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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생생화보]/풍양조씨이야기

[2018년 4월 25일] 원주 조엄선생 기념관 방문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8. 4. 26.

 [2018년 4월 25일] 원주 조엄선생 기념관 방문

 

2018년 4월 25일 원주 출렁다리 가는 길에 풍양조씨 조엄선생 기념관에 들려 조엄선생의 훌륭한 업적에 대해 관계자분의 자세한 해설과 함께

설명을 잘 듣고 

풍양 조씨에 대한 자부심과 조상님에 대한 얼을 생각하며 조상님께 욕되지 않게 앞으로 남은 시간 성실, 정직, 봉사하는 삶이고 싶습니다. 

 

 

"아래 문언은 참고자료에서 발취한 것임."

 

[정의]
조선 후기 동래 부사를 지낸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명서(明瑞), 호는 영호(永湖)·제곡(濟谷). 고조할아버지는 인조(仁祖) 때의 공신인 풍안군(豊安君) 조흡(趙潝)이고, 할아버지는 홍천 현감 조도보(趙道輔)이며, 아버지는 이조 판서 조상경(趙商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아들은 이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고, 손자는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이다. 증손녀[조만영의 딸]는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純祖)의 아들인 효명 세자(孝明世子)[익종(翼宗)으로 추존]의 빈이고, 제24대 헌종(憲宗)의 어머니인 신정 왕후(神貞王后)이다.


[활동 사항]
조엄(趙曮)[1719~1777]은 1738년(영조 14) 생원시에 급제하고 음서(蔭敍)로 입학 집사(入學執事) 등을 지냈다. 1753년(영조 29)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1754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1757년(영조 33) 7월 홍중효(洪重孝)의 뒤를 이어 동래 부사로 부임, 약 1년 4개월 동안 재임하였다. 조엄은 동래부에 도착한 다음날 충렬사에 참배하였다. 당시 충렬사에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부산 첨사 정발(鄭撥)의 신주를 모시고, 함께 전사한 아전과 노비까지 배향하고 있었다.

 

조엄은 『징비록(懲毖錄)』에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은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라고 적혀 있고,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도 “왜병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우다가 살해되었다”는 내용이 있음에도 윤흥신이 충렬사에 배향되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읍지(邑誌)를 살피고 다대포를 방문하였으나 세월이 많이 흘러 윤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동래 부사는 국가의 문호(門戶)인 동래부의 수장이고, 대일(對日) 외교와 무역을 관장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 물품을 수입하고, 면포로 결제하였는데, 조엄은 이 과정에 폐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면포의 질이 떨어지면 일본 상인들이 번번이 퇴자를 놓아 백성들이 베를 다시 짜거나 질 좋은 면포을 장에서 사다 바쳐야 했다. 이에 조엄은 면포 대신 돈을 받아 그 돈을 일본 상인에게 지급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은 면포 납품의 부담을 덜고, 일본인들은 좋은 물건을 살 기회를 가져 양쪽이 모두 환대하였다 또한 범어사 등 동래 지역의 여러 사찰을 둘러본 뒤 승려들이 온갖 잡일과 부역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고는 사찰의 잡역을 없애 주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가져가는 물품 중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산삼(山蔘)이었다.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를 만큼 인기가 좋아 가짜 산삼인 조삼(造蔘)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조엄은 일본 고위층에게 보내는 예물인 예단삼(禮單蔘)의 질이 나쁘면 조선의 체통이 떨어진다고 여겨 조삼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조삼을 만들다 발각된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등 엄하게 다스려 변방 지역의 흐트러진 분위기를 바로 세웠다.

 

조엄은 1758년(영조 34) 12월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이듬해 1월 10일 동래부를 떠났다.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서는 경상도 내 효자와 열녀, 절의가 뛰어난 사람을 정리하여 표창할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이때 윤흥신의 배향 문제도 잊지 않고 거론하였다. 또한 창원의 마산창(馬山倉), 밀양의 삼랑창(三浪倉) 등 조창을 설치하여 전라도까지만 미치던 조운(漕運)[세금으로 거둔 곡식, 베 등을 배로 실어 나름]을 경상도 연해 지역으로 넓혀 세곡 납부에 따른 민폐를 줄이고, 국고 수입을 크게 늘리는 데 일조하였다.

 

1763년(영조 39) 통신사 정사(通信使正使)로 선발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 동래에 도착하여 10월 6일 일본으로 출발할 때까지 46일 동안 부산에 머물렀다. 통신사 일행이 에도[江戶][현 도쿄]에 가서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하고 1764년 3월 11일 막부 장군의 회답 국서를 받아 귀국길에 올랐다. 6월 13일 쓰시마[對馬]에서 일본으로 갈 때 눈여겨보아 두었던 고구마를 가져오기 위해 채취하였다. 조엄의 사행 기록인 『해사 일기(海槎日記)』에는 고구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불리었다. 왜음으로 고귀마(古貴麻)라고 하는 이것은 산약(山藥)과도 같고 무뿌리(菁根)와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다. [중략] 그것은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 먹을 수도 있었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만들어도 된다. 떡을 하거나 밥에 섞는 등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흉년 때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하였다.”

 

조엄은 고구마 종자를 부산진과 동래부 아전들에게 나누어 주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고구마는 수확량이 많고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애민 정신에서 나온 행위였다. 조엄은 일본에서 돌아온 뒤 이조 참의, 대사간, 공조 참판, 호조 참판을 거쳤다.

 

1765년(영조 41) 조엄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다대포에 윤흥신과 함께 순절한 백성들을 기리는 윤공단(尹公檀)이 세워졌다. 이에 감격한 조엄은 1766년(영조 42) 「다대포 첨사 윤공 전망 사적서(多大浦僉使尹公戰亡事蹟敍)」를 짓기도 하였다. 같은 해 부제학 임명을 거부하였다가 함경도 삼수부에 유배되었다.

 

1770년(영조 46)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조 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80년이 되는 1772년(영조 48) 1월, 조엄은 조정에 나아가 또 다시 충렬사에 윤흥신의 신주를 모셔 배향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조엄은 홍인한(洪麟漢), 정후겸(鄭厚謙) 등과 결탁하였다는 홍국영(洪國榮)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더불어 과거 평안도 관찰사 재임 시 재물을 탐하고, 백성을 학대하였으며, 공금을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위원(渭原)에 유배되었다. 얼마 후 아들 조진관의 청으로 김해로 옮겨졌다가 이듬해 세상을 떴다.


[학문과 저술]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기록인 『해사 일기』와 풍양 조씨(豊壤趙氏) 가계를 정리한 『풍양 조씨 세록(豊壤趙氏世錄)』 등이 있다.


[묘소]
조엄의 묘는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 산 69-12번지 원주 조엄 묘역(原州趙曮墓域)에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 망주석 2기, 묘비 등이 있다. 묘비의 글은 손자인 조만영이 썼다. 묘소에서 100m 떨어진 진입로에는 1835년(헌종 1)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의 글은 조만영과 조인영의 부탁으로 남공철(南公轍)이 짓고, 김이재(金履載)가 글씨를 썼으며, 신도비의 전서는 김재창(金在昌)이 썼다. 조엄 묘역은 강원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풍양 조씨 회양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원주시는 2010년 12월 조엄 묘소 정비 사업을 시작하여 진입로를 확장·포장하고 기념관과 사당 등의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808년(순조 8) 범어사 입구 언덕에 ‘순상국 조공 엄혁거사폐 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曮革祛寺弊永世不忘壇)’이 세워졌다. 비에는 “승려들이 금정산성 방어에 동원되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주변 사찰은 의승번채(義僧番債)[산성을 지키는 승려의 급여를 위해 지방 관청에서 주변 사찰에 징수하던 돈] 때문에 피폐해 있었는데, 조엄이 이를 혁파하고 잡역까지 감면해 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부산에는 ‘스님이 죽어 순찰사 된 이야기’라는 설화가 전한다. 1814년(순조 14)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문익(文翼) 시호를 받았다.

원주시에서는 특산품인 ‘조엄 밤고구마’를 지역 브랜드로 지정하여 생산과 판매를 장려하고, 문화 관광 및 교육 자원으로 홍보하고 있다. 또한 조엄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기 위해 2004년 3월 26일 ‘영호 조엄과 고구마 전래’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고, 2004년 원주 학술 총서 제1권으로 『조엄 연구 논총』이 발간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사진; 조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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