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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행운)]/남는얘기

"스님 불 들어가요"…법정다비식 '눈물바다'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0. 3. 13.
 
【순천=뉴시스】김석훈 안현주 기자 = 13일 오전 11시 '무소유아름다운 향기'를 남긴 법정스님다비식은 지켜보던 불자들의 눈물바다속에 차분하면서도 경건하게 진행됐다.

오전 10시 문수전을 떠나 다비식장으로 향한 스님의 법구는 송광사 경내에 가득찬 1만5000명의 추모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시간 동안 조심스럽게 이운돼 민재 다비장에 도착했다.

집전스님이 맨앞에 서고 위패, 영정, 법구, 상주스님, 문중스님들, 사부대중들이 뒤를 따랐다.

영정을 든 손자스님은 이운되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참지 못해, 지켜보는 추모객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다비식장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3000여명의 불자들은 법정의 법구가 도착하자 일제히 합장하며 고개를 숙여 애도의 뜻을 표했다.

곳곳에서 신도들은 '
석가모니불'을 외며 참나무 단에 모셔지는 법정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더 보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세우며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날 법정스님의 다비식은 예정대로 영결식이 생략된 채 초촐하고 간소하게 진행됐다.
다비장에 쌓아올린 참나무단에 법구를 모신 뒤 다시 참나무를 쌓아올리고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해 전 총무원장 지관스님, 송광사 선덕 현호 스님, 덕숭총림 수덕사방장 설정스님, 중앙종회의장 보선스님, 법주사 원로 월탄스님, 송광사 주지 영조스님, 문도대표 길상사 주지 덕현스님, 문도대표 길상사 덕조스님 등 9명의 거화스님이 장작에 불을 붙였다.

"스님 불 들어가요"라는 말로 거화가 시작될 때 숨죽이며 이를 지켜보던 3000여명의 불자들은 '아이고 스님'을 외치며 오열했다. 눈물바다가 되면서 상주스님, 문중스님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다비식이 진행되는 동안 바람이 불어 연기와 재가 날리기도 했지만, 법정스님이 살아생전 실천했던'무소유'처럼 소박하게 마무리 됐다.

진화 스님(다비준비위 대변인)은 "법정스님의 유언에 따라 최대한 조촐하게 다비를 치렀으며 송광사 전통대로 의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법정스님의 법구는 거화의식후 24시간 정도 지난 14일 오전 10시께 습골(뼈를 수거하는 의식)의식이 진행된다. 법정의 유언을 받들어 습골 의식 때 사리수습은 하지 않는다. 이어 상좌스님에게 수거한 뼈가 인수되며 모처에 뿌려지게 된다.
 

극락왕생하소서

(순천=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아름다운 마무리...평생을 무소유와 청빈의 삶을 살아 온 법정 스님의 다비의식이 13일 오전 전남 순천시 송광사에서 열리고 있다. 2010.3.13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월북시인 백석(1912-19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으로 불린 그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해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사들여 운영하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은 제3공화국 시절 대형 요정 대원각이 됐다.

김영한씨와 법정스님의 인연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김씨는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천여평(당시 시가 1천억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이후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꿔 12월14일 창건법회를 갖는다.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수천 대중 앞에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1999년 11월14일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낸다.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매년 고교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고 있다.

길상사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분원을 두고 있고, 헝가리 원광사, 인도 천축선원, 호주 정혜사를 자매도량으로 삼고 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창건 후 회주(법회를 이끄는 어른스님)를 맡아 정기법회에서 법문을 들려줬으나, 2003년 12월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그후에도 길상사에서 열리는 대중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해왔고, 이번 생의 마지막 시간도 길상사에서 보냈다.


[앵커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