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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행운)]/남는얘기

[불상 감상법](2) 후기(통일)신라시대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08. 9. 30.

 

(2) 후기(통일)신라시대

2) 통일신라 시대

통일기의 불상 - 권위적으로 앉아있는 부처님-사실적인 이상미

통일 이전의 선채로 다정하게 미소짓던 부처님의 모습은 통일이후 양식에 있어서 변화가 나타난다. 석굴암 본존불상이 보여주듯이 연화대좌에 높이 앉아서 권위에 찬 이상화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이는 전제 왕권을 확립한 통일기 신라의 왕권의 상징이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신앙이 유행했던 데 비해, 이 시기는 아미타사상이 유행하고, 금동불보다는 석불, 마애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8세기 중엽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통일 신라 불상의 형식적 완벽성은 곧 중앙 귀족의 이상미를대변하는 것이다. 석굴암 불상의 근엄한 자세와 원만한 인상은 인간(귀족)과 부처의 절묘한 합일을보여주는 조화로운 이상미의 극치인 것이다. 그것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당시 중앙 귀족들이 지녔을 현실에 대한 긍정과 자신들의 신분적 존엄성의 정당화이며, 안정희구의 염원이고, 공고히 다져가는 제도적 장치의 일환이라는 속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석굴암 본존불을 모범으로 하는 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고신라의 불교조각 전통 위에 새로이 수용되는 중국 당나라 및 인도, 서역과의 문화교류로 불교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불상조각도 신체비례에 균형이 잡히고 얼굴의 세부 표현이나 몸체의 양감 및 사실적인 옷주름 처리, 정교한 영락장식 등의 표현에서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유물들은 대부분 경주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8세기의 감산사지 출토 석조아미타불 및 미륵보살입상이나 석굴암 불상군 등에서는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에서 발달한 불상양식의 신라적인 수용과 변형에 따른 한국적 특징을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석굴암 불상군에 나타난 종교적인 숭고미와 완벽한 조각기술은 뛰어난 예술성의 극치이며 균형과 조화를 이룬 석굴 속에는 불, 보살, 천인, 나한들이 모여서 이상적인 불국토를 이루고 있다. 신라 후기에는 금동불이 적어지고 조각수법이 쇠퇴하는 대신 석굴암의 본존을 따르는 항마촉지인 불좌상 형식과 지권인(智卷印)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새로이 등장하여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까지 유행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이 많이 조각되나 불교사상의 변화에 따라 통일신라시대에는 비로사나불상과 아미타여래상이 많이 조성되어진다. 이 시대의 불상 양식은 다음과 같다.

이상세계를 향한 깊은 사색을 통한 사실적 조화미의 극치를 보임-불상에 대한 귀의의 감정과 자력적 불심이 조화를 이룸(자력적 의미와 타력적 의미의 조화)

반가상대신 비로사나불상과 아미타불이 많이 조성됨

 그러나 8세기부터는 이러한 원숙한 기법이 차츰 쇠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말기에 와서 불상의 기법이 퇴화하는 것은 불상숭배에 철저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선종 이 유행한 탓도 있으나 전반적인 불교쇠퇴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9세기에는 철불이 나타나는 사실도 특이하다.

신라 하대의 불상 - 새롭고 힘있는 부처의 출현-현실적인 개성미

신라 하대의 중앙 귀족 세력들의 통제력의 상실, 지방 호족 세력, 민중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하여, 불교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전제왕권을 옹호했던 교학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지방을 중심으로 참선(參禪)을 중시하는 선종(禪宗)이 성장하게 되었다. 교종의 인간의 성불에 대한 차별성에 비해 선종은 인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선종은 신라 후기 도당 승려인 도의를 통해서 수용되었다. 도의(道義)는 신라 하대 중앙 귀족들에게 교리를 설파하였으나 이들은 이를 마귀의 소리라고 도의를 비방하고 문화의 중심지인 경주로부터 그를 추방하였다.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하여 그곳의 호족세력들에게 선종의 가르침을 설파하였으며, 이들은 선종을 자신들의 위치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이 선종의 사찰들을 자신들의 재산 유지, 확대의 근거로 삼게 되면서 선종은 지방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렇게 선종 불교가 성장하게 되면서 왕실에서도 선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사상의 변화와 함께 불교 미술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중앙 귀족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성된 불상에서는 석굴암 본존불을 모범으로 하는 불상들이 여전히 만들어졌으나 본존불 같은 이상적인 아름다운 부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목을 잔뜩 빳빳하게 세우고 어설프게 권위적인 모습을 한 불상이나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트리방가를 하고 있는 요염하기까지한, 장식적이고 화려한 불상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바로 말기적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특권 귀족들의 모습이다.

지방 호족들이 세운 선종 사찰에는 호족들의 도전적이고 현실적이며 개성적인 성격을 닮은 불상들이 새로이 등장하게 된다. 장흥 보림사 비로자나불(858년 제작), 철원도피안사 비로자나불(865)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불상들이 보이는 미감은 통일기의 것과 매우 다른 것이다. 이제 부처님의 모습이란 알지 못할 미지의 세계에서 도래한 신성한 존재라기보다는 현세 속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현실미가 강조되고, 어떤 보편적인 질서를 대변하는 이상적인 관념미를 떠나 개성미로 대치된다. 중앙 귀족은 인간의 신분이란 제도적 장치 속에서 부여받은 기득권이라 생각해 왔으나, 지방 호족은 자신의 역량으로 일으킨 부와 힘에서 나온 것이라는 속뜻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개성적이고 도전적이며 현세적인 느낌의 불상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지방에서 조성된 불상들의 공통적 모습이 된다. 곧 그것은 8세기의 지배층이 보여 준 정제된 이데올로기의 세련된 형식미와는 다른 미감(美感)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