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7865 [찾아가는부여 마을문화]<장암면/하황리편> 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百濟一日一史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하황리(下黃里) 장암면의 동남쪽에 위치해서 마치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어 붙이는 산에서 떨어진 흙더미가 금강변의 모래와 함께 돌을 조성하듯 산과 들이 조화를 이루는 지역에 하황천가에 펼쳐진 들까지 겹쳐서 누런 들을 이루는 지역에 하황리는 자리한다.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금강과 함께 살아온 백제 유민들이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산악지대 들로 이동하여 고려 초기부터는 넓은 모래 사장과 들만 남아 있었다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는 다시 마을이 형성하기 시작한 이 지역에 1450년경 풍양조.. 2025. 6. 19. [찾아가는 부여 마을문화]<장암면/상황리편> 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百濟一日一史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상황리(上黃里)장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낮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산악지대에서 동쪽으로 흘러가서는 금강에 유입하는 하황천가에 펼쳐진 들과 남산골천, 법주천, 사왕천, 애개울천 등 작은 냇물의 유역에 펼쳐진 들에 자리한 지역이 상황리다.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인류는 이미 정착해 있었으며 마을의 형성도 따랐던 지역으로서 낮은 야산지대와 강변이 당시 사람들이 생활을 누리는데 좋은 입지적 조건이었다. 또한 그래서 이곳에 백제 왕릉이 있다는 설도 부인 못할 사실로 남아있기도 하다. 임천조씨의 시조묘가 이곳에 있으며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설도 .. 2025. 6. 18. [찾아가는 부여 마을문화]<장암면/장하리편> 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百濟一日一史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장하리(長蝦里) 북고리 서부에서 유입 북동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수계와 서남쪽에서 밀어 올리는 것 같은 산세가 금강변까지 잇닿은 야산지대 동남쪽으로 금강과 골암천을 비롯한 여러 작은 냇물을 끼고 조성된 들을 낀 지역에 장하리는 자리한다.인류의 정착은 상당히 빨라서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이미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의 형성도 따랐던 지역으로 이 곳에 자리한 사랑산성(沙浪山城)도 백제가 공주에 왕도를 정하였을 때 쌓은 산성이라고 구전에 전해오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금강 건너에 있는 석성 파진산에서 나당군과 싸운 백제군의 부상병들이 금강을 건너 사랑산성.. 2025. 6. 17. [찾아가는 부여 마을문화]<장암면/북고리편> 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百濟一日一史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장암면 북고리(北皐里)북쪽으로는 금강이 정암리를 거쳐 장하리를 향하여 흐르고 남쪽에는 우뚝 솟은 학산에서 차츰 야산지대로 북쪽에 흐르는 산과 금강으로 유입하는 북구천 유역과 금강변에 펼쳐진 들에 북고리는 자리하고 있다.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북고리 강가는 일명 뒷구래라고 불린다. 즉 지금의 강령(江嶺), 도강(道江), 월촌(越村)을 뒷구래라고 부르는데 그 지역은 백제 때 구드래 나루에 드나들던 외국상선 및 선박이 드나들 때 입항했던 포구의 지역이었다.후백제시대 최씨가 설촌(設村)하였다고 전하며, 현재 최씨는 한 가구도 살지 않는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 2025. 6. 17. 이전 1 2 3 4 ··· 196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