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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최규학·시집만들기

[輓李御寧先生] 이어령 선생의 별세를 애도하다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22. 4. 13.

輓李御寧先生
이어령 선생의 별세를 애도하다  (최영성 교수)

一瞥人間九十年
兼才學識世無肩
今隨大化魂長逝
必作修文地下仙

인간세상 한 번 훑고 나니
어언 구십 년이라
재주와 학문과 식견으로
세상에 어깨 견줄 이 있을까

이제 대화(大化)를 따라
영혼이 먼 곳으로 떠나시는구려
틀림없이 수문랑(修文郞)으로
지하의 신선이 되시겠지

주) 大化: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네 단계의 큰 변화. 유아기⋅청년기⋅노년기, 그리고 죽음을 말한다. 『열자(列子)』 「천서(天瑞)」 편 참조.
주) 修文: 수문랑(修文郞). 중국 진(晉) 나라 때 소소(蘇韶)라는 죽었다가 깨어났는데, 그가 저승에 가 보니,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과 복상(卜商)이 귀신 가운데 성자(聖者)로 대접을 받으면서 ‘문(文)’을 담당하는 수문랑(修文郞)으로 있었다고 한다. 안연은 삼십 대에, 복상은 1백 살이 넘어서 죽었다. 『한무 고사(漢武故事)』 참조.

〔해설〕
우리 시대 최고 지성인 이어령(1933∼2022) 선생이 2월 26일 오늘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2017년부터 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오면서도 회인불권(誨人不倦)의 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다. 그에 앞서 기독교에 귀의, 지성을 넘어 영성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그분에 대한 평가는 사람이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지만, 그만한 재주와 학문과 식견을 겸비한 어른은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신문에서 부음 기사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찡하였다. 지난 2월 18일 TV에서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는데, 무척 수척하였고 얼굴에 황달기(黃疸氣)가 깊어 ‘남은 날이 얼마 안 되겠구나’ 짐작하였었다. 만사(輓詞)로 절구 한수를 구상하였으나 그분의 존재가 너무 크고 높아 붓방아만 찧었다. 말과 글의 한계를 절감한다. (下平聲 先韻, 2022. 2. 26)


<감상>

시인 최규학

백사의 만사(輓詞)를 읽으며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 이어령 선생의 별세에 대한 최고의 애도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칠언절구 1수에 이어령 선생의 일생과 애도를 신묘하게 함축하였습니다. 플로베르가 ‘일물 일어설((一物一語說’에서 주장한 대로 “텅 빈 추상으로 떨어짐 없이, 한 단어로 그 문장을 훼손시킴 없이” 28자를 쐐기형 벽돌처럼 잘 조탁하였습니다.
이 시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시론집 「여원구 서(與元九書)」에서 밝힌 시의 조건을 고루 갖춘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감성이 깊고(根情), 시어가 풍부하며(苗言), 운율이 아름답고(花律), 의미가 확실합니다(實意)
지금으로부터 2년 4개월 전인 2019년 11월 4일 <부여발전연구회> 회원들이 선생님의 자택을 방문하여 2시간 특강을 들었는데 그때 스스로에 대해 말씀하시길 단국대학 모 교수가 자기를 가리켜 이율곡, 박제가와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천재라 하였는데 자기는 천재가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를 이룩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가 술이편 19장에서 “자왈(子曰) 아비 생이 지지자(我非生而知之者) 호 고민이고 지자야(好古敏以求之者也)”, “나는 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선생님은 부여고등학교 3학년 때 문예부장으로 교지를 편집한 경험으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문화부장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하게 되었다고 힘을 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각별히 대해 주셨는데 제가 모교인 부여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개교 70주년 기념으로 2016년 10월 20일 ‘이어령 헌시비’를 교정에 세운 공적이 있어서입니다. 시비는 시를 느티나무 형태의 스틸에 깎은 것으로 이어령 선생님을 특히 존경하는 임옥상 작가가 제작한 명품입니다.
재경 동문들이 시비 건립을 주도하였는데 부여지역 동문들이 교장실로 전화해서 본인이 동문이라고 하지 않는데 왜 시비를 세우냐며 강하게 항의하였습니다. 또한, 일부 교사들도 본받을 만한 분이 아니라며 항의하였습니다. 저는 고3 때 이어령 교수가 조경철 천문학자 외 1인을 모시고 와서 모교 후배들에게 특강을 하셨는데 그 이후로 이어령 선배님을 본받을 만한 분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김지수 조선비즈 기자의 인터뷰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본인이 말한 대로 “나는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다. 그래서 외로웠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일부 동문들에게나 고향에서는 존경도 못 받고 사랑도 못 받으신 점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직접 뵙고 느낀 것은 학문이 높은 것보다 더 위대한 점은 굉장히 순수하고 인간적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뵙는 순간 도를 깨우친 도인의 내공이 확 느껴졌습니다. 위대한 인물을 함부로 평가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경〉 대우모편(大禹謨篇)에 순(舜)이 우(禹)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말한,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묘하다 “는 말이 그대로 진리임을 느낍니다.
백사는 이 시에서 이어령 선생님이 최고의 석학이라는 것 한 가지만을 드러냈습니다. 전경부에서 이어령 선생님의 재주와 학문과 식견이 이 시대 최고라는 점을 드러냈고, 후 정부에서는 저승에 가서도 역시 최고일 것이라는 것을 재차 강조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다른 것은 사족이기 때문입니다.
‘일별인 간구 십 년(一瞥人間九十年)’에서 별(瞥)은 ‘언뜻 볼 별’, ‘눈 깜짝할 별’입니다. 이어령 선생의 90 평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는 것으로 인생무상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토로한 것입니다.
‘겸재 학식 세무견(兼才學識世無肩)’에서 견(肩)은 ‘어깨 견’입니다. 이어령 선생이 재주(才), 학문(學), 식견(識)에서 이 시대 최고임을 누구나 인정하기에 증거자료를 예시하지 않고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부여고 3학년 때 ‘사비의 노래’를 작사했고, 이근배 시인이 영전에 바치는 헌시에서 밝힌 대로 여섯 살 때 동화를 써서 천재라 불렀고, 23세에 쓴 ‘우상의 파괴’는 과거를 깨뜨리는 폭발음이었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문학의 베스트셀러 시대를 열었고, 한예종, 국립 국어연구원 설립, <문학사상> 창간, 88 올림픽의 굴렁쇠 소년 등 이 시대의 정신문화를 일깨운 업적은 필설도 다 할 수 없고 재론의 여지도 없기 때문입니다.
‘금수 대화혼 장서(今隨大化魂長逝)’에서 대화(大化)는 <열자(列子)> ‘천서 편(天瑞篇)’의 대화 유사(大化有四)로 사람이 한 생애에 유년기, 소년기, 노년기, 사망 기로 네 번 크게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령 선생같이 위대한 석학도 이 과정은 피할 수 없음을 탄식한 것입니다. 장서(長逝)는 ‘가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어령 선생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필작수문지하선(必作修文地下仙)’에서 수문(修文)은 저승에서 학문을 관장하는 성자(聖者)인 수문랑(修文郞)을 말합니다. 백사는 이어령 선생이 저승에 가서도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과 복상(卜商)과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되리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백사가 선배 학자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백사는 이어령 선생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경함을 감동적으로 은유하였습니다. 저도 백사의 뜻에 공감하며 ‘밤을 넘어선다’라는 뜻의 선생님의 아호 능소(凌宵)처럼 한민족이 정신문화의 밤을 넘어서게 하신 공로에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최영성 교수님 글에
최규학 시인의 감상평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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