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때그때 생생화보]/풍양조씨이야기

신정황후 풍양 조씨(神貞皇后 豐壤 趙氏)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3. 4. 29.

신정황후 풍양 조씨(神貞皇后 豐壤 趙氏)

황후는 1806(순조 8)에 풍은부원군 만영(萬永)과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恩津 宋氏) 사이에서 24녀중 두 번째로 태어났다. 숙부는 나주목사 원영(原永)과 영의정 인영(寅永)이며 조부는 효문공 진관(孝文公 鎭寬)이고 증조부는 문익공 엄(文翼公 曮)이다.

1819(순조 19)에 익종(翼宗) 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행하였고 1827년에 헌종(憲宗)을 낳으셨고 1830년에 익종이 승하 하였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함에 따라 헌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49(헌종 15) 헌종이 승하하자 대를 이어 철종(哲宗)이 등극하게 되었다.

순조의 왕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승하됨으로서 익종(翼宗)으로 추존 받았으며 그의 왕비인 풍양조씨 조대비도 헌종을 낳았을 뿐 왕비로서의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3대를 내려누린 안동 김씨 세도에 깔려 한을 품고 살아왔다.

철종이 병석에 누워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나돌 무렵 조대비는 그의 친정 조카인 조성하(趙成夏)로부터 편지 한통을 은밀히 전해 받았다. 그 편지는 조성하의 장인인 이호준(李鎬俊)이 전한 것이요. 이호준과 막역한 사이인 흥선대원군의 밀서였다. 처가가 같은 여흥 민씨이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이호준의 서자인 이윤용(李允用)과 대원군의 서녀가 혼인을 한 겹사돈이다.

그 편지는 후사가 없는 철종의 후계로 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천거하는 밀서였다. 대통의 승계자를 왕이 정하지 못하고 죽으면 대비가 결정하게 되어 있으므로 철종이 숨 거둘 때까지 안동 김씨의 접근을 막기만 하면 조 대비는 수십년 원한을 풀 기회를 잡계 되는 셈이다.

김좌근 및 김문근 부자, 그리고 김병학 형제 등 안동 김씨 세도가들은 철종의 병문안을 핑계로 세도를 이을 계책을 세우고자 대궐을 들렸으나 조 대비가 미리 병석을 차지하고 접근을 금한 가운데 철종은 눈을 감았고 그 순간 대권의 상징인 국새(國璽)는 조 대비의 치마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또한 조 대비는 대왕 대비가 되었다.

이어서 이와같이 망극한 때를 당하여 국가의 안위가 한시가 급하게 되었으니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입승대통하게 하라라고 명령 하였다.

이 정치 드라마로 대권은 고종에게 돌아갔고 조 대비는 수십년 한을 풀었으며 그후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 기간에 미국, 영국,러시아, 청국, 일본 등 각국이 물밀 듯 수교와 통상을 요구하여 왔으나 무난하게 물리쳤다. 공로로는 경복궁 중건을 명하였고 순조실록을 완성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과 육전조례(六典條例)를 편찬 하였다.

1등 공신인 이호준은 고종 등극과 더불어 벼락 출세, 군수직에서 승지. 참판, 전라관찰사, 병조, 형조, 이조 판서를 두루 지냈고 그의 양자인 이완용은 총리대신으로 그의 서자인 이윤용은 군부대신으로 수직 상승을 하였다. 참고로 조성하와 이윤용, 이완용은 처남 매부간이다.

1890(고종 27) 경복궁의 흥복전에서 승하하니 수는 83세였다. 묘는 동구릉의 수능(綏陵 : 翼宗陵)에 합부되어 있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