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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합송리> ==정찬응==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5. 5. 17.

[찾아가는 부여 마을 문화百濟一日一史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
百濟一日一史
부여의 백제예술문화(扶餘의 百濟藝術文化)

부촌마을 합송리
규암면의 서남쪽으로 북쪽으로는 은산 내지천에서 유입하는 반산저수지(九龍池)를 두고 서쪽으로는 구룡면에서 연결하여 돌출된 야산지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길게 금천이 구룡에서 유입하여 백마강으로 흐르며 넓은 평야의 들이 차지한 대부분 평탄한 지형의 지역에 위치한다.
반산저수지와 금천를 이용한 수자원이 풍부하여 농경으로 비교적 부촌을 이루어 내려오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泗沘郡)에, 신라 때는 부여군(扶餘郡)에 속하였으며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고 적극적으로 마을의 형성은 고려 때는 한때 공주군에 속했으며 시작되었다. 조선초기에는 부여현의 송당면(松堂面)의 지역이었고 조선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 지역으로서 면소재지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노화리(蘆花里
송동리(松東里) 송서리(松西里) 일부를 병합시켜 송동(松東)과 송서(松西)를 통합하였다는 의미로 합송리라 하였고 규암면에 편입시켰다.
자연부새터는 송당,송동, 송서,
서부, 동부, 새터, 장구동이 있다.
수원이 풍부하며 평야의 저지대로서 일찍 선사시대부터 백제시대에 논농사와 밭농사의 주경작지로 추측한다.
계산공주 이야기
백제 말 의자왕의 왕녀에 계산이라는 미인이 있었다. 이 왕녀는 어려서부터 검법을 좋아하여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남해의 여도사로부터 신술을 배워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용병기(自勇兵器)라는 무기를 만들어 스스로 천하무적이라 하였다.

이 무기는 철로 만든 활과 칼인데, 여기에 神將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무기를 사용할 때에는 공중을 향해 주문을 외우면, 갑자기 많은 군사가 나타나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

신라가 당나라의 소정방과 군을 합세하여 백제를 침공해 오자 그녀는 한 마리의 학(까치의 오역)이 되어 신라의 진중을 정찰하러 왔다. 그런데 신술에 능통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에게 발각되어 땅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녀가 유신으로부터 풀려나 귀국하여 부왕에게 신라와 화목하도록 권하여도 부왕이 듣지 않자 자신이 만든 자용병기를 버리고(또는 부수고) 부소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전교수 ‘계산 공주 설화에 대한 종합적 고찰’ 중에서-

계산 공주 설화는 ‘민간신앙 제3부 조선의 무격巫覡(1932)’에 수록돼 있다. 또한 ‘삼국유사’와 ‘동경잡기’에도 관련 내용이 짧게나마 언급돼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