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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행운)]/남는얘기

덕혜옹주 (일제 반역자: 이완용 윤덕용)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7. 4. 10.

[스크랩] 덕혜홍주

 

덕혜 옹주

원래 이 이야기는 '예전에 무지개를 이는 왕비'다음에 바로 적으려 했던 이야기입니다.

덕혜옹주와 이 방자 여사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인데 이 두명의 여사를 이야기하자면

당시 일본의 숨겨진 (숨겨졌다기 보다는 우리가 잘 집고 넘어가지 않는 뒷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덕혜옹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못 알려진 이야기중 하나입니다.

심지어 블러그들을 둘러보면 온갖 오류가 넘쳐납다.

그렇다고 학교나 교육기관에서 나오지 않는 이야기라 그대로 전해지기도 하구요.

 

12세에 즉위하여 역사적으로 소용돌이속에 묻혀있던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페위되고 순종에게 왕권을 넘겨줍니다.

그 후 국정에 관여할 수 없었던 고종은 환갑이되던 1912년 5월 25일 복녕당 양씨로 부터

딸을 얻게 됩니다.

복녕당 양씨는 명성황후 민비의 측근궁녀였는데 아관파천 당시 양씨의 시중을 받았고

환궁후, 양씨를 취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고종은 9남 4녀를 두었다고하는데 이중 왕자는 순종,의친왕,영친왕 3명만이 생존하고

딸은 이때 태어난 덕혜 1명만이 생존합니다.

 

 

 

덕혜옹주의 돌사진

 

 

 

덕혜는 후궁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공주는 아니였으나뒤늦게 얻은 딸에 고종의 사랑은 대단했다합니다.

삼칠일이 지나 50여일이되자 덕혜를 자신의 처소옆인 한명전으로 옮기고 덕혜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는 임금이 들어와도 일어나지 말라는 지시를할 정도였고 특별히 덕혜를위해 궁내에 유치원을

설립하고 귀족 자제들과함께 궁내에서 놀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5세가되자 옹주로 옹립하는 문제에서 당시 총독 데라우치가 고국에 덕혜만한 나이에 딸이 있을것을 이용,

오히려 데라우치가 옹주추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합니다.

이제 덕혜는 덕혜옹주로 앙족에 등재됩니다.

 

이때 쯤, 영친왕 이 은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고 이 은은 11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가게됩니다.

1916년 영친왕이 강제로 일본의 황족인 (이 방자여사의 아버지는 천황의 조카임) 마사코와

약혼을 하게됩니다.

대부분 일본이 마사코를 영친왕에게 결혼 시킨것을 불임녀라 대를 끊기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좀 잘못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당시,일 천황의 황후 후보는 2명이 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방자 여사로 알려진 나시모토 마사코, 마사코의 4촌동생인 나카코와 후보로 거론되나

대체적으로 마사코쪽이 황태자비로 낮낟는 펴을 받습니다.

하지만 당시 군부의 강력한 지지를 업은 나카코측은 마사코가 불임녀라는 허위 진단서를 만들고

정치적으로 지지 기반이 약한 마사코를 누르고 황후에 오릅니다.

차후 이 방자여사는 불임관계 진찰을 받은적이 없다고 증언하기도하고 실제로 진찰를 담당하였다는

의사 3명은 본적도 없었으며 이 3명은 모두 자살해버리는 의문을 남겨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죠.

이런일들이 당사자들의 나이 14세쯤에 벌어진 일이니 당시 일본 군부가 황실을 얼마나 휘둘렀는지

보여 줍니다.

이 당시 민종 융합이라는 이유로 희생된 황족은 마사코만있는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시기에 천황의4촌동생뻘인 황족 아이신카쿠라(사가) 히노라는 여성이 같은 이유로 타국에

시집을 갑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뭐 우리역사도 아니니) 마지막황제로 유명한 부의의 동생인 왕자 부걸에게

정략 결혼되어 만주국으로 시집을 가죠.

아이러니 인지 모르지만 마사코,히노 두 여인 모두 자신의 남편과 지극한 사랑을 했고

모국인 일본보다 남편의 나라에 충실합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과 흐르는 역사속에서 모두 편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사가 히노의 이야기는 2003년 '비운의 왕비'라는 SP로 방영되었고 후속편격으로 2006

'무지개를 이은 왕비'가 방송됩니다.

약혼이 결정되자 마사코는 댕기를 따고 학교에 다녔는데 의외로 마사코에게 힘을 준것은 어머니

였다고 합니다.

'일국의 왕세자분께 시집을 가는것이니 정하게하고 보필하라'는 말은 천황후에서 신민지국의

정략혼인에 희생물이라는 현실과 다르게 어머니는 상당히 의외의 말들과 충고를 하신것으로

전해집니다.

 

다시 옹주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고종은 이 은의 일을 보면서 김황진을 불러 은밀히 덕혜옹주의

약혼을 추진하려고 적절한 사람을 물색합니다.

이에 김 황진은 자신의 조카 김 장한을 추천하고 혼약을 결정 지으나 이를 알아차린 일본은

김 황진을 궁에서 퇴출 시킵니다.

어떤 블로그는 김 을한을 덕혜옹주의 약혼녀라고 써있는데 사실이 아니고 김 을한은 김 장한의

친형입니다.

후에 서울신문사 기자로 지내면서 일본내 왕족에 다방면으로 노력합니다.

당시, 은밀한 고종의 내부 추진이 들통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노력 때문인데 친일파는

제쳐두고 히로부미가 구축한 궁내의 세력은 바로 궁녀들입니다.

각종 선물과 선심으로 궁녀들을 모두 자신의 편으로 두었고 궁내의 비밀이란 없어져버리고

결국 이 문제는 고종의 독살설로 이어집니다.

여기에 (이 완용,윤덕용등) 친일파들까지 가세하여 조선 궁내를 휘저었으니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실제적으로 이 완용보다 윤 덕용의 패악이 더 심했고 고종은 천하의 가장 나쁜놈으로 이 완용이

아니라 윤 덕용을 지목했다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본인으로 조선 1907년부터 궁내에서 15년간을 근무한 곤도 시로스케의

'대한제국 황실비사'에서 자세히 나옵니다.

곤도는 지극히 일본적이고 딱 그만큼의 생각을 사람이었으나 공무원으로 가감없이 궁내의 각종

일들을 기록했고 순종을 상당히 존경했다고 합니다.

 

 

 

덕혜옹주의 칼라 복원사진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는일이 발생합니다.

공종이 독살 됐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고 전국이 뒤숭숭해지고 밖으로는 국상으로

영친왕의 혼인이 미뤄집니다.

독살설은 곤도의 글에서도 언급된 친일파에 연루된 궁녀들이 비소를 타서 독살했다는 것이었고

현대에 이르러 구 양근씨가 일본 외무성에 보관된 당시 극비문서에서 기록을 찾아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문서에는 친일파들이 궁녀 2며을 시켜 비소를 타 독살한 것으로 적혀있고

윤 덕용의 소행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도 관련이 있을것으로 보여지긴 합니다만 이미 종이호랑이였던 고종을 독살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고( 이미 순종 통치기간이 상당했고 고종은 실권자체가 없었으니)

고종이 가장 싫어했던 인물이 윤 덕용이었다는 것으로 유추하면 맞는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덕혜옹주는 8세의 나이였고 창덕궁에서 어미니 양씨와 기거중이었습니다.

국장에 맞추어 항일운동이 급격히 일어나고 3.1 만세운동으로 번집니다.

이 해 11월 9일 국제사회에 독살을 알리겠다고 국외로 탈출하려던 의친왕 이강이 신의주에서

체포되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덕혜옹주의 일생은 가시밭 길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영친왕의 미루어졌던 결혼식이 일본에서 치루어집니다.

결혼식장으로 향하던 마사코비의 마차에 폭탄이 투척되나 불발로 화를 면하기는 했지만

영친왕은 조선에서 완전 매국노로 탈바꿈됩니다.

당시의 신문기사입니다.

일본의 원수의 여자를 취하다.

금일부터 영친왕이라는 존칭을 폐하리라 영친왕이라 칭하는 이은은 아비도 나라도 없는 금수인

고로..."

과연 언론이 정도의 말을 할 만큼 일제항거에 투신했었나는 모르겠고 아무튼

영친왕은 이때부터 완전히 조선의 역사에서 지워지기 시작합니다.

 

덕혜옹주는 현재의충무로 극동빌딩자리에 있었던 일출국립 심상소학교에 입학합니다.

조선에 있던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던 학교로 이곳에서 다니던중

1925년 3월 24일 덕헤 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됩니다.

 

 

 

심상소학교시절의 덕혜옹주

 

 

 

또다시, 영친왕의 경우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3월 28일 경성역을 출발하여 동경에 도착한 덕헤옹주는 그나마 다행인것이 이복 오빠인 영친왕의

자택으로 가게됩니다.

일본에 도착한 덕혜옹주는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이 방자여사의 당시 덕혜옹주를 맞이한던 회고는 이렇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조선에 갔을때 본 옹주와는 영 달라져 있었다.

처음 봤을때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하고 영롤했던 눈초리는 아예 찾을 수 없었다."

먼 여행에 피곤하지 않은지 묻자 물음에 일본말이라 그런지 대답이 없었다.

다시 조선어로 역시 대답이 없었다."

조선에 왔을 당시, 아들 진을 잃기도했지만 이 방자여사는 덕혜옹주를 무척 귀여워했고

덕혜옹주도 이 방자여사를 무척 따랐었다는데 완전히 변한것 이었습니다.

덕혜옹주는 완전히 말이 없고 표정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것입니다.

 

덕혜옹주는 일본의 황족들과 지방 번주들이 입학하는 동경학습원에 입학합니다.

학교는 잘 다녔으나 역시나 말이 없고 부전공으로 프랑스어를 공부하던 덕혜는 여기서 또한번

충격을 받습니다.

동창생이 (일본정치가인 오자키 유키오의딸 소마 유키카)매일 보온병을 가지고 등교하는

덕혜옹주에게 왜 그런지를 묻자 덕혜옹주는 "독살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자

이 동창생은 다시 묻습니다.

"내가 너라면 독립운동을 나섰을텐데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냐?"라는 질문에 덕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뒤로 덕혜옹주는 더욱더 말이 없어집니다.

이때부터 약간의 정신병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1929년 덕혜옹주의 어머니 양씨가 암으로 별세합니다.

상을위해 귀국한 덕혜옹주는 낙선재의 전하내외를 알현한 후, 성복전으로가 상을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2년전 제정된 왕궁가궤범때문에 상복을 입지 못하고 상을 치르고 장례 2일만에 총독부의

지시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국상과 덕혜옹주의 귀국으로 다시 항일운동으로 번질까봐 총독부에서 내린 지시입니다.

상을 치르고 일본에 돌아온 덕혜옹주는 완전히 사람이 달라집니다.

이 방자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등교를 거부하고 식사도 거르기 일수에 밤이면 갑자기 집을 나가

하염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일등이 잦아집니다.

결국 의사를 불러 진단을 핸결과 조발성 치매 (정신 분열증)으로 진단이 됩니다.

 

1930년 덕혜옹주의 결혼이 황실에서 추진됩니다.

신랑은 당시 대마도영주의 아들이며 도쿄대학 여문학부에 재학중이던 소오 타케유키백작으로

내정됩니다.

당시 황실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부서의 장이 바로 나카코황후였으니 이는 나카코황후의 지명이라 보아야

할것 같고 나카코황후가 천황가에 황후가 된서이 일본군부에 황실휘두르기에 결정적 역활로 보는 저는

어쩌면 일본의 역사가 현재처럼 변하는데 가장 큰 사건중 하나라고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방자여사의 기록등으로 보면 소오백작에게 덕혜옹주가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을 속인것 같습니다.

물론 백작이라는 귀족이 왕가와 결혼하는 성은이기도하며 황국가의 제의를 거절한다는것도 말이

어렵지만 아무튼 소오백작은 덕혜옹주의 상태를 모른채로 결혼한것으로 보입니다.

어쩃든 1931년 5월 덕혜옹주와 소오백작의 결혼식이 치뤄집니다.

귀족과 왕실의 결혼이지만 사실 가장 슬픈 결혼식에 가장 축복받지 못하는 결혼으로

소오백작은 양자였기 때문에 양부모의 손에 덕혜옹주는 오빠인 영친왕 내외만이 참석하고

덕혜옹주의 상태때문에 손님도 없는 쓸쓸한 결혼식입니다.

조선에서는 또 한번 왕가가 배신했다고 들 끓었고 조선일보는 덕혜옹주의 결혼식 사진에서

소오백작의 사진을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덕혜옹주도 이 뒤로는 조선에서 지워지기 시작합니다.

 

 

 

결혼후 대마도 방문시의덕혜옹주와 소우백작

 

 

 

 

덕헤옹주는 시집인 대마도로 인사를 다녀오게되는데 당시 대마도에 있던 재일조선인들은 탑을 세우기도 합니다.

문제는 덕혜옹주의 상태로 당시 대마도주의 가신일을 대대로 해오던 혼마치오가의 집사가 일기에

기록한 덕혜옹주와의 첫 만남을 보면 "인사를 올리자 조용히 답례만할뿐 말씀이 없었다.

계속해서 소리내어 웃기를 하는등 변적인 증세를 보였다. 백작님이 심정이 어떻까 싶기도하고

한숨이 나올뻔 했다"라고 적힌것을 보면 상당히 병세가 심했더 모양입니다.

결혼후, 소오백작은 바깥과의 교류를 끊고 덕혜옹주와 둘이 칩거합니다.

국내 수많은 블로그에서 소오백작을 나쁘게 쓰고있는데 (애꾸에,곱사등이라는 말도 있고

결혼조건으로 백작이 됐다라는것도 있고, 덕혜옹주를 강간해서 결혼시켰다라는 말도 있고

상당히 좀 지저분합니다) 실제로 신혼시절 상당히 덕혜옹주의 병세가 완화되었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소오백작이 잘 대해준듯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마사에가 태어납니다.

소오백작은 딸에 이름을 아버지의 "방"와 덕혜옹주의 "혜"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고 딸에대한

애정이 유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신중 덕혜옹주는 호전된 병이 재발되고 더욱 악화됩니다.

임신중 스트레스가 가중된듯 합니다.

이후 덕혜옹주는 세상과 떨어져 살게 됩니다.

그나마 아직은 가세가 있어 후일에비해 나은 편이죠.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일본은 신헌법이 제정됩니다.

황족을 제외한 귀족이 폐지되고 모두 평민으로 전락합니다.

신분이야 그만 이지만 문제는 신 헌법에 따른 재산세가 문제가 됩니다.

무려 70%가 넘는 재산세가 각 귀족들에게 부과되고 영친왕의경우 전 재산을 매각하여 960만엔이

환산되어 730만엔인가를 재산세로 몰수되고 나머지는 사기 부동산업자에 제값을 받지 못하고

사기를 당하는등의 일이 벌어지고 소오백작은 재산세를 내기위해 가종 재산을 매각하고도

집안의 가재도구가 차압되는 일이 벌어지는등 엄청난 생활고에 빠지게 됩니다.

즈언에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중학생이던 마사코가 가사일을 할 사람을 둘 수없어 집안일을

맡아하며 어머니의 병수발까지하는등 상황이 아주 안 좋았습니다.

그해 소오백작은 덕혜옹주를 도쿄의 외곽에 있는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 시킵니다.

병원비는 영친왕의 매달 부담한 것으로 보아 조카인 마사에등을 생각하면 아마도 소오의 경제는

완전히 밑바닥까지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입원 5년후인 1950년1월, 일본의 신문사 특파원으로 들어온 김 을한은 덕혜옹주의 근황을 알아보기 위해

소오백작에게 전화를 해보고 병원에 입원중인것을 듣습니다.

다음날 영친왕과 통화로 병원비를 영친왕이 부담한다는것과 병원의 위치를 안 김 을한은 자신의

제수씨가 될뻔했던 덕혜옹주를 면회합니다.

당시 영친왕도 이 방자여사의 기록을 보면 11세에 일본에와 군에서만 있었던 영친왕은 교우관계라는

것도 대부분이 군인이라 모두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뿐이었고 과도한 재산세와 사기마저 겹쳐

상당히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이를 본 김 을한은 본국의 이 승만정권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덕혜옹주의 본국 송환을 추진하나 이승만 정권은 냉담하기만 합니다.

당시 김 을한의 말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것과 다르게 영친왕내외를 방문했을 당시

유려한 궁중조선어를 구사하는것에 상당히 놀랐다고 합니다.

이 때쯤 위에서 잠깐 언급한 부의의 동생 부걸과 결혼한 히노도 비슷한 처지에 고초를 겪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패망할때 소련군이나 중국군에 체포되는것보다는 미군에 포되는것이 낮겠다는 판단하에 부걸은

아내 히노와 두딸을 데리고 일본으로 탈출중 부걸 자신이 소련군에 체포됩니다.

히노와 두딸은 일본으로 탈출에 성공하구요.

이후 부걸은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겨져 모택동치하에서 강제 수용되고 15년후, 일본에 있는

큰딸의 편지에 감명받은 중국의 선처가 있을때까지 생 이별을 합니다.

 

1955년 법적으로 부부였던 소오백작은 덕혜옹주와 이혼합니다.

결혼시작부터 25년의 결혼 생활을 막마한 소오는 이혼을 반대할 나카코황후의 사망과

의친왕의 아들이 일보부인과 이혼한것에 결정적 영향을 받은듯 합니다.

소오백작은 이혼후 일본여자와 재혼합니다.

부모에 이혼때문인지 1년후인 56년 24세가 된 딸 마사에는 고마다케산에서 자살하겠다는

유서만을 남기고 가출합니다.

고마다케산 일대으 ㅣ대대적인 수색작업에도 불구하고 마사에도 시신도 찾지 못하고

마사에는 그렇게 행방불명이 됩니다.

(어떤 블러그는 귀국하다 현해탄에몸을 던졌다는 블러그도 있더군요 ㅡ,.ㅡ)

비극적인 인생은 서로 닮는것인지 부걸의 큰딸도 일본인과 결혼하겠다고하자 부모가 중국인이

(기실 부걸의 딸들은 거의 일본에서 자랐으니 당연한것인데) 아니라고 반대하자 자살합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부걸내외는 둘쨰딸의 결혼에는 일절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1961년 11월 미국 순방길에 일본을 들른 박정희 의장에게 김을한은 다시 한번 덕혜옹주의 귀국을

부탁합니다.

당시 정치적으로 왕족과 전혀 관련이 없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필요가

없는 박의장은 즉각 조치를 취해주고 두라후인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공항에는 덕혜옹주의 유모였던 볍복동씨등이 마중 나와 덕혜옹주를 맞이합니다.

7년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나아지지는 않고 69년 낙선재로 거처를 옮겨

영생을 보냅니다.

이 시기엔 영친왕과 이 방자여사도 귀국하여 낙선재에 같이 기거하게됩니다.

1972년 덕혜옹주의 전 남편인 소오백작이 낙선재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전 부인을 한번 만나고 싶다는 소오백작의 면회는 당시 이 응재낙선재 비서실장에의해

거절됩니다.

당시 낙선재에 기거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19명정도였고 정부의 지원금은 문화재청의 낙선재

유자관리비와 보조금이 나왔는데 상당히 부족하여 더 많이 줄것을 요청합니다.

이 문제는 상당히 안좋은 일이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이 왕가 자체 재산이 모두 나라에 환수된것이 아니라 중간에 착복되었기 때문에 정부도 주기가

모호하고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무일푼에 가까웠기 떄문인데 이승만 정권 당시 벌어진 일때문입니다.

해방 직전 옛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일본 방송인 출신 작가 혼다 세쓰코는 1980년 한국에 번역된 책 <비련의 황태자비 이방자>

(범우사)에서 영친왕의 비서를 지낸 조중구의 메모를 통해 1945년 해방 직전 옛 조선 황실의

재산 목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 조선 황실의 재산은 부동산 △임야 6만4천 정보(1정보는 3천 평) △밭 91만 평 △논 32만 평

△택지 31만 평, 동산은 △미술품 1만 수천 점 △은행예금 680만엔 △유가증권 250만엔

△현금 50만엔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메모에 전국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궁전과 묘지는 빠져 있습니다.

1954년 제정된 ‘구황실 재산처리법’으로 이 재산은 국가 소유가 됐지만, 온전히 국고로

보전되지 못합니다.

김을한씨는 <인간 영친왕>에서"동산은 말할 것도 없고 임야나 토지 등의 막대한 부동산이

불하나 임대계약의 형식으로 당시 권력가들이 나누어먹기로 다 가져갔다며 이렇게 털린 땅이

서울 근교만 해도 수십만 평은 된다”고 적었습니다.

꼬리가 길면 결국 잡히게 돼 있는 법인 모양입니다.

보다 못한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당시 대한여행사 이사장이던 오재경(작고)씨를 구황실재산

사무총국장으로 임명해 사무총국 개혁에 나서려합니다.

그는 문교부 국장으로 있던 이창석씨를 데려다가 옛 황실의 재산 관련 서류를

꼼꼼히 모아 조사에 돌입하려 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1960년 6월6일 밤 서류를 쌓아둔 창덕궁 내 구황실재산 사무총국이 불에 타 전소된 것입니다.

불이 난 뒤 이씨는“이것은 방화가 확실하다고 말했지만 사건은 유야무야 덮히고 말았습니다.

김을한씨는 <인간 영친왕>에서“그 뒤로 10여 년 동안에 벌써 여러 사람의 사무총국장이 파면

또는 철창 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보아 구황실 재산이라는 게 얼마나 무문하고 이권의 대상이

돼왔는가 알 수 있다”며“사무총국이 황족들에게 겨우 몇십만원의 생활비를 주며 자기 돈을

거저 주듯 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일로인해 고종,순종 당시의 왕실기록과 당시 사료도 전부 소실됩니다.

현재 이 글을 작성하는데 가장 큰 참고자료인 KBS의 한국사전에의 내용도 거의 전부다가

일본의 기록으로 제작된것입니다.

이 방자여사는 귀국하자마자 자행원을 설립하고 67년 칠보연구소를 설립하고 자개를 만들어

70년 이후 이 방자여사는 자개등의 공예품을 일본으로 팔러다니고 이 자금으로 영친왕이 바래왔던

교육사업은 아니지만 수원의 자혜학교, 광명시의 명혜학교를 설립합니다.

덕혜옹주는 유모등과함께 여생을 보내고 간혹 제정신이 돌아왔을때 적은 낙서에는 낙선재에 오래살고

싶다는것과 영친왕과 이 방자 여사가 보고싶다는것과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글을 적기도 합니다.

 

말년의 덕혜옹주

1989년 일생의 거의 전부를 제정신이 아닌채로 살아간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는 4월 21일 생을

마감합니다.

덕혜옹주가 떠나자 이 방자여사도 생의 모든일을 마쳤다는듯이 9일후 작고합니다.

이렇게 조선의 궁궐은 완전히 주인을 잃게됩니다.

스크랩 원문 : 풍수와 함께하는 문화답사

                                                                                                                                        

 

-덕혜 옹주-

1912년 5월 25일, 황제의 자리에 물러나 있던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의 거처

 덕수궁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1912~1989)가 태어난 것이다.

고종이 회갑을 맞던 해에 얻은 늦둥이 딸이었다.

 

어머니는 소주방 나인 출신으로 고종의 후궁이 되었던 복녕당() 양씨.

덕혜옹주는 1907년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 퇴위를 당한 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고종에게

삶의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은 망국의 옹주에게 만만치 않은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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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황제는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3남 1녀만이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하여 덕혜옹주가 사실상 유일한 딸이었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2 덕혜옹주의 어머니인 귀인 양씨(1917년경)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고종의
늦둥이 딸로 태어나다

 

덕혜옹주 돌사진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당시 고종의 일상을 기록한 덕수궁 찬시실(: 오늘날의 비서실) 일기에는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고 하여 덕혜옹주의 탄생과 함께

 고종이 직접 산모를 찾았음을 기록했다.

 

대개 초칠일이 지나야 산모를 찾는 관례에 비추어 보면 고종의 행동은 이례적이었다.

환갑에 얻은 늦둥이가 그만큼 귀여웠기 때문일 것이다.

 

덕혜의 출산 이후 고종은 늘 그녀와 함께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1916년 4월에 고종은 덕수궁의 준명당()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게 동년배 5~6명을 함께 이곳에 다니게 했다.

 


유치원 시절의 덕혜옹주(앞줄 가운데)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준명당의 건물 바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홈이 파여 있는데,

 아이들이 놀다가 행여 다칠까 봐 난간을 설치한 흔적이다.

딸을 위한 아버지의 세심한 배려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5월 16일 고종은 직접 유치원 입학식에 참석했다.

함녕전에서 준명당까지는 짧은 거리였지만 덕혜는 가마를 타고 등교했으며, 유모 변복동이 수행했다.

 

 


덕수궁 준명당, 난간을 설치한 흔적인 둥근 홈이 있다.(붉은 색 네모 표시)


덕혜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아닌 아버지 고종과 함께 보냈기에,

아버지에 대한 정이 그만큼 깊었다.

고종에게 덕혜는 그야말로 쓸쓸한 말년에 찾아온 한줄기 빛이었다.

 

1918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순종비), 덕혜옹주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송두리째 바뀐

 

그러나 두 부녀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것이다.

 

덕혜의 나이 이제 겨우 8살.

개인적인 슬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친의 죽음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고종 승하 전까지 덕혜옹주의 거처였던 덕수궁 함녕전


고종 승하 후 덕혜는 거처를 함녕전에서 어머니가 있는 광화당으로 옮겼다가,

고종의 혼전(殿)이 창덕궁으로 옮겨지면서 창덕궁 관물헌에 거처를 잡았다.

 

1921년 고종의 삼년상이 끝난 후 10살이 된 덕혜의 교육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조선 황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일제는 덕혜에게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시키려 했다.

 

1921년 4월 덕혜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에 입학했다.

 당시까지도 그녀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었다.

 

『순종실록』 1921년 5월 4일의 기록에 “복녕당 아기에게 덕혜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는 내용이 보인다.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덕혜의 불운은 일본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영친왕(1897~1970)에게 그랬듯이 덕혜에게도 일본 유학을 강요했다.

 

일제의 압박에 굴복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했다.

14세의 어린 소녀는 정든 궁궐을 멀리 떠나 일본이라는 낯선 이국 땅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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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14세 때 양장을 착용한 모습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이국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

 

1925년 3월 30일 덕혜가 동경에 도착해서 간 곳은 오빠인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가 거처하던 집이었다.

이방자는 수기에 “덕혜옹주가 도착한 날 밤 그의 침대 곁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조용히 잠든 앳된 얼굴에는 애수가 서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며

아픈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훗날 덕혜와 이방자는 40여 년 만에 낙선재에서 노년의 모습으로 재회를 하게 된다.

 덕혜는 영친왕의 집에서 여자학습원에 다녔다.

 

당시 덕혜는 늘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일본인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덕혜는 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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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종의 이복동생이자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황태자비 이방자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2 생모 양씨의 장례식에서



이 무렵 덕혜를 더욱 슬프게 한 것은 1926년 오빠 순종의 죽음과 1929년 생모 양씨의 죽음이었다.

덕혜는 이국 땅에서 말 그대로 고아가 되었다.

 

정략결혼의 비극적인 결과

 

1931년 5월 8일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에 크게 분노했다.

덕혜가 대마도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일제에 의한 정략결혼으로, 일본인 아내를 맞은 영친왕과 같은 운명을 밟은 것이다.

 조선일보는 신랑의 얼굴을 삭제한 결혼식 사진을 실어 분노한 민심을 대변했다.

 

당시 궁녀들 사이에서는 덕혜의 남편이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실제 사진을 보면 남편 소 다케유키는 훤칠한 미남이었으며,

동경대 영문학과를 나온 당대의 엘리트 학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결혼 1년 후에는 딸 정혜()가 태어났고 덕혜는 얼마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결혼 직전의 덕혜옹주와 남편 소 다케유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그러나 망국의 옹주로서 겪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컸던 탓일까?

덕혜는 결혼 후 조현병에 시달렸다.

 

남편은 집에서 간병을 하다가, 1946년 정신병원으로 덕혜를 옮겼다.

 일제의 패망 후 소 다케유키는 더 이상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덕혜는 법적 보호자였던 영친왕과의 합의를 통해 남편과 이혼을 했다.

 1956년 딸 정혜의 실종과 죽음은 덕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나라를 빼앗긴데다가, 부모도 일찍 잃고 남편에 이어 자식까지 떠나보낸 것이다.

 

망국의 옹주에게 다가온,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가혹한 운명은 결국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졌다.

 

정신질환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다

 

 

1962년 1월 26일,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출처: 동아일보>



1945년 해방 이후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덕혜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고국의 궁궐에 가기를 원했다.

 이 무렵 서울신문의 김을한 기자가 덕혜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그러나 조선 황실의 존재에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다시 탄원서를 올린 끝에 마침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덕혜는 1962년 1월 26일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37년 만의 귀국이었다.

 14세의 꽃다운 소녀가 어느덧 51세의 중년 여인으로,

그것도 풍상에 찌든 얼굴에 초점 없는 눈매를 한 채 돌아온 것이다.

 

당시 일간지에서는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산천이 낯선 외국으로 끌려간데다

왜인과 뜻하지 않은 강제결혼을 하게 되자 모든 것이 구슬프고 무서워

세상살이를 체념하고 살려다가 심한 고민 끝에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그녀의 아픔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이 생을 마친 창덕궁의 낙선재.


덕혜는 귀국 후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요양했지만 병세는 크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가 1967년 무렵부터 말년을 보낸 거처는 낙선재()였다.

 

조선 황실의 마지막 여인들, 낙선재에서 삶을 마치다.

 

낙선재는 모두 세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1847년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준 공간으로,

헌종의 사랑채가 낙선재, 경빈 김씨의 거처인 안채가 석복헌(),

그리고 대비인 순원왕후를 위해 중수한 건물이 수강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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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 외경

수강재



낙선재는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이 집무실로 사용했으며,

순종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인 1912년 6월부터 주로 이곳에서 거주했다.

이때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가 석복헌에서 거하다가, 1966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에 환국한 영친왕 이은()은 낙선재에서 1970년에 생을 마쳤다.

 덕혜옹주는 귀국 후 수강재에서 머물렀다.

덕혜옹주가 돌아온 이듬해에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1901~1989)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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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는 귀국한 시누이 덕혜옹주를 낙선재에서 맞았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2 역사의 격랑 속에서 굴곡진 삶을 살다 간 덕혜옹주(1923년경)




조선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이방자와 덕혜옹주가

낙선재와 수강재에 함께 머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만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9일 뒤인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생을 마감했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고생을 하며 불운한 삶을 살았던 덕혜옹주.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 장이 남아 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 대한민국 우리나라”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다짐과

조선 황실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싶은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는 글이다.

 

평범한 신분이 아니었기에 역사의 격랑 속에서 굴곡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덕혜옹주의 아픔을 기억하며 낙선재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