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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생생화보]/사찰 탐방記()

[불교사찰] 봉원사 영산재[靈山齋]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1. 6. 7.

봉원사 - 영산재[靈山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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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사(奉元寺)는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전법수행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바 대중은 50여 스님, 신도는 10만을 중요무형문화재 제 48호(단청) 이만봉 스님과 제 50호(범패) 박송암 스님(2000년 2월 입적)이 주석하여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옥천범음대학, 불교교양대학이 있고 신행단체로는 관음회, 화엄법회, 청년회, 학생회, 인경회, 거사림 등 법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교도소, 소년원, 양로원, 고아원, 군부대 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교화활동을 펼치고 있어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

봉원사(奉元寺)의 역사는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 3년(己酉, 889) 도선(道詵)국사가 현연세대 터에 창건하여 반야사라 하였고 고려 제 31대 공민왕 재위시(1351-1374) 태고원증(太古圓證)국사가 중건, 중수하였으며 이 때 매우 수려하고 장엄스럽다 하여 당시 기록에 <동국의 명찰이 오직 한수(漢水) 동북에 있다>고 되어 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태고국사의 비문을 짓게 하고 스스로 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태조 5년(丙子, 1396)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삼존불을 조성하여 봉원사(奉元寺)에 봉안 하였고 태조 사후에는 전각을 세워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제14대 선조 25년(壬辰, 1651) 당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전각이 소진하여 제17대 효중 2년(辛卯, 1651) 지인(智仁)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동, 서 요사채가 다시 소실되어 극령(克齡), 휴엄(休嚴) 두 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제21대 영조 24년(戊辰, 1748) 지금의 터전으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奉元寺)라 현액하였으며 이때 새로지은 절이라 하여 ‘새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22대 정조 12년(戊申, 1788)에는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설치되었고 제25대 철종 6년(乙卯, 1894)에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제26대 고종 21년(甲申, 1884)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축을 이룬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했다. 고종 31년(甲午, 1894) 약사전을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다. 1945년(乙酉) 광복기념관을 건립하였지만 1950년 (庚寅)9월28일 서울 수복 당시 병화로 광복기념관이 소진되었고 이때 영조의 친필 현판등 사보와 이동인 스님 및 개화파 인사들의 유물이 함께 소실되었다. 1966년(丙午)에는 소실된 염불당을 중건하였는데 이 건물은 대원군의 별처였던 아소정을 헐어 옮긴 것이다. 1991년(辛未) 32세 주지 김성월 스님, 화주 운파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삼천불전 건립도중 대웅전이 소진됨에 즉시 중건을 시작하여 1994년(甲戊) 주지 혜경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복원 낙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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