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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모리>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5. 5. 8.

[찾아가는 부여 마을]<모리>
==정찬응 ==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
百濟一日一史
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
백제부흥군 전쟁터 모리
규암면의 북쪽에 위치해서 대부분 평탄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마을 중앙으로 금강의 지류가 유입해 들어오고 있다.
은산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야산지대가 잔잔한 파도를 일듯 깔려 있으며 동쪽으로는 들이 넓게 펼쳐지는 지역에 모리는 위치한다.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이 경둔리에 주둔하여 이 지역까지 출동하여 나당군과 싸운 전쟁터였다고도 전하며 그 후에는 오랫동안 산막 초막이 많은 지역이었다는 구전으로 보아 백제 사람들이 오랫동안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음을 짐작케 하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부락이 형성되고 부여의 외곽지대로 백제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그 맥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었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 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으로서 띠가 많이 났으므로 띠울 또는 모동(茅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채야리(菜野里), 함양리(咸陽里) 일부를 병합 모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향토문화유적으로는 임암집판각이 있고 고적으로는 모리사지가 있다.  자연부락으로는 검은 머리, 띠울이 있다.
( 부여 군 지 참고)

<백강전투>
백강 전투(白江戰鬪)는 서기 663년에 백강에서 신라, 당나라의 660년에 660년에 사비성이 점령당하고 의자왕과 부여융이 수모를 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백제가 멸망한다. 그 후, 백제 남부에서 귀실복신, 승려 도침 등의 부흥군이 일어나 왜국에 있었던 왕자 부여풍을 데려와 왕으로 세워 백제 부흥 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웅진성과 사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은 이들을 공격하는데, 유인궤, 유인원(당나라) 등이 진현성을 함락시킨다. 이들은 임존성을 임시 도읍지로 삼았지만 도침, 복신 등의 다툼으로 내분이 벌어졌고 부여풍은 이들을 죽였다. 이 기회를 틈타 유인궤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공격했고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왜국은 이 상황을 지켜보다 도움을 요청받자 구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이를 주도한 자는 사이메이 덴노와 나카노오오에 황태자로 사이메이 덴노가 후쿠오카에서 준비를 하는 도중 사망하자 나카노오오에 황태자는 즉위식을 미루고 병력부터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다.
이에  왜는 대군을  지원 백강예서
연합군과 백제 부흥군, 왜국의 연합군이 맞서 싸운 전투다. 백촌강(하쿠손강) 전투라고도 부른다. 이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승리하면서, 3년 전 의자왕이 항복한 후 백제부흥운동의 잔존 세력들은 사실상 완전히 소멸되었고  이 전투에 참전한 왜국 병력은 사이메이 덴노가 백제를 구하기 위해 파병한 병력이었다.
이 전투는 백제 부흥군과 왜의 완패로
이 전투로 인해 부여풍의 세력은 멸망하고 살아남은 백제 부흥군의 지도자들은 왜국으로 망명했다. 즉, 백제 부흥운동의 끝을 알린 전투 중 하나이며, 당시 백제와 왜국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후 두 달 가량 버틴 임존성마저도 함락당하고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도주하면서 독자적인 백제부흥운동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