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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본동이야기]/[수도권2]지명유래

[수도권II] [우리동네 지명유래] [9] 백년 묵은 여우 유혹을 물리친 중봉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0. 3. 10.

[수도권II] [우리동네 지명유래] [9] 백년 묵은 여우 유혹을 물리친 중봉 조헌

김포 '여우재고개'

김포시 감정동에 있는 '여우재고개'에는 왕복 4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시원스레 깔려 있다. 때문에 인천시 검단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은 차를 타고 어렵지 않게 그 고개를 넘나든다.

그러나 조선 중기 문신인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이 김포 감정리에서 태어나 성장할 당시 이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진 산 속에 자리한 으슥한 고개였다. 서당에 가려면 선생은 이 고개를 꼭 넘어야 했다. 자연스레 여우재라는 이름엔 선생과 관련된 전설 하나가 스며들었다.

 
여우재고개./김포시 제공

시(市) 문화예술과의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선생이 어렸을 때 서당으로 가는 길목인 고개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어여쁜 처녀가 나타났다고 한다. 처녀는 "지나가시는 어린 선비 양반님! 나를 떼어놓고 가시면 어떡합니까?"라며 날마다 그를 유혹했다.

선생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이렇게 처녀가 나타나 자신을 꾀자 덜컥 겁이 났지만 한편으론 호기심도 동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여기고 마음을 굳게 먹은 뒤 스승에게 이를 숨김없이 고했다.

그의 사연을 들은 스승은 이렇게 일렀다. "그 처녀의 입 안엔 틀림없이 구슬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가 너를 꾈 때 주저치 말고 그 구슬을 빼앗아 삼키거라. 그리하면 너는 훗날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이다."

중봉은 스승의 말대로 처녀의 입 안에 들어있던 구슬을 빼앗아 삼켰다. 그러자 처녀는 돌연 여우로 변해 울며 달아났다. 알고 보니 처녀는 이 고개에서 살고 있던 백년 묵은 여우였던 것.

훗날 실천적 학문관에 바탕을 둔 근본 개혁론을 제시하고 민생의 안정을 시종일관 주장한 선구적 학자가 된 선생은 왜적의 침입을 예견하고 방책을 거듭 주장하다가 1592년 실제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청도에서 최초의 의병을 일으켰다.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취했지만 그해 8월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에 공격을 강행하다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