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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최규학·시집만들기

나목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0. 1. 24.

나목

 

최규학

 

한 겨울 나목의 맨살을 만져보고 싶다

자신의 체온을 얼음처럼 낮춰 추위와 싸우는 나목을 포근 안아주고 싶다

칼바람의 공격이 아무리 거세어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나목의 곁에 서서 속삭이고 싶다

갑옷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총탄과 화살을 맞았던 조선의 어느 장군처럼 용감하다고

얼어붙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영웅이 되어가는 나목에게 큰 절을 올리고 싶다

길어야 백일을 싸우면 나목은 동장군을 물리치고 개선하리라

가지가 부러지고 뿌리가 얼어도 결코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나리라

봄이 되면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지상 최대의 승전 페스티벌에 참여하리라

나목의 전술은

그저 다 벗어 던지는 것뿐

그저 견디는 것뿐

스스로 죽거나 물러 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것뿐이다

어떤 전략도 없이 어떤 타협도 없이

어떤 방패도 없이 어떤 무기도 없이

그저 갓난아기 같은 적신이 되어 맞서는 것뿐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롯이 혼자서 새벽을 맞고

낮이 되면 희미한 햇볕에 몸을 덥히다가

까만 밤이 되면 유령의 춤에 다시 질식하는

지옥 같은 전투를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뿐이다

맹추위를 맞아 혹독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여

다 벗어던지고 체온을 낮 춰 겨울을 이기는 나목을 바라보아라

그대 스스로 한겨울의 나목이 되어라

그대 스스로 나목의 아픔이 되어 백일을 견뎌라

그대 나목처럼 위대한 봄을 맞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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