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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4800만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타무너진 숭례문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08. 2. 12.
 
[사설] 4800만 국민 지켜보는 가운데 불타 무너진 숭례문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하룻밤 새 잿더미가 됐다.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거쳐 6·25까지 갖은 전란(戰亂)도 견뎌내며 600년 세월을 견뎌온 서울의 큰 대문이 숯덩이로 무너지는 모습을 국민은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민족의 얼이 담긴 나라의 상징이 소방관 330명, 소방차량 95대가 동원되고도 속수무책으로 불타버린 5시간 사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뽐내던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가 여지없이 발가벗겨졌다. 양녕대군이 썼다는 '숭례문(崇禮門)' 현판이 매트리스도 받치지 않은 맨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추락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숭례문에 불이 났다는 신고가 서울 중부소방서에 들어온 것이 10일 밤 8시50분, 소방관들이 처음 출동해 불을 끄기 시작한 것은 3분 뒤인 8시53분이었다. 발화 시점이 밤 8시48분쯤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불이 난 지 불과 5분 만에 불 끄기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고도 결국 숭례문을 몽땅 태워먹고 마는 거짓말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접근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소방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 수도 한복판,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소방당국은 밤 9시30분쯤 불길이 잦아들고 연기만 나자 다 꺼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남은 불길이 건물 안쪽에 숨어 있는 것을 몰랐다. 소방관들은 옛 목조건물의 복잡한 내부 구조에 익숙하지 않았고, 지붕에 방수 장치가 돼 있어 밖에서 퍼붓는 물이 안으로 배어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몰랐다. 10시40분 불길이 다시 치솟은 다음에야 기와지붕을 뜯고 물을 퍼부어 불을 끄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4800만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은 불'을 '큰 불'로 키워 대한민국 국보 1호를 불태워 버린 것이다.

소방당국은 2005년과 2006년 양양 낙산사와 수원 화성 서장대가 각기 산불과 방화로 타버린 뒤로 문화재 소방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흘러 넘쳤는데도 겉핥기 대책과 남의 눈을 의식한 형식적 훈련으로 그쳐왔다. 서울 중부소방서는 숭례문 내부 도면(圖面)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매년 되풀이한 가상훈련도 건물을 둘러보고 소화전(消火栓)이나 점검하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숭례문 방화 설비는 수동식 소화기 8대와 상수도 소화전이 전부였다. 화재에 특히 약한 목조건축물인데도 요즘 웬만한 건물이면 다 갖고 있는 화재 경보기나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화(防火)의 날'로 정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소방훈련과 문화재 긴급피난, 소방장비 점검 등을 한다. 이 날은 1949년 1월 26일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에 있는 국보 벽화가 화재로 크게 손상되고, 이어 교토 긴카구지(金閣寺)까지 방화로 소실된 뒤 제정됐다. "문화재를 화마(火魔)에서 지키자"는 구호를 내건 훈련에는 각 지역마다 소방대원과 주민, 사찰 승려 등 수백 명이 참가한다.

국보 1호 관리를 위임 받은 서울시는 2005년 "숭례문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며 주변에 광장을 만들고, 2006년 중앙통로까지 일반에 개방했다. 숭례문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됐지만 중구청 직원이 평일 3명, 휴일 1명씩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근무한다. 이들이 퇴근한 밤 시간엔 무인경비업체의 CCTV와 적외선 감지기에만 감시를 맡겨놓았다. 개방한 만큼 더 엄격한 보호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상식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문화재청은 불이 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대전 문화재청에 있는 숭례문 도면을 갖고 왔다. 지난해 5월 발간한 '화재 위기대응 현장조치 매뉴얼'에는 문화재에 불이 났을 때 어떻게 불을 꺼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하나도 없다. 2006년에야 124개 중요 목조문화재에 방재시스템 구축을 시작했지만 해인사 등 4곳에만 설치공사를 했을 뿐 우선순위 48위인 숭례문 차례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 놓고는 11일 아침 일찍 흉물이 돼버린 숭례문에 가림막을 세워 국민의 눈으로부터 감추는 공사부터 서둘렀다.

소방당국은 "화재 초기 문화재청이 '문화재가 손실되지 않게 신중하게 불을 꺼 달라'고 해 적극적으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밤 9시35분쯤에야 문화재청으로부터 "진화가 우선이니 숭례문 일부를 부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이미 불길을 잡기엔 늦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진화는 현장의 진화책임자가 상황을 판단, 결정하는 것"이라고 소방당국 쪽으로 책임을 미뤘다.

문화재청은 "200억원을 들여 2~3년이면 숭례문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문화와 문화재의 의미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조선 태조 7년(1398년) 세우고, 세종 29년(1447년) 고쳐지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견뎌내고, 6·25전쟁의 민족비극을 지켜봐 왔던 우리 역사의 증인인 숭례문은 영원히 사라졌다. 새로 세워지는 숭례문은 원래 것과 모양만 비슷한 21세기 건축물일 뿐이다.

국민이 입은 마음의 상처 역시 쉽게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나라의 얼굴이 어이없게 타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경제대국이라고 거들먹거렸던 이 나라가 사실은 모래 위에 세워진 허상(虛像)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뼈에 저미듯이 절절이 느꼈다. 서울 사는 외국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뭐라 부르며 어떻게 이 나라를 믿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