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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정(고향)소식]/[매월기행]매월당김시습기념사업회

[2014년 5월 17일]제15차 梅月紀行 안내

by 팬홀더/자운영(시적성) 2014. 5. 20.

 

 

제15차 梅月紀行 안내

 

 

일시 : 2014년 5월 17일(토)

장소 : 강원 평창 월정사-상원사

일정 : 08:00 – 11:00 월정사 도착

11:00 – 11:30 천년 숲길 걷기

11:30 – 12:00 점심

12:00 – 13:00 월정사 및 성보박물관 답사

13:00 – 13:20 상원사 이동

13:20 – 14:30 음악회 참가 및 상원사 답사

14:30 – 16:30 적멸보궁 답사

16:30 – 17:00 오대산 사고 답사

17:00 – 20:30 서울 도착, 해산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김시습과 월정사]

1460년 봄, 26세 때 김시습은 원주 치악산을 넘어 각림사에서 묵고 오대산으로 갔다. 당시 오대산은 강릉에 속했다. 방림역, 대화역, 진부역을 거쳐 월정사로 갔다. 오대산은 비로봉, 동대산, 호령봉, 상왕봉, 두루봉 등 5개 봉우리의 너른 품에 중대(지공대), 동대(만월대), 서대(장령대), 남대(기린대), 북대(상심대) 등 평평한 대지가 둘러싸고 있어서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월정사에 도착한 김시습은 불로장생에 관심을 갖고 신선의 방술을 배우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구슬 망은 영롱하여 보수를 장식하고

천화는 아득하게 예상에 떨어지네.

신선산은 멀리 사람 사는 곳과 떨어졌으니

원컨대 청낭의 옥 먹는 법을 배우고 싶네.

월정사 축대 밑에 있는 금광연은 오늘날 금강연이라 부른다. 김시습은 봄물이 콸콸 쏟아지고 온 산에 철쭉꽃이 붉은 봄풍경을 시에 담았다.

1백길 얼음 벽 아래 다시 물이 감도니

도화랑(얼음 녹은 봄물)이 우레같이 거세다.

산 가득한 철쭉은 타는 듯 붉구나.

우문(용문) 물고기가 아가미를 볕 쪼일 때로세.

김시습은 중대, 서대, 남대, 동대, 북대를 모두 돌아보고 시를 읊었다. 이후 강릉으로 간 김시습은 관동팔경 등을 둘러보며 2~3달을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그 해 여름 오대산으로 온다. 그는 이곳이야말로 자취를 감출 만한 곳이 아닐까 생각했다.

산 속에 밤이 깊어

찬이슬 기운이 옷에 엄습한다.

둥지 새는 놀라 꿈을 깨고

반디는 낮은 담을 넘어 지나간다.

안개 걷히자 일만 골짜기 고요하고

달이 밝아 오봉(오대산)이 서늘하구나.

어느 곳이 참으로 숨을 만한가

소나무와 삼나무 향기 10리에 풍기는 이곳.

김시습은 나옹화상이 지니고 다녔다는 향반(밥그릇)과 승상(끈으로 엮은 침상)을 보고 공경했다.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에게서 2년 간 배운 나옹은 1358년 공민왕 7년 우리나라에 와 오대산에 석장을 머물고는 승상을 암자벽에 걸어두고 지난 추억을 더듬곤 했다고 알려졌다. 김시습은 그를 존경했다.

김시습은 중흥사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오대산 북대암에 작은 집을 짓고 머물렀다.

작은 당집 처음으로 지어 놓으니

뜰 나무에 우는 새 소리를 듣네.

벌써 이미 삼생의 원을 걸고서

한 가지 마음으로 참여하였네.

손수 나물을 땄으며 산중 암자에 거처하는 순로, 여로, 전선로 등 여러 선사들과 깨달음에 대하여 토론하며 자신의 감흥을 시로 읊기도 했다. 어느 곳이 과연 은둔하기에 적합한가에 대해 토론하자 전선로는 강원도 정선의 벽파산이 은둔처로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전선로의 말을 들으며 김시습은 문득 세상 어느 곳에도 진정으로 숨어들 곳은 없구나 생각했다. 그는 훌훌 오대산을 떠나 평창의 백양진에 있는 평창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영월을 거쳐 주천현 누각에 오르는 등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다.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 중심 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 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 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僧伽)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그 때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이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 정암사에 들어가 입적하게 된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뒤로 유동보살 -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 - 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승 신의 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 :진부면 수항리에 있던 절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상원사]

상원사에 ‘단종애사’의 악역 세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얼마 못 가 괴질에 걸리게 된다.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세조가 월정사에 들러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물이 맑은 계곡에 이른 세조는 몸에 난 종기를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몸을 씻고 있었는데,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에서 놀고 있었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 등을 씻어달라고 부탁하며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화공을 불러 기억을 더듬어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하여 나무를 조각하였다. 이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을 상원사의 법당인 청량선원에 모셨다.

다음 해에 상원사를 다시 찾은 세조는 또 한 번 이적을 경험했다. 상원사 불전으로 올라가 예불을 드리려는 세조의 옷소매를 고양이가 나타나 물고 못 들어가게 했다. 이상하게 여긴 세조가 밖으로 나와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게 하자, 탁자 밑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 덕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상원사에 ‘고양이의 밭’이라는 뜻의 묘전을 내렸다. 세조는 서울 가까이에도 여러 곳에 묘전을 마련하여 고양이를 키웠는데, 서울 강남구에 있는 봉은사에 묘전 50경을 내려 고양이를 키우는 비용에 쓰게 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겪은 세조는 그 뒤에 상원사를 다시 일으키고 소원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오늘날 건물은 1947년에 금강산에 있는 마하연 건물을 본떠 지은 것이지만, 이름 높은 범종이나 석등은 이미 그때 마련된 것들이다. 상원사는 청량선원, 소림초당, 영산전, 범종을 매달아놓은 통정각 그리고 뒤채로 이루어진다. 한국전쟁 당시 군사 작전으로 오대산의 모든 절을 불태웠을 때도 상원사는 문짝밖에 타지 않았다. 30년 동안이나 상원사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참선한 것으로 이름 높은 방한암선사가 절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각오로 버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짝만 불태웠다고 한다. 방한암선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해지는데, 이곳에서 불법을 닦는 이들은 선사가 고요히 앉은 채로 입적한 사진을 돌려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오대산 신앙의 중심이 되는 중대의 사자암에 가면 선사가 이곳으로 올 때 짚고 와서 꽂아놓은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해마다 잎을 틔운다는 단풍나무를 볼 수 있다.

 

[평창과 이효석]

오대산 아랫자락에 자리한 고을 평창은 소설가 이효석의 고향이다. ‘1930년대 우리 문단에서 가장 참신한 언어 감각과 기교를 겸비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던 이효석은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났다.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하던 시기에 쓴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으로 꼽힌다. 매년 9월이면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이자 이효석의 생가가 있는 봉평면 일대에서 효석문화제가 열린다.

 

 

매월당 김시습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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