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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虛潭(허담)조성열·글모음

위대한 사랑 - 1.할아버지 사랑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4. 10. 27.

위대한 사랑 - 1. 할아버지 사랑

○할아버지는 오바마처럼 쩌렁쩌렁하게 연설을 잘하셨다. 합곡리 리장을 하실 때 어린 내가 보기에도 명연설가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에게 웅변연습을 시키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는 내 어릴 적에 옻닭. 노루피, 심지어는 두더지까지 구워 먹여 주셨다 한다.
집 울타리에는 복숭아 10그루와 자두. 배나무 등 과실나무를 심은 것은 후손들을 위한 배려하신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항상 깨끗한 한복을 즐겨 입으시며, 노후에 친구분들을 사랑방에 초대하시어 시조를 읊으시며 학처럼 신선 같이 살다가 가신 분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은혜에 보답코자 1997년 이후, 시골에 갈 때마다 산소에 풀을 뽑고 나무를 전지 하며 그 한없는 은혜를 기리고자 하였다.

○마을입구에 '기적제 할아버지'와 함께 우뚝 서 있는 < 청덕기념비 >는 우리 자손 모두의 자긍심이다.

2. 외할머니 사랑

○외할머니는 온화하고 자비로우시어 덕행을 몸소 실천하신 분으로 향리에서 소문이 자자한 분이셨다.

○옹기장사가 오면 꼭 밥을 대접하셨고, 6.25 이후 이웃에 산모가 생기면 일꾼을 시켜 쌀 2말을 배달하여
산후조리에 도움을 주셨다고 한다.

○방학 때마다 귀경할 때 인사드리러 가면 달걀이나 빵 사 먹으라고 꼭 용돈을 주셨는데, 어느 때는 머리카락
이 섞여 있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그때는 내가 갈 때마다 용돈을 드렸었는데, 웬일인지 봉투에 5만 원을 주시어 1년이
지나도록 쓰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둔 일도 있었다.
  
○친손주나 외손주나 거의 공평하게 인자함과 사랑을 주셨던 외할머니!
선친께서는 외할머니의 德을 칭송하시며, " 너도 크면 외할머니의 덕행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라"라고 당부
하셨다.

3. 아버지 사랑

○아버지는 평생 할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성, 형제. 사촌까지 자신을 희생하시며 살다 간 분이시다.

- 외할아버지 도움으로 외갓집 소와 일꾼으로 하천부지 논 17마지기를 일구시고는 큰집 당숙과 작은 집
당숙에게 각각 5마지기, 7마지기 나누어 주신 것은 대인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덕행이셨다.
-또한 아버지는 신대방동에 쌀가게부터 시작하시어 잘되자, 그 옆에 연탄가게, 의용촌 마을에 구멍가게까지 확장하시어 번돈으로 둘째. 막내숙부님께 집 한 채씩, 시골에 사신 셋째 숙부님께는 정미소와 논 15마지기,
장애인인 막내고모에게는 집과 논 7마지기를 사주시어 출가시키셨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샛강에서 수영만 하는 나의 옷을 들으시곤 산으로 끌고 가 엎드려뻗쳐 시키시고는 거의 한 시간을 엉덩이를 패신 후, 각 학년마다 몇 등 하겠느냐 다그치시어 5학년 말에
전교 1등을 하자, 6학년 때 3월 31일에 서울 대방초교로 전학시키시어 내 인생의 큰 전환 점이 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청덕기념비로 찬란한 영웅이셨다면,
아버지는 수많은 嘉言善行(가언선행)을 실천하셨음에도 무관의 제왕으로 남으신 분이다.
    

4. 어머니 사랑
○어머니의 일생은 조부모님. 아버지. 형제들. 자식들을
위한 희생으로 점철되며, 치매 걸리신 할머니를 11년 6개월을 지극 정성으로 모신 공적으로 성균관장 효부상을 받으셨다.

○1963년 3월에 서울로 전학한 후, 여름방학 때 규암
나루터를 배로 건너자 소낙비에 모시적삼이 흠뻑 젖으신 채 나를 기다리시던 모습이 61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어머니는 '63년 겨울에 얼음장 같은 방에서 냉기에 이불을 깔고 모포를 뚤뚤 말아 지내는 걸 보고 가신 후      할아버지께 건의드려 내가 중학교 들어간 1965년에 서울에 오셔서 쌀가게등 수완을 발휘하시어 돈을
많이 버셨다.

○그러나 '68년에 할아버지께서 "돈도 필요 없고, 큰 며느리와 살고 싶다" 하시자, 아버지를 받들어 정미소 두
개를 사시어 하나는 셋째 숙부님 드리고, 하나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며 조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셨다.

○93세가 되신 지금도 고향에 계시면서 자손들과 함께 국내는 물론 터어키. 곤명. 삿포로. 베트남등도 여행도
하시며 건강하고 편안히 잘 지내시는 편이다.

○할아버지 병간호 3.5년, 할머니 치매 간호 11.5년,
아버지 뇌졸중 후 간호 13년 합해서 27년 간 3분을 위해 몸 바치신 어머니의 헌신. 희생은 위대하셨다.

5. 웅천이모부 사랑

○이모부는 내 마음속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인이시다.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 이모부는 광대한 분이셨다. 이질을 위해 그렇게 폭넓게 베푸신 분이 또 계실까!

○이모부님의 베풂은 내가 가장 베고픈 생도 시절에 주로 이뤄졌으니, 2학년 때 친구가 놀러 오니 고란사 옆 횟집에서 잉어회와 매운탕을 엄청난 양을 시켜놓으시고, 본인은 나무아래 평상에서 낮잠을 주무셨다.

○그 후에도 휴가 때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그 당시 부여의 최고 한식집인 '삼공식당'에서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게 해 주셨다.

○술을 좋아하셨던 이모부님은 54세 때 별세하시어 술 한 잔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게 한이 되어, 고향에 갈 때마다 이모님께 최선을 다해 모셨다.

○이모부님의 장례식날 덕림까지 이르는 행렬에는 수많은 조문객들이 무리를 짓자, 서울 이모부님은
"건달인 줄 알았더니 덕을 많이 쌓았다"라고 말씀하셨다.

6. 셋째 작은 아버지 사랑

○셋째 숙부님은 내가 육사에 합격하자, 자식이 합격한 것처럼 좋아하시며, 휴대용 턴테이블을 사주시어 그 당시 유명하였던 사이먼가펑클과 송창식의 판을
즐겨 듣게 해 주셨다.

○숙부님은 1학년 겨울방학 때, 선배 두 분이 부여에 오시자 샛강에서 뱀장어를 작살로 잡으시어 고추장으로 맛있게 구워주셨다.

○졸업을 앞두고는 당시에 큰돈이었던 33,000을 여행비로 주시어 성류굴과 설악산등 동해안 여행을 하는데 도움을 주셨다.

○그 후 '84년경 장애인이었던 성갑동생의 교육을 위해 내발산 시장에 인삼가게를 내실 때, 집사람에게 사정하여 두 번에 걸쳐 800만 원을 도와드린 건 그분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7. 이 분들의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

○사랑은 또 하나의 사랑을 낳는 법이다.
    
○나는 위 6분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나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사랑은 그 시대를 살아온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위대한 사랑이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내가 가진 본래의 천성과 이 분들에게 받은 사랑을 사회에 환원시켜야 한다는 철학, 거기에 내가
공부한 고전의 아름다운 언어를 내공과 실천력을 가지고, 내 자식들과 조카들, 서민층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늘그막에 덕행을 해야만이 이 분들의 위대한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리라.

○또한, 30개월 된 외손녀 강율이가 하루하루 성장하며 영민하고 말재주가 뛰어난 점을 지켜보는 즐거움과 행복 속에서, 희망의 등댓불이 되어 나의
노후를 설레게 한다.
우리 율이를 위해 나의 마지막 열정의 불꽃을 어떻게 태울까를 생각하며 펜을 놓는다.            
                  2024.8.10.虛潭. 조성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