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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대통(행운)]/남는얘기

[2010 '캠퍼스 DNA'가 달라졌다] 자격증 따려 속성 강의 매달려… 한자 2급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0. 8. 5.

[2010 '캠퍼스 DNA'가 달라졌다] 자격증 따려 속성 강의 매달려… 한자 2급도 '大韓民國' 제대로 못써

 

 

[2010 '캠퍼스 DNA'가 달라졌다] [5]'스펙'쌓기에만 올인
컴퓨터 자격증 보유자가 엑셀 표 하나 제대로 못짜
"스펙은 多多益善" 잘못된 취업 상식 대물림

'한자 2급, 6일이면 제대로 끝납니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안암동 고려대 캠퍼스 곳곳에는 한자 2급 검정시험 대비 특강(特講)을 선전하는 학원 홍보물이 붙어 있었다. '취업필수 스펙-업(spec-up)', '기출 예상 문제까지 완벽 정리!! 6일 듣고 떨어지면 취득할 때까지 무료 재수강!!' 같은 글귀가 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법학신관 2층 강의실에서는 '한자 2급, 8주 완성' 강의가 한창이었다. 수강생 20여명이 3시간 동안 강사가 전하는 한자 150자의 음(音)과 훈(訓), 속성 암기법에 귀를 기울였다. 공대생 이모(26)씨는 "남들이 다 갖고 있는데 나만 없으면 취업할 때 밀릴까봐 어쩔 수 없이 등록했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성균관대 호암관에서 8주짜리 한자 속성 강의를 들은 권오진(25·고분자시스템공학과3)씨는 "한자 2급 자격증은 취업의 필수 스펙"이라며 "입사 때 자격증 개수는 대학 시절의 성실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스펙’쌓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3일 오전 한자능력검정시험 2급을 단기간에 합격하게 해준다는 업체들의 홍보물이 고려대 캠퍼스 곳곳에 붙어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각종 자격증을 따기 위한 요즘 대학생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자격증 개수와 입사 가능성은 정비례한다", "경쟁자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다양한 자격증으로 이력서를 '도배'해야 한다"는 대학생들의 목소리엔 절박감이 묻어난다.

'한자 능력 자격증'은 토익(TOEIC)·토플(TOEFL) 등 영어 성적,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과 함께 대학생들의 '필수 스펙 3종 세트'에 꼽힌다. 고려대 학생은 졸업 전까지 한자 2급 자격증이나 교내 자체 한자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성균관대 학생은 한자 2급 자격증이나 일정 수준 이상의 토익 점수를 제출해야 한다. 삼성그룹 등 기업체 채용 과정에서는 자격증 소지자에게 가산점을 주기도 한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한자 2급 자격증 시험에 응시한 대학생(19~23세)의 수는 2006년의 313명에서 2009년 1만2029명으로 늘었다. 2007년 말 국가공인 자격증으로 인정받은 뒤 응시자가 급증했다.

한자 자격증을 취득한 대학생은 이렇게 늘고 있지만 이들이 자격증에 비례하는 한자 실력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속성 강의가 '수박 겉 핥기 식', '점수 따기 식'으로 진행돼 자격증이 있어도 한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본지가 서울 시내 고려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 등 4개 대학 재학생 중 한자 자격증을 갖고 있는 대학 4학년생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모의 이름을 정확히 한자로 쓴 대학생은 31명에 불과했다. 아버지 이름 '용태(龍太)'를 '용견(龍犬)'으로 쓴 학생도 있었다. '고울 려(麗)'자를 제대로 쓴 고려대생은 65명 중 18명에 불과했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정확히 쓴 학생은 46명에 불과했다. '대조민국(大朝民國)'으로 잘못 쓰거나 '한(韓)'자와 비슷한 '그림을 그린' 학생이 많았다.

지난 4월 숭실대에서 '한자 2급 8주 완성 강의'를 수강한 서강대생 한동윤(25·경영학과4)씨는 "강사가 '한자 자격증은 한번 따 놓으면 유효기간이 평생'이라고 자랑하듯 말했다"고 했다. 당시 강사는 2급 시험용 2000자 중 500자를 찍어주며 "이것만 달달 외우면 70점을 넘겨 합격할 수 있다" 말했다고 한다.

한자 2~3급 자격증을 갖고 있는 대학 졸업반 학생들이 적은‘대한민국(大韓民國)’.
서울대 국사학과 노명호 교수는 "교양 수업시간에 한자를 쓰면 학생들이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해 아쉽다"며 "파워포인트로 강의 자료를 만들 때에도 한자 옆에 음을 병기(倂記)한다"고 말했다.

사무용 프로그램의 활용능력을 측정하는 MOS(Microsoft Office Specialist) 자격증도 최근 대학생들이 많이 취득하는 '스펙'이다. MOS 시험을 주관하는 YBM시사 관계자는 "해외 합격률은 40~50%인데 우리나라는 이보다 20%포인트 더 높다"며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학원에서 자격증 취득에 초점을 맞춰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피스 활용 일반 강좌와 MOS 자격증 대비 강좌를 모두 개설한 강남의 D컴퓨터학원의 경우 자격증 대비 강좌를 수강하는 대학생이 80%에 달했다. 실제 기능에 치중한 강의를 듣는 대학생은 20%를 밑돌았다.

작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한모(26)씨는 "교재비와 학원비, 응시료로 50여만원을 쓰고 급히 MOS 자격증을 땄다"면서 "입사한 뒤 현업에서 필요한 오피스 프로그램 활용법을 새로 배우느라 진땀을 흘렸다"고 말했다.

지난달 한 화장품 업체에 영업·관리직으로 입사한 최봉규(28·항공대 졸)씨는 대학 시절 컴퓨터활용능력 1·2급, 정보기기운용기능사, 인터넷정보검색사 3급, 물류관리사, 유통관리사, 초음파탐상검사기능사, 금속재료기능사 등 10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최씨는 "가지고 있는 자격증이 10개인데 8개밖에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씨는 "입사한 상황에서 볼 때 자격증에 투자할 돈과 시간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고 했다.

지난 1월 취업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대학생 2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이른바 '스펙'을 쌓기 위해 사교육비로 한 달 평균 27만1000원, 연간 325만원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SK그룹 신입사원 채용 담당자는 "'스펙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학생들의 시각이 문제"라며 "진로를 명확하게 정하고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취업컨설턴트 김동우씨는 "잘못된 취업 노하우가 선배로부터 대물림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