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고 유익한 명당 이야기 (풍양 조씨 시조 조 맹의 묘]
2). 풍양 조씨 시조 조 맹의 묘
대혈의 모습
혈처의 모습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2리에 있으며, 손사득 (남동방향에서 물이 들어오는것),신술파(북서방으로물이 나가는것), 갑묘좌(동쪽을 뒤로 한것), 경유향(서쪽을 앞으로 한것)으로 卯庚(묘경=동과서)봉과 丙午丁(병오정=남방)봉이 수려하니 발복이 빠르며 자손이 부귀복록을 누리고 장수함이 필연이다.
“경기도 명산인 천마산 일맥이 서남으로 멀리 삼각산과 도봉산을 바라보며 세차게 달리다가 天作으로 이루어진 名堂을 잡아-----”의 설명처럼 이 대혈은 도선대사의 所占(소점)이라고 한다.
또한 광해군의 어머니인 선조의 후궁 恭嬪(공빈)김씨의 묘(成墓)가 입수처에 자리 잡고 있다.
혈 후의 來脈(래맥=내려오는 맥)에 葬(장=묘를 쓰면)하면 水火相剋之處(수화상극지처)이므로 不問可知(불문가지) 패절한다. 근처의 광해군 묘소도 둘러보았으나 有口無言(유구무언)이다. 趙 孟(조맹)의 관직은 高麗開國功臣 侍中 平章事(고려개국공신 시중 평장사)이며, 그는 신라가 망하자 초야에 묻혀 가난한 생활을 하던 중 고려를 건국하기 위해 백방으로 인재를 모으던 고려 태조의 눈에 띄어 70代의 고령으로 개국공신이 되었다. 왕건이 신라와의 寧海(영해)지방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고개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풍양에 사는 조바위를 맞아 상의해야만 王業(왕업)을 이룰 수 있겠나이다.” 라고 왕건에게 아뢰었다.
왕건이 군사들과 함께 고개를 넘어갔다. 농민들과 함께 김을 매던 조바위는 軍旗(군기)를 보자 황급히 달아나면서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렸다. 왕건이 밭머리에 도착하여 밭에 떨어져있는 신발이 매우 큰 것을 보고 농민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누구의 신발인가?”
“예 조바위의 신발입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고 싶으니 불러오도록 하라”
“조바위는 덩치는 큰데 겁쟁이 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여기 계신데 어찌 나오려 하겠습니까?”
“그 집이 어딘가? 내가 가서 만나겠다”
“저기 오두막집이 그의 집입니다. 그러나 그가 집에 없을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 집 뒤에 있는 바위굴 속에 가보십시오” 왕건이 과연 바위굴 속에서 그를 찾았다. 왕건은 그와 몇 마디를 나눈 결과 크게 만족하여 자기 갑옷을 조바위에게 입혔다. 조 맹이 위엄이 넘치는 자세로 말을 타고 내려오자 마을 사람들이 엎드려 예를 표했다고 한다. 조 맹은 그 길로 왕건을 따라 南征(남정)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자 그를 개국공신으로 추대하는 한편 그에게 孟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조맹의 묘는 나중에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묘가 들어서고 陵(능)으로 격상되는 바람에 移葬(이장)을 강요당했다가 平葬(평장)으로 위기를 넘기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풍양 조씨 가문의 인재들은 당파싸움에서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학맥과 소신에 따라 당파를 달리 함으로써 강한 소신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관산을 하다보면 풍양 조씨들이 의외로 많은 대혈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료 : 한국풍수지리연구원 www.poongsoo.net
연구원 : 02-558-7889 , 원장 : 011-268-0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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