그걸 보고 그쪽 사람들이 '아! 저게 약점이구나. 이명박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느낀 거예요. 대선 때 공약을 공청회 한번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겁니까. 게다가 방송은 또 뭡니까."
―이 정부가 방송의 힘을 빌리기는커녕 당하고만 있지 않습니까.
"KBS가 공영(公營)이면 공공(公共)을 위해 일하는 정부가 도움이라도 받아야지요. 정연주 한 명 내쫓는 데 진땀을 흘렸잖아요. 그게 뭡니까."
―용산 철거민 사고 후 '서민 괴롭히는 정권'이라는 비판까지 추가됐지요.
"정부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배후가 누군가를 캐야지요. 그런 걸 안 하고 경찰관까지 희생된 일에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만 잘랐어요. 누가 정부를 위해 일하겠습니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제가 하도 안돼 보여서 그 사람을 집으로 불러서 점심을 냈어요. 본인은 '대통령이 사표 내라고 한 건 아니다'라고 했지만 청와대에서 '김석기 죽여 일단락 짓자'는 의견이 나왔겠지요. 대통령은 그때 '김석기 자르는 건 안 돼. 당신이 왜 책임지느냐'고 했어야지요. 도의적 책임이라면 왜 용산구청장이나 관계 장관이나 대통령은 안 집니까?"
―왜 자꾸 그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박근혜와도 그래요. 대통령 된 후 제일 처음 만나 '모든 걸 맡아주세요. 내가 대통령이니까 외교, 국방하고 실물 경제에 식견이 조금 있으니 그것만 맡을게요'라고 했어야지요. 이회창씨도 찾아갔어야지요. '한나라당으로 돌아와 주세요'라고 호소해야지요."
―그런 결단을 왜 못 내렸을까요.
"박근혜 들어오면 손해 볼 놈이 여럿 있겠지요. 대통령이 자전거 탈 시간, 모내기 할 시간 있으면 만나서 쓴소리도 들어야지요. 그게 뭡니까."
-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제 현 정권의 실체가 궁금하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헌법에 나오는 민주공화국, 주권재민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어야지요. 그걸 못하니 소신 없는 정체불명의 정권이 된 거지요."
―과거 정권과 각을 세워야 했다는 말인가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평등에 치중하겠다는 인상을 줬잖아요. 물론 말은 안 돼요. 김대중씨는 상당한 재산가고 노무현씨는 '가진 자에게 고통 주겠다'고 했는데 그건 김정일(金正日)이 할 말이니까요. 지금이 무슨 사회주의 혁명 전야예요? 가진 자에게 고통을 주게."
김 명예교수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쉬고 있지는 않았다. 글을 썼으며 전국을 돌며 강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일약 주목을 받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일련의 발언들 때문이다. 현 정권 지지자는 그에게서 모처럼 자유주의의 자신감을 봤고 반대파는 그를 노망(老妄)났다고 매도했다.
―4월 15일 글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스스로 감옥에 가든지 자살하라'고 했습니다.
"그 글 때문에 어찌나 난리들인지. 저보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얘기도 듣고 '망령 났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제가 여든두 살밖에 안 되는데 무슨 망령입니까? 저는 지금도 시(詩) 300수(首)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울 수 있어요."
―댓글은 왜 차단했습니까. 남을 비판하면서 비판받기는 싫은가요?
"댓글 차단은 최근에 한 겁니다. 하루에 십만 명씩 들어오니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거예요. 다른 이들도 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지요."
―왜 '자살'이라는 단어를 쓴 겁니까.
"4월인가 그가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그가 선택할 길이 그것밖에 없어 보였어요. 혼자서 깨끗한 척 다 했잖아요."
―자살을 권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저는 자살을 권장한 게 아닙니다. 의젓하게 구속되고 감옥에서 10년 살라면 10년 살고, 그런 인물이 되란 뜻이었어요. 그의 말 때문에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자살했고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자살했잖아요. 우리가 대학입시에 실패해 아파트에서 자살하는 학생들 얼마나 야단쳐요. 그런데 어른 중의 어른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여준 게 뭡니까. 자살이라니요, 끝까지 살아야지요."
―그래도 뭔가 느낌이 있어 그 단어를 선택한 건가요.
"법을 공부했잖아요. 검찰 조사받으며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자살 전날 TV에서 얼굴을 봤는데 초췌하고 소심해 보이더군요. 저는 그때도 '버티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던 날 놀랐습니까?
"우리 국민 중에 제일 놀라지 않은 사람이 납니다. 저는 '아! 그 길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맨 먼저 났어요."
―그 일로 얼마 전 임채진 전 검찰총장이 물러났지요.
"그 사람도 웃겨요. 나가면 곱게 나가지. 검찰도 그게 뭡니까. 혐의자가 죽었으면 가만히 있어도 조사 다 끝난 거 아닌가요? 왜 '수사를 종결하겠다'고 먼저 말합니까. 검사들만 못 할 짓 한 사람들처럼 됐잖아요."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위해서라도 '자살'이니 '사망'이니 하는 말보다 '서거(逝去)'라는 말을 쓰지 그랬습니까.
"지각(知覺) 있는 정부라면 자살한 사람에게 국민장을 허용할 수 없지요. 국민교육, 국민정서상으로도 잘못된 겁니다. 가족들에게 가족장을 권했어야지요. 그건 제 신념입니다."
―그래도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통곡까지 했잖아요.
"그 사람 진짜 웃기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나이도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이 죽었는데 가서 통곡하면 못써요. 김대중씨는 자기 아들이 죽었나요? 공자(孔子)도 제자 안회(顔回)의 장례식에 갔지만 통곡하지는 않았어요."
―친노 진영에서는 '정치적 타살(他殺)'이라고 주장하지요.
"누릴 수 있는 영화 다 누리고 저승 가는 길까지 선택했어요. 그런 사람 성자(聖者)로 만드는 게 우리나라입니다. 정부도 그래요. 대통령 이하 당당하게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가 죽도록 한 건 아니다' 이렇게 나갔어야지요. 그냥 쩔쩔매고 한심해서. 저는 그걸 보고 깨달았어요."
―뭘 깨달았습니까.
"대통령은 새로 뽑았지만 정권교체는 못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에 정부 뒤에 또 하나의 정부가 살아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지금 정부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일 잘하는 정부지요."
―자발적인 추모자를 욕되게 하는 건 아닐까요.
"자발적 참여도 어느 정도지요. 김수환 추기경 때와 차이가 나잖아요. 저는 노란 모자, 노란 풍선 그렇게 재빨리 만드는 거 보고 놀랐어요."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대학교수들도 시국성명을 내고 있습니다.
" 그 사람들 이 대통령 타도 위해서 나온 거 아닙니까. 국민 다수가 선거로 뽑은 대통령을 왜 강압적으로 밀어내려 합니까?"
―이 대통령이 독재를 한다는 소리도 나옵니다.
"아파트나 짓고 도로공사나 하던 사람이 무슨 독잽니까. 독재할 감도 못돼요."
―오래전에 링컨 대통령에 관한 책을 썼지요? 노 전 대통령도 링컨을 가장 존경한다는데.
"링컨은 남북전쟁 후 '아무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풀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이는 어떻게 했어요. 모든 걸 코드로 풀려고 했잖아요. 링컨의 별명이 뭡니까. '어니스트 에이브(Honest Abe)'였어요. 그 사람이 정직합니까? 링컨을 존경하지만 말고 좀 닮으라고 하고 싶었어요."
―노 전 대통령이 좌파 맞습니까.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일 웃긴 게 보수, 진보라는 구분법입니다. 보수는 뭘 지켜서 보숩니까? 대학교수 중에 미국 유학 다녀와서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사람들이 '6·25 때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고 맥아더 장군이 없었으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고 해요.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교수들 보고 저는 '그때 통일됐으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유학은 고사하고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줘요. 노무현씨가 이런 말을 했지요. 일본에도 공산당이 있다, 웃기는 이야깁니다. 일본에 휴전선이 있습니까, 공산당이 남침을 엿봅니까? 우리나라에는 좌파, 우파 없어요. 자유민주주의 지키는 사람과 적화통일 원하는 사람뿐입니다."
김 명예교수가 노 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한 글이 퍼지면서 친노 매체에 '김동길은 실패한 정치인'이란 기사가 등장했다. 그는 '실패한 정치인 맞느냐'는 질문에 의외로 선선히 "실패한 정치인이 맞다"고 했다. 그는 정치에 뛰어든 걸 후회하지 않는 이유를 '공부 값'이라고 했다.
―홈페이지 첫 번째 글이 1992년 대선 당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려다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한 내용입니다. 당시 '돈을 받고 양보했다'는 등의 루머가 있었지요.
"어느 날 정 회장이 저보고 장가를 가래요. '김 교수도 이제 장가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해야지. 결혼하면 내가 100억원 줄게'라는 거예요. 제가 그랬지요. '제가 왜 결혼을 합니까? 결혼 안 해요'라고요. 그때 돈 받았으면 제가 이럴 수 있겠어요?"
―원래 여자를 싫어합니까?
"남자와 여자는 서로 좋아하는 게 정상이지요.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거는 질색이지만요."
―평생 좋아했던 여자가 있기는 한 겁니까.
"좋아하는 여자가 왜 없었겠습니까만 누구와 가까웠다고 하는 건 자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한마디로 '투 폴 인 러브(To Fall in Love)'여야 하는 데 그건 헤어나지 못하는 숙명적인 거거든요."
―그럼 사랑은 해봤는데 항상 헤어나왔나요.
"저도 결혼했으면 처자식 먹고살도록 돈을 벌었겠지요. 여자에게 충성도 했을 거고요. 대신 내 자유는 제한됐을 겁니다."
―고(故) 정 회장이 애초에 대권 후보 맡길 생각이 없었던 겁니까,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입니까.
"처음에는 아니었지요. 저보고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이 약진(躍進)을 했잖아요. 그걸 보고 슬그머니 딴 마음이 든 거지요."
―어떻게 접근하던가요.
"처음에는 저와 의형제를 맺자며 문서까지 가져왔어요. 나는 정 회장이 의리가 없어 보여 서명하지 않았지요. 나중에 그가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으니 이번에 해보자. 당신은 나중에도 기회가 있지 않으냐'고 했어요. 그때 저는 할 말이 별로 없었어요. 내가 내 입으로 대통령 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정 회장이 대통령 해보라며 끌어낸 거니까요."
―정 회장은 자기가 대통령이 될 걸로 믿었습니까?
"정 회장은 당시 민자당으로 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못 받을 걸로 봤어요. 그래서 YS를 찾아가 '당을 만들 테니 오세요'라고 한 겁니다. 그 말에 YS가 '내가 후보 안되면 노태우 목덜미를 물고 늘어질 겁니다'라고 했답니다. 노씨의 비행(非行)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YS는 정치판의 귀재(鬼才)예요. 그런데도 정 회장은 당을 만들었어요."
―대통령에 당선된 뒤 YS가 탄압을 했겠군요.
"당선 일성이 국민당을 향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당'이라는 거였어요. 그 소리를 듣고 정 회장이 다운(down)됐어요. 현대그룹 전체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감지한 거지요."
―그래서 정 회장이 DJ(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기댄 겁니까?
"정 회장이 북한에 1차로 500마리, 2차로 501마리 소를 끌고 가고, 금강산 관광한 것은 통일이라는 큰 꿈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현대가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죠. 김정일에게 돈 퍼주는 버릇은 그때부터 생긴 겁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요.
"김정일은 돈을 원했고 DJ는 노벨 평화상을 원한 거지요. 저는 맨투맨 작전으로 받은 노벨 평화상이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테레사 수녀처럼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을 전했을 때 '왜 내가 받아요'라고 말할 정도의 분들이 받아야지요. 공작(工作)해서 받으면 뭐해요. 우리가 먼저 북으로 간 것도 잘못됐어요."
―먼저 손을 내미는 건 괜찮지 않은가요?
"우리가 형이고 북한이 동생뻘이면 김정일이 먼저 왔어야지요. 나이도 많은 사람(DJ)이 양복은 새로 해 입었는지 단정하게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렸을 때 김정일 차림이 그게 뭡니까. 돌아와서는 또 김정일보고 '식견 있는 믿을만한 지도자'라고 거짓말했잖아요. 김정일이가 답방한다고 했지만 왔습니까? 그때 왔으면 저는 DJ보고 '당신도 남대문 시장에 가서 김정일이 점퍼 비슷한 거 하나 사 입으라'고 했을 거예요."
―이 모든 게 정치에 입문한 후 배운 것들인 모양입니다만, 김 교수 자신도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지 않았습니까? 나중에는 자민련까지 갔지요.
"국민당이 망가지면서 합당하느라 그리된 거예요. 김종필씨가 저 자민련에 잡으려고 전국구 준다고도 했지만 저는 정계 은퇴했어요."
―이렇게 거침없이 이야기하다 보면 겁이 날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나이 들어서 요 깔고 병들어 죽는 게 제일 싫어요."
―혹시 누가 김 교수께 '낚시나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3김은 정치를 했고 저는 글 쓰는 데 왜 낚시를 갑니까? 저는 지금도 전국으로 강연 다니고 하루에 100통씩 편지를 받아요. 그 중 90%가 제게 찬성하는 분들입니다. 저 외롭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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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재향군인회와 성우회 등 보수단체 주최로 열린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 1000만명 서명보고대회에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단상에 올라 열변을 토하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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