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7914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 <임천면편>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百濟一日一史임천면숲은 산지에 우거져 있다. 차령산맥 말단에 해당하는 충남 부여군의 임천면은 험준한 산세를 이루므로, 나무숲을 이루기에 알맞은 곳이다. 임천은 백제시대에 이미 수륙의 요충지로 알려졌고, 본래 백제의 가림군(加郡)이었는데, 통일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 경덕왕이 가림(嘉林)으로 고쳐 웅주(熊州)에 예속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가림군(嘉林郡)으로 하였다가 후에 가림현(嘉林縣)이 되어 감무가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다가, 다시 가림현(嘉林縣)이 되었고, 1315년(충숙왕 2) 지임주사(知林州事)로 승격하였다. 1394년(태조 3) 가림부(嘉林府)로 승격되었다. 1401년(태종 1) 환원되었다가 1403년 다시 부(府)로 되었다. .. 2025. 7. 3.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세도면/화수리편>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百濟一日一史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세도면 화수리(花樹里)세도면의 북쪽에 위치해서 동남쪽으로는 토성산이 그리고 중앙에 군환산이 서서 비교적 낮은 산악지대를 이루며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화수천 유역과 남쪽에 펼쳐지는 들이 넓은 지역에 화수리는 자리한다. 야산지대에 자연스럽게 피는 꽃이 아름다워 인심도 후하다는 화수리는 봄과 가을을 통해서 시인 묵객이 많이 찾아드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부터이며 가림성(加林城) 지역의 외곽성인 토성산성이 이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지역이었다.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성.. 2025. 7. 2.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세도면/동사리편>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百濟一日一史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동사리(東寺里)세도면의 서남쪽에 위치 큰 냇물인 사동천과 작은 냇물로는 바위배기천, 홍역천, 박술골천, 소매천 등이 서쪽의 낮은 야산지대에서 발원하여 사동천으로 들어가는 구육역과 사동천의 유역의 수계에 넓게 펼쳐진 들과 서쪽의 낮은 야산지대가 잔잔한 물살을 잇듯 깔려있는 지역에 동사리는 위치한다.백제 신라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었다.(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 때 마을이 형성된 지역으로 추정되는 동사리는 고려 때부터 대흥산을 주축으로 하는 그 아래 야산지대를 중심으로 들이 개간되며 큰 마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조선.. 2025. 7. 1.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세도면/사산리편>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百濟一日一史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사산리(沙山里)세도면 최북단으로 동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낮은 야산지대가 금강 쪽으로 깔려있는 지역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절골천 유역에 광범위한 들을 조성하는 곳에 사산리는 자리한다. 또한 동쪽에는 남산골천이 흐르면서 들을 적시고 있어 운치를 돋구는 지역이기도 하다.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나당군이 사비성을 공격할 때에 금강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다 가림성 군사의 복병의 공격을 받아 대파되었다는 사랭[沙浪]이 마을이 있는 곳으로 당군이 사비성을 점령하고서도 오랫동안 주둔하였던 지역이라 전한다.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백암면의 지역이었다. 모.. 2025. 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