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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때 생생화보]/생생산행일지

[2018년 3월 5,6,7일] 제주여행//추사김정희 기념관 답사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8. 3. 10.

[2018년 3월 5,6,7일] 제주여행//추사 김정희 기념관 답사(이효숙, 이귀근, 황순희, 조성인)

 

[대성성지]

대정성지는 조선 시대 제주도의 3읍성 중 하나로 대정현에 축성된 성곽 유적지를 말한다. 행정 구역상 대정성지는 대정읍 안성리, 인성리 및 보성리 일대에 걸쳐 자리 잡고 있다. 제주읍성으로부터 대정성지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50km 정도이다.


제주도는 1416년(태종 16)에 제주목과 정의현 및 대정현 등 3개 지역으로 분리되었는데, 대정성은 분리된 지 2년 후인 1418년(태종 18) 봄에 초대 현감인 유신이 축성했다.

 

대정성의 규모는 길이 4,890척[1,467m], 높이 17척 4촌[5.22m]이고 동·서·남·북문[나중에 폐쇠됨] 등 4개의 문과 옹성, 문루 등을 설치했으며 6개의 치성을 갖추고 있었다. 여첩(女牒)[성 위의 담]은 가장 많은 시기에는 240개, 적은 시기에는 155개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외적의 공격이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 주변에 파놓은 해자 시설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외부 형태로 볼 때, 대정성은 성담을 기준으로 4각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성 안에는 동문과 서문을 잇는 일직선 도로와 남문과 중간 지점을 잇는 주요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전체적으로는 T자형 도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정성은 제주목의 제주읍성이나 정의현의 정의현성과 마찬가지로 축성한 이후 시기에 따라 규모가 조금씩 달랐으며 또한 성곽에 필요한 보조 시설도 서로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처음 축성한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증·개축과 더불어 보조 시설들을 정비해 왔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대정성에 주둔했던 병력은 성장 2명과 치총 4명을 비롯하여 현감 수솔관 115명, 성정군 380명, 유직군 40명이었다. 이외에 관할 봉수와 연대가 각각 3개소와 7개소, 또 이에 필요한 병력으로 별장 60명과 봉군 12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대정성 안에는 동헌인 영안관을 비롯하여 윤경당·청풍당·향사당·군관청·인리청·현창·군기고·기패청 등 여러 용도를 지닌 건물들이 있었다. 대정 향교도 처음에는 성 안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1653년(효종 4)에 단산 아래로 이전했다. 대정성지는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추사 김정희 기념관 답사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의 세도 정치에 도전했다가 쫓겨나 제주도로 귀양 간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쓸쓸한 심정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메마른 둥치를 드러낸 세 그루 소나무에 둘러싸인 초라한 집 한 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도
변함없이 꼿꼿한 모습으로 작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는 절개를 상징한다. 불우한 처지에 놓인 김정희를 끝까지 지켜 주며 북경에서 귀한 책까지 구해 준 제자 이상적을 이 소나무들에 비유했다고 한다.
혼탁한 정치판에서 물러난 김정희는 세상을 한탄하며 글씨와 그림에 깊숙이 몰두하게 된다. 조선 후기
최고의 명품 서체로 알려진 추사체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조선 시대의 대정현(大靜縣)은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과 안덕면, 한경면 일대로서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유배지로 인식되고 있다. 1495년(연산군 2) 환관 김순손(金舜孫)이 연산군의 난폭함을 지적하였다가 충군형을 받고 유배된 이래 조선 왕조 동안 총 60여 명이 유배되었다. 특히 1840년(헌종 6) 대정현에 마지막으로 유배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대정에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김정희의 유배 생활과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추사 김정희는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영조의 사위였던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며,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예조 판서를 비롯하여 이조·공조·형조·병조의 판서를 두루 지낼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김정희 역시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 암행어사·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적이였던 안동 김씨 세력의 탄핵을 받아 1840년(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김정희의 유배 노정을 살펴보면, 충청도 천안, 전라도 완주를 거쳐 해남에서 화북포로 하여 제주도에 들어온 후 대정현으로 들어갔다. 김정희는 처음 대정현 안성리 포교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다시 강도순의 집[오늘날의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으로 옮겼다. 이후 식수 문제로 인해 다시 창천리로 옮겨 거처하였다. 추사는 이후 섬이라는 고립성과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인 제주도에서 가족과 친지, 친구 등 지인들과 격리되어 8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외로운 생활하게 된다.

1848년(헌종 14) 유배가 풀려 복귀하였으나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성행하던 때라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일흔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본디 유배된 죄인은 행동이 제한되는 게 보통이다. 외부와의 연락은 서신으로만 가능하며 음식을 나르는 경우나 관료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차단되어 지루한 생활이 반복된다. 추사 역시 위리안치형으로 집 주위에 가시나무가 둘러쳐 있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일 뿐, 타 지역으로의 이동은 제한이 있었으나 대정현 내에서는 이동이 가능하였다. 이에 추사는 대정향교 현판에 글을 쓰고 산책을 하는 등, 지루하지만 여유로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시·서·화에서 조선 최고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대정현 유배 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추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러 서체를 익히고, 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대정현 유배 생활 중에 완성하였다.

또한 유배인 추사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다. 추사는 1844년(헌종 10) 나이 쉰아홉에 수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어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이나마 토로하였다.

추사가 유배 생활 중 남긴 51제 81수의 시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추사의 글을 살펴보면, 추사가 유배지 제주를 자신이 궁극적으로 속해야 할 공간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배라는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일단 유배지의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태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수용하는 성격과 태도는 추사가 8년 3개월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 유배지에서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게 하였다.

추사는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써도 제주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 힘쓴 추사의 제자로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이상적·강위·허련 등이 있으며, 대정현 유배 중 강기석·강도순·강사공·김구오·김여추·김좌겸·박계첨·이시형·이한우·홍석우 등이 그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또한 민규호의 기록에 따르면, 추사가 제주에 온 뒤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자가 대단히 많았고, 두어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열려서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추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적고 있는 등 추사는 19세기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추사가 생애를 보낸 곳이라면,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 유배 생활을 하였던 제주도 대정, 그리고 북청 유배 생활을 마치고 남은 여생을 보냈던 경기도 과천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모두 추사와 관련하여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하면서 조선 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추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에서는 추사가 대정현에 유배되어 살았던 강도순의 집을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하여 사적 487호인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세한도」 사본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가 대정향교 동재 현의 글씨로 써 주었다는 의문당 현판, 그리고 기증받은 추사 김정희와 친인척의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정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추사문화예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예술제에서는 추사서예대전을 비롯하여 추사 선생 유배 행렬 재현, 대정고을 역사 사진전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추사의 대정 유배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에서는 “제주 유배문화의 녹색 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추사 유배길을 비롯한 추사 김정희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특히 추사 유배길은 “제주 유배문화의 녹색 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사업”의 1차년도 과제로 추사 김정희가 8년 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정을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져 지역의 공간을 역사 인물 스토리텔링의 매체로 활용하였다. 추사유배길은 “추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기획되어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를 중심으로 대정읍과 안덕면에 걸쳐 만들어졌다.

제주 관광의 한 트렌드가 된 올레길과 같이 추사 유배길 또한 3코스로 구분되어 있는데 ‘집념의 길’이라 명명된 1코스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시작하여 송죽사터, 첫 번째 유배지 터, 드레물, 동계 정온 유허비, 한남 의숙 터, 정난주 마리아 묘, 남문지 못, 단산, 세미물, 대정향교,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로 순환된다. ‘인연의 길’이라 명명된 2코스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시작으로, 수월이 못, 제주옹기박물관, 곶자왈 지대, 서광승마장, 오설록으로 이어지며, ‘사색의 길’인 3코스는 대정향교를 시작으로 완당인보, 산방산, 추사아호, 안덕 계곡으로 이어진다.

추사 김정희와 관련한 유배길은 기존의 산발적으로 존재했던 추사 관련 이야기들을 체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로 한정되어 있던 공간을 대정읍 일대로 확장하여 지역 홍보와 발전에 많은 효과를 거둘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추사 김정희와 관련한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면서 추사 김정희의 대정 유배 생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과 동시에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콘텐츠로 활용되어 김정희의 대정 유배가 재해석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는 지역으로 서귀포시가 변화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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