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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행운)]/남는얘기

[불상 감상법]중국불상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08. 9. 30.

 

중국불상

우리나라에 이러한 양식의 불상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호십육국시대의 불상으로 간다라 양식과 마투라 양식이 섞여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이단으로 높게 빚은 머리로 육계(부처님의 머리는 이단으로 표현하였는데 윗머리를 말한다.  그리고 머리와 육계의 사이에 구슬을 장식한 것이 있는데 계주라 부른다.)를 표현하였다.  옷은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완만한 V자형의 주름이 바닥까지 내려왔으며, 납작한 주름이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의 옷주름을 보는 것 같다.  하체가 빈약하고 선정인의 손이 과장되게 크다.  대좌의 형식은 좌우와 위 모서리에 직선의 테두리만 한 민무늬 사각형이나, 앞면 양쪽에 사자를 조각하는 경우도 있다.

북위양식의 불상으로 머리 위에 보개가 있으며 광배에는 화불과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민머리에 둥근 사발을 엎어놓은 듯 솟아 있다. 용포 형식의 포복의를 입고 있으며, 옷 끝이 날카롭고 좌우 대칭적인 옷자락과 종교적 긴장감이 충만한 길쭉한 신체와 얼굴 등 북위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요점정리

후한:58-75년,불교도입.

서진:265-316,불교교단성립,불상조성 시작

5호16국:316-386,굽타양식모방의 시대,선정인좌상,통인의여래입상

북위:386-534,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수용,석굴사원건설,불상이 온화하고 얼굴이 둥글고 엄숙해지며,체구는 원통형.운강석굴(마투라계통),용문석굴(왕즉불사상,북위양식성립),석굴암이 대표적이다.

:581-619,신의 초월적 모습.상체가 짧고 하체가 가늘고 길다.가사주름이 도식화.융기가 날카롭다.신의 초월적 모습 표현.

:618-907,굽타의 이상적 양식 받아들여,사실적인 균형미 있는 불상등장.중국인의 얼굴을 닮으며8c 후반부터는 밀교의 영향으로 세속화 된다.

고신라불상

지리적 조건과 정치 집단의 배타적 경향으로 불교가 가장 늦게 공인(528년)됨에 6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불교상이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공인 후에는 지배계급의 적극적 수용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흥륜사·황룡사 등 큰절이 많이 세워졌다.  삼국의 치열한 주도권 싸움에서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을 내세에서 보상받으려는 듯 미륵불을 중심으로 금동불과 석불이 조성된다.  석불은 고신라 말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경주 남산은 불교미술의 야외 전시장이라 할 만큼 수많은 불상과 마애불·석탑이 조성되어 있으며 모두 뛰어난 명품들이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경직된 선과 투박한 양감을 준다.
·둔중하고 세련되지 못하다.
·신체의 표현이 왜곡 과장되어 추상적이다.

 

신라는 여러 사정으로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였다. 물론 눌지왕 때 불교가 전래되었다가 소지왕 때의 탄압으로 일거에 소멸되었던 것이 527년 (법흥왕 14)에 정식으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공인으로 불교는 급속히 신라사회에 전파되었다. 불교가 급속하게 팽창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상조각을 대대적으로 조성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신라의 불상조각은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게 조성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고구려양식의 불상 내지 백제양식에 가까운 불상을 만들었지만, 10∼20년 뒤에는 신라 자체의 작품을 일본에 수출할 만큼 격조 높은 신라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신라의 조각 수준은 급속히 신장하여서 600년 전후부터는 고구려나 백제를 한걸음 앞질러 간 느낌이 짙다.

이러한 신라의 불상조각은 대개 3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1기

 이 시기는 불교공인 직후인 527년부터 6세기 중엽까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당시의 고구려나 백제조각과 마찬가지로 중국 북위양식을 받아 조성된 매우 역강한 추상조각양식의 불상이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시기 불상의 대표작은 535년에 착공되어 544년(진흥왕 4)에 완성을 본 흥륜사(興輪寺)의 불상들이다. 흥륜사불상은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그 잔영은 황룡사(皇龍寺)출토 금동불입상에서 얼마간 찾아볼 수 있다.

2기

 6세기 중엽부터 말까지인데 진흥왕의 패기찬 활동시기로 불교의 성세와 함께 불상조각은 이제 완전히 신라화되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574년에 황룡사의 거대한 장륙상(丈六像)을 일거에 주조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나 579년에 왜국(倭國)에 불상을 보냈다는 데서도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조각의 특징은 초기에는 중국 동위·서위 양식의영향을 받아 역강한 추상조각을 다소 완화시켜 세련되고 귀족적인 이상주의적 불상양식을 만들어내다가, 후기에는 북제·북주의 영향도 있고 하여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당대의 대표적인 걸작품은 금동장륙존상(金銅丈六尊像)이지만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고 후기 작품으로 거창출토 금동보살입상 등이 있다.

3기

7세기 전반기의 이 시기는 삼국간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된 삼국통일의 전단계로서 복잡다단한 시기이지만 선덕여왕 치세기간의 활발한 조형활동으로 걸작의 불상조각이 많이 조성된다. 이 시기의 특징은 초기에는 중국 북제·북주 내지 수나라초의 영향을 받은 추상표현주의적 작품이 유행하다가, 후기에는 중국 수나라말내지 당나라 초기의 영향을 받은 반사실양식(半寫實樣式)의 불상이 유행한 것이다. 이 시기 대표작으로는 선방사삼존불상(禪房寺三尊佛像)인 이른바 삼체석불(三體石佛)과 삼화령미륵세존(三花嶺彌勒世尊)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