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녹번동(碌磻洞)
"당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명이 지키면 만 명이 열지 못할 곳'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는 지금의 은평구 녹번동(碌磻洞)을 이렇게 언급했다. 현재 홍은사거리에서 통일로를 타고 녹번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고개가 있어 '녹번이고개'라 불리다가 동네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녹번'이란 예부터 뼈 붙이는 약으로 많이 쓰였던 자연동(自然銅)을 말한다. 조선시대 한성부 역사를 서술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이런 말이 나온다. "녹번현의 석벽에서 자연동이 산출된다. 뼈 부러진 사람이 미음과 함께 그 부스러기를 날로 먹는데, 먹을 때 꼭 낫기를 기도하면 효험을 본다고 한다." 푸른빛 감도는 누런 쇠붙이인 자연동의 속칭이 '산골'이라, 녹번이고개는 '산골고개'로도 불렸다.
'만 명이 못 연다'고 할 만큼 고개 주변은 숲이 우거지고 험준했다. 그래서 고종 3년(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 도성을 수비하기 위해 이곳에 방어진을 쳤다고 한다.
1940년대만 해도 산골을 먹으려고 녹번동 부근을 찾는 사람이 많았고, 그들을 상대하는 주막거리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재개발로 아파트 들어설 곳이 많은 데다 서울시가 노인복지복합시설도 짓겠다고 밝혔으니 앞으로 산골고개의 추억은 전설로만 남을 것이다.
병인양요때 방어진 칠 만큼 험준한 고개
"당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명이 지키면 만 명이 열지 못할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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