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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본동이야기]/[수도권]우리동네 옛이야기

[수도권] "사람들은 '도깨비 시장' 사라진 줄 알아요"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0. 4. 27.

황학동 골동품 거리


6·25전쟁 이후 시장 형성… 70~80년대 최고 전성기
IMF·청계천 개발로 타격… 10여개 가게가 명맥 이어가

"70년대 축음기로 노래 한번 들어보실래요?"

중구 황학동의 골동품가게 '상보당' 주인 손월선(67)씨는 교탁처럼 생긴 가정용 축음기에 SP판(돌로 만든 판)을 얹은 후 바늘을 판 위에 올려놓았다. 축음기 옆에 달린 손잡이를 감아 태엽을 돌리자 "살고 보세~"라며 노래가 흘러나왔다. 1959년 백설희·최무룡 주연 영화 '가는 봄 오는 봄'의 영화 음악이었다. 고풍스러운 외관에 비해 음질이 제법 깨끗했다. 이 가게는 축음기와 SP판 외에도 진공관 라디오, 색소폰 등 각종 골동품을 40여년째 판매하고 있다. SP판은 3만~10만원, 축음기는 50만~150만원 정도다.

청계천8가 주상복합아파트 롯데캐슬 베네치아 뒤편,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여기는 '황학동 도깨비시장'이 명맥(命脈)을 이어가고 있다. 동림당·진성당·곡성당·민속골동·순천당·한화당·중앙장식·상보당·고농방·태안사·신광사 등 11개 가게 상인들이 주인공들이다.

황학동‘도깨비 시장’에 있는 한 골동품 상점. 표면이 살짝 벗겨져 더 고풍스러운 불상과 기왓장, 다양한 색상의 도자기 등이 진열돼 있다. /중구 제공

축음기·무당 삼지창·지게…일종의 '민속박물관'

30여년 넘게 장사하고 있다는 '고농방' 내 20평 공간에는 느티나무로 만든 책궤, 선반닫이, 행자반, 강화 육통괴목 반닫이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족히 누울 만한 크기의 탁자도 눈에 띄었다. 옛날 한옥 마루를 떼어와 다리를 붙여 식탁 겸 나무 침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양정태(65) 대표는 "가구에 장식된 무늬는 칠한 게 아니라 일일이 새겼는데, 지금은 인건비가 비싸서 엄두도 못 내는 물건"이라고 했다.

고농방 옆 '태안사'는 마치 '민속박물관' 같았다. 나무로 된 3m 정도의 디딜방아, 무당들이 굿을 할 때 돼지머리를 꽂아 놓는 삼지창(三枝槍), 분뇨통, 지게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장온(48) 사장은 "민속주점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들이 이런 물건들을 많이 찾는다"고 했다.

황학동에서 45년 동안 장사하고 있는‘동림당’ 김일수(왼쪽) 사장이 지난 2일 가게를 찾은 엽전 수집가에게 물건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및 중국 엽전, 동경(銅鏡)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중구 제공

김정남(67) 사장의 '민속골동'에 들어서자 한 여자 손님이 오래된 자수 조각을 만지고 있었다. 옛날 베개의 베갯모에 놓인 수라고 했다. 앞뒤로 한 쌍씩 8만~10만원 정도라고 한다. 포항에서 골동품 가게를 하고 있다는 이 손님은 "자수를 사서 액자에 넣거나 재가공해 장식품으로 판매한다"고 했다. 파란색 바탕에 흰 글씨로 투박하게 쓴 '동림당'이란 간판이 붙은 가게 입구에는 오래된 공중전화, 징, 종, 동물 조각상 등이 인도까지 나와 있지만 사실은 도자기 전문 가게다. 200년 된 청기 관요(나라에서 직접 구운 도자기), 사대부 집안에서 쓰던 동경(銅鏡) 등을 모두 합치면 적어도 몇억대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엽전 판매대 앞에는 '금·은 삽니다'라는 나무 간판이 붙어 있었다.

옛날 배 키, 시골 부엌문, 오동나무 장 등을 판매하는 '순천당'의 김용엽(65) 사장은 고가구들을 이용한 '인테리어 비법'을 귀띔해 주었다. 김 사장은 "한옥 문짝들은 살이 아주 가늘고 섬세하게 들어가 있어 새로 한옥을 지을 때 문짝만 따로 달아도 운치가 있고, 배 키 같은 것을 거실에 장식품으로 놓으면 예스러운 분위기를 살릴 수 있다"라고 했다. 배 키의 경우 일본에서 수입한 것은 7만원, 한국 것은 20만원 정도라고 한다.

한때 200여개 가게에서 10여개로 줄어

황학동 시장은 1950년 6·25전쟁 이후 형성됐다. 무당들이 사용하던 옷이나 도구 등이 많아 마치 도깨비가 나올 것 같다 하여 '도깨비 시장', 물건을 팔러 오는 중간 상인들이 전국 각지를 벼룩처럼 뛰어다니며 만물을 수집해 온다고 해서 '벼룩시장',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북적인다고 해서 '개미 시장', 없는 게 없다고 해서 '만물 시장' 등으로 불렸다. 1970~80년대에는 골동품 가게가 200여개까지 늘어나며 전성기를 누렸다.

'황학동의 전설'로 통하는 '민속골동' 김정남 사장은 8남매 중 장남으로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부산에서 상경해 공사판 막노동, 동대문·남대문 시장 난전 등을 하다 황학동으로 흘러왔다. "어떤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지나가는데 그 안에 흙·기름으로 범벅이 된 도자기가 있어서 8000원 주고 샀어요. 그런데 황학동 어떤 가게 주인이 그 물건을 보더니 500만원을 줄 테니 팔라고 하더군. 100만원만 더 쓰라고 해서 600만원에 팔았어요. 알고 보니 조선시대 백자였던 거야."

하지만 황학동 상인들은 IMF 때와 청계천 개발로 두 번의 큰 타격을 입었다. 2003년 청계천 복원 사업 당시, 서울시는 청계천변 노점상을 동대문운동장 축구장(풍물벼룩시장)으로 이주시켰다가, 2008년 4월 동대문구 신설동에 풍물 벼룩시장을 만들어 노점 800여개를 입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도깨비 시장 주위 노점상도 같이 이전했는데, 많은 사람에게 '황학동 도깨비 시장' 전체가 없어진 것으로 잘못 알려져 손님들의 발길이 많이 끊어졌다고 한다. 고미술품 가게가 망해 나간 자리에는 전자제품 가게가 대신 들어섰고, 청계천 주변에는 주상복합 아파트나 최신 동대문 패션타운 등이 들어서는 등 개발의 물결도 거셌다. '고농방' 양정태 대표는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사라진 줄 알아요"라고 한탄했다.

'동림당' 김일수(76) 사장은 "요즘은 손님이 많아야 5~6명 정도"라며 "그동안 수집해온 물건들을 보관하기 위해 임차한 가게나 창고는 40평이 넘어 한 달 관리비만 20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태안사 장온 사장은 "장사는 어렵지만, 우리가 보관하지 않으면 나중에 보물이 될 이런 골동품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혜운 기자 liety@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