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부여의 마을 문화> 정찬응
사)백제예술문화연구소(社団法人百済芸術文化研究所)
부여일일일사(扶餘一日一史)
쌍북리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위치한다.
부소산은 왕궁의 후원으로 때로는 시비도성 북방을 수호하는 산성으로 둘러싸고 있다.
백제시대에 백제 중심지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고려 대에는 한 때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과 일부는 몽도면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으로 쌍구리(雙九里)와 뒷개의 북포리(北浦里), 거무내의 흑천리(黑川里)의 각 일부와 몽도면(蒙道面)의 석교리(石橋里) 일부를 병합하여 쌍구와 북포의 이름을 따서 쌍북리라고 하였다.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변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쌍북리가 되었고 고적으로는 부소산성(扶蘇山城), 낙화암(落花岩), 조룡대(釣龍臺), 삼국시대 백제의 군수물자 관련 창고터 군창지(軍倉址), 청산성, 쌍북리 요지, 쌍북리북요지 등이 있다.
쌍북리의 뜸별로는 검은 비가 오면 뻘흙물이라서 거무내(흑천), 도성 뒤쪽이라서 뒷개(북포), 돌다리가 있어 석교, 석은교가 바뀐 삭은 다리, 보리고개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특히 흙천(거무내)은 북포(뒷개)에서 부여초 앞과 관북리 구교육청을 통하여 구아리 구경찰서를 거쳐 구교리 도깨비 방죽으로 흐르는 수계로 사비궁의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는 해자의 역할도 했을 것으로 추측도 된다.
《조룡대 이야기》
부여 쌍북리에 구비전승되는 이야기로 옛날 나당 연합군이 백제로 쳐들어올 때 소정방(蘇定方)은 군산을 통하여 금강(錦江)을 거슬러 올라가 부여를 치고자 하였다. 그래서 부여에 쳐들어오기 전 규암(竅岩)이라는 곳에서 백제의 왕이 무엇을 하는지 엿보았다. 백제의 왕인 의자왕(義慈王)은 낮에는 사람이 되었다가 밤에는 물속에 들어가 용왕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의자왕은 초저녁에는 낙화암(落花巖) 밑 고란사(皐蘭寺)에 가서 놀다가 말바위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고는 하였다. 의자왕의 애첩이 숯불을 피워 돌을 데워 놓으면 용이 되어 놀다 온 의자왕이 따뜻한 바위에 올라가 쉬므로, 바위 이름을 ‘자온대(自溫臺)’라 하였다. 어느 날 소정방이 바위 밑에서 불을 피우던 여인에게 다가가서 용이 좋아하는 고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백마(白馬) 고기를 좋아한다고 대답하였다. 여인의 말을 들은 소정방은 백마 고기를 미끼로 걸어 낚시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놀던 용은 배가 고파지자 백마 고기가 걸린 낚시를 물었다. 그러자 소정방이 낚싯대를 잽싸게 잡아채려 하였지만 줄이 끊어진 탓에 용이 ‘용정’이라는 곳에 가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이 삭으면서 주변 사람들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악취가 났다. 그래서 용이 떨이진 곳을 ‘사근다리’라고 하였다. 삭은 냄새는 공주의 ‘구린내[구리내]’라 부르는 곳까지 퍼졌다고 한다.
《낙화암이야기》
삼국유사 의자왕과 궁녀가 투신한 바위를 타사암이란 사료 또
고려 후기인 1287년 이승휴(李承休)[1224~1300]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낙화암’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조선전기 아름다운 경치에 시인들에 의해 패망한 백제와 연계 비화시켜 삼천궁녀(당나라 현종에 비유) 처음 나타나는 왜곡된 역사다.
또 일부학자는 중정리 옵배에 꽃바위에서 빼어난 경치에 의해 현재 낙화암으로 바뀌었다는 학설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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