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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행운)]/남는얘기

[불상 감상법]백제불상의 특징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08. 9. 30.

 

백제불상의 특징

384년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며 불상의 양식은 남조의 양식과 고구려를 통하여 북위양식을 받아들였다.  온화하면서 선율이 부드럽고 세련된 백제 특유의 미술은 활발하고 강한 기세의 고구려의 미술과 경직되고 어눌한 신라의 미술과는 다른 것이다. 특히, 불상의 미소는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생명의 미소로 평가받고 있으며 금동불과 마애불이 유행한다.  산경문전과 사택지적당탑비·금동용봉향로 등을 통하여 도교도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고구려와는 달리 도교와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할 때까지 발전하게 된다.  백제의 우수한 조각 기술은 신라와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실제로 일본의 많은 조각 유물들은 백제의 조각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남아 있는 불상들을 통하여 그 특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본존불과 협시불을 각각 독립적으로 배치한다.
·풍만하고 복스런 얼굴에 순결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정적이다.
·과감한 생략과 변형으로 현대조각을 보는 듯하다.
·상장형(牀帳形) 천개로 장엄한다.
·봉지보주관음상이 유행한다
.

고구려불상의 특징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 북위의 양식을 반영한 불상이 조성되었음을 남아 있는 유물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유적과 사료들을 통하 여 7세기 이후 도교와 경쟁하기 전까지 국교적 위치를 누리며 발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불상 조성 또한 그에 걸맞은 수준의 조형미를 갖추었을 것이다. 와당이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의 미술은 힘과 동감이 넘치고 정열적인 미감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몇 구의 불상을 통하여 그 특성을 살펴보자.
·강한 기세와 예각이 있으며 옷주름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점점 더 퍼지게 만들었다.
·광배의 무늬에 추상화된 불꽃무늬가 있다.
·선각에 의한 것이 아닌, 힘으로 충만된 양감과 약동감을 보여준다.
·동적인 상현좌와 둥글고 높은 육계를 가졌다.

통일신라불상의 특징

통일 초기에는 삼국의 양식이 혼합되어 나타나다가 성덕왕(702∼737) 이후 정치·군사적 안정을 이루면서 성당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서역·인도·페르시아 문화까지 수용하여 국제적인 문화를 건설하게 된다.  철학적 체계를 갖춘 불교에서 사회적 합의점을 추구하였던 신라는 경주를 비롯하여 각지에 많은 사찰을 건설하였으며 불상과 탑을 남기게 된다.  불상 중에서도 아미타불과 미륵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불상들의 조각경향은 사실주의 경향이 현저하며 화려한 장신구를 갖춘 볼록한 가슴의 풍만한 체구·잘록한 허리·삼곡 자세로 비튼 모습의 감각적인 불상에서 당당한 체구·품격 있는 상호 등을 갖춘 이상형의 불상으로, 이상형의 불상에서 생동감과 품격이 현저히 떨어져 인간적인 모습을 한 불상으로 변한다.  꽃이 활짝 핀 다음에는 지듯이, 혜공왕(765∼780) 이후 절대왕권이 약해지고 구귀족들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중앙 정부의 지배질서는 혼란을 겪고, 지방세력의 지원아래 새로운 사상인 선종이 널리 퍼지게 된다.   불상 조각은 인체 파악의 소홀과 비례의 불균형·섬세한 듯하나 형식화한 옷주름 등에서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나 불상의 조형미는 떨어지나 광배·대좌의 조각은 훨씬 정교해지고 생명감을 띤다.  그리고 동(銅)의 부족으로 선종사찰을 중심으로 많은 철불이 조성되며 대작의 비로자나불이 남아 있다.  비교적 많은 수의 불상이 남아 있으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육계는 작아지고 소라머리가 많아진다.
·목에 삼도가 나타나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정 근엄한 모습이 된다.
·우견편단이 많아지며, 옷주름은 좌우대칭에서 자유로워진다.
· 상현좌의 형식이 사라지고 옷주름은 대좌 위로 올라가서 대좌가 완전히 노출되며 대좌는 8각으로 복련의 하대석, 팔각의 중대석, 앙련의 상대석으로 구성된다.
·통인이 사라지고 부처의 명호에 따라 수인이 달라진다.
·보살은 정면 직립에서 자유로운 3곡 자세를 취하며 관능적이다.
·보살상 천의의 X형 교차가 없어지고, 장신구가 화려해진다.
·배면조각이 생략된 정면 위주의 조각이다.

고려시대불상의 특징

고려는 삼국시대와 같이 불교를 국가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여 불교 문화가 융성하며 불상의 제작도 활발하다. 귀족문화와 개인 차원의 기복불교의 흥성으로 도자기·나전칠기·금속 장신구류 같은 공예미술이 발달하나 불상·탑·범종 같은 규모가 큰 조형물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이전 시대에 비하여 예술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이상적 신체 묘사에서 차츰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띤다.  불상의 재료로는 금동·철·목재·석재·소조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으나, 석조가 가장 많으며 금동은 감소한다. 특히 철불은 몸체에 명문이 있어 조성 시기 등을 알 수 있다.   법화사상과 밀교의 영향으로 항마촉인의 석가여래상과 지권인의 비로자나여래상이 주로 조성되며 불·보살상뿐만 아니라, 시왕(十王)과 같은 새로운 불교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입체감이 둔화되고 신체비례를 무시한 매우 큰 석불과 많은 마애불이 조성되는데, 거대한 바위에 신체의 표현을 소홀히 하면서 머리 부분만 별도로 조각한 '파주 용미리 마애미륵불'과 의자에 앉아 있는 '법주사 여래의상'이 특이하다.  1230년 몽고 침입 이후, 원 나라 간섭기(14세기)에는 화려한 영락장식과 여성성을 강조한 라마 불상 양식이 도입되어 풍만한 상호와 단순하면서도 부드러운 옷주름· 정교한 금구장식(金具裝飾)을 한 불상이 조성된다. 또한 고려말에는 라마양식과는 다른 늘씬한 상체와 비교적 세련되고 온화한 상호(얼굴)의 불상이 조성된다.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인체의 비례가 매우 불균형하다.
·불상의 상호를 비롯하여 신체가 이상적 균형미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조형된다.
·상호에 미소가 나타나지만, 염화시중의 탈속의 미소가 아닌 처연한 비장미의 미소를 띤다.
·원나라의 영향으로 화려한 장식과 관능적인 보살상이 조성된다.

요점정리

불상의 전래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고구려는 372년)로서, 현존하는 삼국시대 초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서울 근교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이다.

   이것은 중국의 북위 초인 5세기 초나 중엽의 불상양식과 유사하여 중국에서 전해져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의 모습을 한 불좌상은 한국에서 제작된 불상 중 가장 초기의 형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원오리 폐사지의 소조 불좌상과 옛 백제의 도읍인 부여의 규암면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등이 있다.

신라에서도 불교가 공인된 이후 6세기 후반에는 대규모의 불상조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되는데, 566년(진흥왕 5) 완성된 거대한 절 황룡사의 절터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륙의 금동삼존불상의 커다란 석조대좌가 남아 있다.

6세기 후반의 삼국시대 불상 중에는 삼존형식이 많으며,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과 황해도 곡산 출토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 등은 명문이 포함되어 있다. 표현양식은 중국의 북위 말기 및 동위시대의 조각양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세부표현이나 광배의 화염문양, 연화대좌의 표현양식은 중국의 불상들보다 단순화되었고 세부 묘사가 생략된 투박한 기법을 보인다.

석조불상으로서 환조는 별로 없으며, 대부분 암벽에 부조로 표현된 조각이 많다. 그 중 옛 백제지역인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의 태안마애삼존불(보물 제432호),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등이 삼국시대의 대표적 보살상 형식이다.

또한 반가사유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서산마애삼존불의 좌측 협시, 경주 근교의 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불상군 중 반가사유보살상, 고구려의 금동미륵반가상(국보 제118호) 등이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중엽에는 법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지며, 상의측면·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어 입체조각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7세기의 석불상으로는 경주배리석불입상(보물 제63호)·경주남산삼화령석조삼존불상 등이, 금동불상으로는 백제 규암리사지의 금동보살입상 2구, 경상북도 선산(善山) 출토의 금동보살입상 2구(국보 제183호·제184호) 등의 관음상이 대표적이다. 삼국시대 말기 보살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의 불상양식의 영향이 반영된 조형적 특징들이 나타난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불상양식의 시대구분은 통일초∼680년의 보수적 경향이 짙은 전대의 양식계승 및 새로운 요소의 모색기, 680년∼8세기 전반의 중국 당나라 양식의 수용 및 이상적 불상형의 완성기, 750년 무렵 이후의 불상양식의 토착화와 쇠퇴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불상표현형식을 보면 대체로 입상에는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通印)을 보여주는 불상이 많고 약함을 든 경우도 많다.

법의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경주 구황리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같이 통견으로, 주름이 가슴 앞으로 여러 겹의 U자형 곡선을 형성하면서 늘어져 있다.

또 다른 형식은 경상북도 선산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이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과 같이 통견의 법의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내려오다 허리 밑에서 양 다리 위로 Y자형으로 갈라져서 각기 U자형 주름을 형성하면서 좌우대칭을 이룬다. 자세는 대부분 결가부좌의 좌상이며 수인은 7세기 말부터 나타난 불상 중에는 촉지인의 예가 많다. 경상북도 군위 팔공산에 있는 군위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의 본존불,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보물 제200호)의 본존상, 석굴암의 본존불상 등이 대표적 예이다.

보살상은 삼국시대 말기의 양식에서 좀더 화려한 달개장식을 하고, 자연스러우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한 동적인 자세로 변화하며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이 대표적 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조각 중 가장 우수하며 대표적 예는 석굴암의 조상들이라 할 수 있으며, 개개의 조상 표현의 조각기술의 세련도, 상의 알맞은 비례, 부드러운 조형성 위에 불상 전체에 흐르는 숭고한 종교성이 조화되어 있다. 8세기 말∼9세기 무렵에 이르면 금동상이 많이 줄어들고 석조상이나 철불상이 많이 등장한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지방에 따라 몇 가지 특징있는 불상군이 제작되었는데 그 중 강원도 강릉 주변의 월정사·한송사지·신복사지의 석조나 대리석 보살상들은 신라말기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중국의 송·요시대의 불상양식이 반영된 듯한 풍만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또한 충청남도·전라북도 지역에 많이 보이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같이 민간신앙과 밀착된 토착적 또는 지방색이 강한 불상형태가 많이 보이며, 후기에는 원나라와의 관계에 따라 티베트·네팔 계통의 요소도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표현의 창의성과 제작기술에서도 퇴보를 가져왔다. 대체로 불신에 비해 머리부분이 크고 신체의 묘사도 형식적이며 조각기법도 뒤떨어져 투박한 조형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