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여군정(고향)소식]/부여군 지리

[찾아가는 부여의 마을 문화] <군수리>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5. 4. 17.

[찾아가는 부여의 마을 문화] "정찬응"

*동여도에 나타나 부여*


<군수리>
백제때 군사들이 주둔하여 군수이며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입으로 황폐화되고 조선 중엽부터 촌락을 형성하고 군수(軍守)들 또는 군수평(軍守坪)이라 불려졌다.
백제시대에는 꽃다운 여성들이 찬란한 옷차림으로 이곳을 왕래하였다 하여 꽃정 또는 꽃노들(곶노들)이라 불렸으며, 두루미 마을은 백제때 문무백관들의 수뇌가 모여 회의장소로 쓰던 누각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군수리 (군숫들, 군수평)는 본래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 백제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들이므로 군숫들 또는 군수평(軍守坪)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수리라 칭해져 오다 군수, 신기(新基)로 분구되었다,
뜸별로는 백제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지역에 마을이 생겼다 해서 군숫들, 군수평이라 부르고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뜨말, 신대리(新垈里), 백제의 성터인 나성(羅城) 끝에 있는 마을이라 성말리, 정자를 짓고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새마을이라 신기정(新基亭)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신기리는 서쪽 강변 낮은 야산에 산지당이라 하여 매년 정월 삭일부터 망일까지 금줄을 띠고 저녁에 천제를 지내어 마을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마을 앞에 제방을 축조한 후로는 홍수피해 등의 재해의 우려가 없기에 폐지되었다.
또한 무왕이 사비강에서 20여리 물길을 끌어 만든 인공 연못 궁남지의 수계는 군수리의 백마강에서 샛강을 타고 터진목을 통하여 갯강죽을 지나 돌을 쌓아 만든 재방 독재와 개줄이 방죽으로 흘러 궁남지로 흘러 들었다.
이곳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마치 운하와 같은 역활을 하며 선박이 궁남지를 드나들었다.
다시 궁남지에서 오석산에서 흐르는 수로와 합수하여 왕포리와 중정리를 통해 염창리 현북리로 빠져나가는 수계가 있었다 한다.
이를 도성내 흐르는 하천이라 하여 사비하로 보는 일부 학자도 있다.
지명으로는 진산인 방송국자리 옆 여울이 있어 부여의 여울인 여구렁, 줄방죽, 큰비가 오면 용이 놀았다고도 하고 왕이 드나들었다 하여 용낭구, 성끝마을이라 성말리와 성밖, 사사신을 맞이하던 도성 서쪽의 사비의 입구 사비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