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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행운)]/남는얘기

[사회] “정체성 찾자” 자부심 커진 한국인의 이름 바꾸기 확산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09. 1. 12.
[사회] “정체성 찾자” 자부심 커진 한국인의 이름 바꾸기 확산
한국 → 대한민국, 漢江 → 韓江, 동양화 → 한국화, 漢의학 → 韓의학
서울 서초구에 사는 김모(25)씨는 지난해 12월 해외여행을 위한 출국신고서를 작성했다. 출국신고서의 국적표기란에 예전에는 별 다른 생각 없이 ‘한국’이라 표기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대한민국’이라고 적고 있다. “요즘은 나라와 관계된 경우에는 한국이라는 말보다 대한민국이라는 말을 쓰게 돼요. 한국은 대한민국의 줄임말이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나라 이름부터 제대로 표기해야죠.”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 한국인의 자국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커진 덕분이다. 그 배경에는 한국이 국력이 커져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월드컵을 개최한 데다 세계 2위 국가인 일본과 공동으로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사실이 있다. 한국이 이 대회에서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월드컵 4강까지 진출한 것도 국가적 자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 일러스트 정현종
2002년 5월 20일 한·일 월드컵 직전 열렸던 잉글랜드와의 평가전 TV 중계 때는 방송국들이 우리나라의 명칭을 한국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대한민국 표기가 정례화됐다. 2007년 11월 21일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남자축구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6차전 경기 TV 중계에서도 우리나라의 명칭을 대한민국으로 표기했다. 이에 앞선 6월 29일 한국이 이라크와 가진 평가전에서도 국호 표기는 당연히 대한민국이었다. 이처럼 한국 사회가 국가 대 국가 행사에서 한국이라는 명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한국인의 정체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기성세대와 달리 외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는 젊은층의 문화가 한국 사회에서 급속히 퍼지면서 한강의 한자 표기도 도마에 올랐다. 2005년 10월 맹형규 한나라당 의원은 “한강의 한자 명칭을 중국을 뜻하는 한나라 ‘漢’자에서 한민족과 대한민국의 ‘韓’자로 바꾸자”는 대정부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맹 의원은 추진 배경에 대해 “한국의 경제 발전을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한강은 역사적·지리적으로 한민족 역사의 중심을 상징한다”며 “한강의 지금 표기(漢江)는 중국의 한(漢)나라를 연상케 해 대한민국 중심, 한민족 중심을 상징하기엔 미흡하다”고 설명했다.

2005년 10월 20일 한강사랑시민연대 창립총회에서 연설을 했던 진태하 인제대 국문과 석좌교수에 따르면 한강이란 명칭의 기원은 순우리말인 ‘한가람’에서 비롯됐다. ‘한’이라는 고어의 뜻은 ‘크다’‘넓다’라는 뜻이다. ‘가람’은 강의 고어. 즉 한강의 본래 의미는 ‘큰 강’이다. 진 교수는 “한강의 한자 표기 변경은 단순히 한강의 한자 명칭 자체만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새로운 ‘韓江’을 통해 부활시키고 재창조해 문화강국으로서 한민족 재도약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자는 데 본질적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북한산(北漢山), 남한산(南漢山), 대한문(大漢門) 등의 ‘漢’도 마땅히 ‘韓’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강사랑시민연대 창립총회에 참가했던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강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미래를 함축하는 것”으로 “한강의 한자를 ‘韓’으로 바꾸면 중국에 종속된 역사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의 정체성 찾기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6년 한의학의 한자 표기가 한의학(漢醫學)에서 한의학(韓醫學)으로 바뀌었다. 신동원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계간 역사비평 2005년 겨울호(73호)에 기고한 ‘한의학(漢醫學)과 한의학(韓醫學)’이라는 글에서 ‘한의학’이라는 용어의 변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 교수에 따르면 현재 한의학 명칭의 시초는 대한제국 때 등장했다.

공식 국명에 ‘나라이름 한(韓)’자를 썼던 대한제국은 같은 글자를 써 ‘한약(韓藥)’ ‘한의(韓醫)’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이 ‘한(韓)’자가 ‘한(漢)’자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당시 일본에서는 전통 의학을 중국에서 전래됐다는 뜻의 ‘한의학(漢醫學)’이라 했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우리나라에서도 ‘한방(漢方)’이 공식 명칭이 됐고, 이것이 해방 후까지 이어져 한의학(漢醫學)이 공식 용어가 된 것이다.

‘한의학(漢醫學)’이라는 명칭을 바꾸려는 시도는 1960년대 북한이 ‘동의학(東醫學)’이라는 이름을 확정하며 시작됐다. 신 교수는 북한의 명칭 변경을 “전통 의학의 주체성을 천명하고 한의학이라는 말에 묻어있는 낡은 이미지의 탈피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때부터 남한에서도 한의학(漢醫學)을 한의학(韓醫學)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마침내 1986년 한의학(漢醫學)이 한의학(韓醫學)으로 변경되면서 한의원, 한의사, 한약 등의 ‘한(漢)’자가 모두 ‘한(韓)’자로 바뀌었다.

전통 회화의 명칭을 ‘동양화’에서 ‘한국화’로 바꾼 사례도 있다. ‘동양화’라는 명칭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제는 ‘동양화’라는 명칭을 1920년경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1922년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제1부를 ‘동양화부’로 부르면서 이를 공식화했다. 해방 후 북한은 ‘조선화’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남한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동양화’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1970년경에 이르러 ‘동양화’라는 명칭은 전통 회화의 독자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타율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같은 시기 ‘동양화’ 대신 ‘한국화’로 부르자는 주장이 크게 대두해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쓴 ‘한국현대미술사’에 따르면 1970년대 초 청강 김영기(1911~2003년)가 ‘한국화 명칭 사용에 대한 건의문’을 쓰기도 했다. 1982년에 이르러 문화예술진흥원 주관 대한민국미술대전을 비롯한 각종 공모전에서 공식적으로 ‘동양화’ 공모부문의 명칭을 ‘한국화’로 변경했다. 1983년에 개정된 새 미술 교과서에도 ‘동양화’ 대신 ‘한국화’로 표기했다.

외국인들도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변화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다. 몽골 출신 나르망타흐 체웨그메드(27·KAIST 경영공학 석사)씨는 “월드컵 이전에는 대한민국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국가라고만 생각했는데 월드컵 때 국민들이 붉은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며 “주변 한국 친구들이 월드컵 이전에는 비자 없이 외국에 갈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월드컵 이후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17년간 생활하며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폴 레이더(24·미 에즈버리칼리지 4년)씨는 “요즘 부쩍 한국인들이 동아시아 역내의 중국인, 일본인과 차별성을 가지려 하는 것 같다”며 “대한민국이 급속한 서구화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것을 잃지 않았다는 점과 새로운 한국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했다.

경제 성장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으로 세계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인들의 정체성 찾기 움직임은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또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및 독도 문제 등 주변국과의 역사·영토 분쟁이 격화되고 있어 이 같은 현상은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